<98>
주말이라 오랜만에 늦게까지 자고 일어나자 시에나에게서 편지가 와 있었다.
시간을 벌어 주겠다고 하지 않았냐는 원망과 언제쯤 안전한 곳으로 갈 수 있냐는 재촉에서 시에나의 불안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전날 편지를 통해 성기사의 날 전까진 신전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 못 박았지만 내 말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초조한 모양이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에이든이 모습을 나타냈다.
“점심 먹어야지. 어서 내려와.”
“잠시만. 답장만 보내고 갈게.”
“누구한테 보내는 거야?”
“시에나. 나비 문신에 대해서 증언하는 대신 안전한 곳으로 옮겨 주겠다고 했거든.”
며칠 전 나비 문신을 한 심부름꾼에 대해 이야기하자 에이든은 당황한 얼굴을 했었다.
그는 그날 저녁 알아볼 게 생겼다며 나가더니 다음 날 오후에야 돌아왔다.
뭘 알아보고 왔는지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시에나를 무너트리는 데 집중할 때라 입을 다물었었다.
“성기사의 날이 끝나면 네게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 그리고… 이거, 읽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뭔데?”
에이든이 건넨 건 편지였다. 에스타리온 백작가의 인장이 박힌 편지.
“시온이 준 거야?”
“아냐. 염치도 없이 어떻게 그래.”
봉투를 살피자 발신인에 루카스란 이름이 쓰여진 게 보였다.
“루카… 스?”
루카스 데 에스타리온은 세상에 딱 한 명뿐이다. 작은아버지.
하지만 작은아버지는 오래전 쓰러져서 의식이 없는 상태다.
“이게 무슨…….”
“깨어났대. 엊그제 일 때문에 시온을 만났는데 전해 달라고 하길래.”
손이 떨려 왔다. 전율인지 소름인지 모를 감각에 속이 울렁거렸다.
봉투를 뜯자 시온이 아닌 낯선 글씨가 보였다.
[사랑하는 내 조카 셀레나에게.]
시온이 질 나쁜 장난을 치는 걸까. 아니면 허튼수작을 부리는 걸까.
짧은 문장을 확인하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을 감았다 깨어나니 13년이란 시간이 지나 있구나. 내가 알던 시온은 풋내기 꼬맹이였는데 어른이 되었어. 그건 너도 마찬가지겠지.]
작은아버지는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거였다.
기억을 되찾고 난 뒤 작은아버지의 일이 가장 마음에 걸렸는데 의식을 찾았다고?
얼른 편지를 마저 읽어나갔다. 거기엔 작은아버지가 언제 의식을 차렸는지부터 어떻게 집안 상황을 알게 되었는지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셀레나. 내가 너를 낳은 건 아니지만 나는 늘 너를 내 딸이라고 생각해 왔단다. 그래서 네가 어떻게 컸는지, 지금 어떤 모습을 했는지 너무 궁금하구나. 괜찮다면 너를 만나고 싶은데 시간을 내어줄 수 있을까?]
나는 손을 뻗어 더듬더듬 편지지와 펜을 잡았다.
툭. 펜이 떨리는 손에서 빠져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가슴이 울렁거리다 못해 토할 것 같았다.
“다, 답장을 해야 하는데…….”
너무 놀라서 뭐라고 운을 띄워야 할지도 모르겠고 손에 힘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작은아버지가 깨어났다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 모른다.
에이든이 내 옆에 앉아 부드럽게 다독여 주었다. 온기를 확인하자 코끝이 시려 왔다.
“그 아저씨가 깨어나서 나도 기뻐. 죽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게 기적 아냐?”
“맞아. 이건 기적이야.”
“손이 떨리면 내가 대신 써 줄게. 얼른 답장하자. 그래야 하루빨리 그 아저씨를 만나지.”
“으응.”
에이든은 바닥에 떨어진 펜을 들어서 나 대신 편지를 써내려갔다.
[감격한 셀레나가 진정하지 못해서 제가 대신 펜을 듭니다. 저는 셀레나의 친구, 에이든 칼립소입니다.]
나는 에이든이 한 자 한 자 고심해서 편지를 이어가는 걸 확인했다.
“참. 이 아저씨가 나비 문신을 기억한대.”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나비 문신을 말해 준 그 날, 시온을 찾아갔었어. 녀석이 마음에 안 들지만 함께 수사하는 입장에서 정보를 나눠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신전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잘 아니까 혹시나 해서 물어봤더니 루카스 에스타리온에 대해 말해 주더라고.”
“작은아버지를 만났어? 어때 보였어?”
“건강해 보이더라. 13년 전 잠시 본 얼굴인데 그렇게 보니 그때 얼굴이 생각나는 것 같았어.”
“다행이야….”
“아무튼 그 양반이 나비 문신을 한 놈의 얼굴을 봤대. 그간 잠들어 있어서 엊그제 일이라 어떻게 생겼는지 잊지도 않아서 시온이 따로 몽타주를 만들어 뒀더라고. 지금 신전에 사람을 심어놔서 곧 몽타주 속 인물이 누군지 알게 될 거야.”
“그럼 시에나의 증언이 필요 없겠네.”
“그렇지. 목격자보단 피해자의 증언이 더 확실하기도 하고.”
편지를 마무리한 에이든은 내게 내용을 확인해 보라며 편지지를 내밀었다.
독서는 싫어해도 매일 아침 신문 읽기는 게을리하지 않더니 내용이 제법 유창했다. 글씨는 여전히 엉망이었지만.
“그러니 시에나에게 한 수 접고 들어가지 말고 네 멋대로 해.”
편지를 봉투에 넣으며 에이든이 신이 난 얼굴로 씩 미소 지었다.
나를 응원하는 단단한 눈빛을 마주하자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성기사의 날이 다가왔다.
* * *
덜컹거리는 마차 소리가 심장박동 같았다. 에이든과 나 사이엔 전운이 감돌았다.
지난 일주일간 어찌나 바빴는지 모른다.
회사 일을 하며 틈틈이 신전에 가서 나침반 증폭 기구를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했고, 작은아버지와 매일 편지하며 약속일을 잡았다.
시에나는 매일 같이 내게 언제쯤 안전한 곳에 갈 수 있냐고 매달렸다.
작은아버지가 증언을 해 주기로 한 이상 더 이상 그녀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 두면 시에나가 도망갈 것 같았지.’
나는 시에나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사기꾼인 게 드러나길 바랐다.
그래서 그녀에게 거짓을 속삭였다. 신전이 시킨 대로 하면 크루커스의 비밀이 밝혀지지 않을 것 같다고.
괜히 너를 이동시키다가 의심을 사느니 성기사의 날 행사가 끝난 뒤에 건강상 문제로 성녀를 은퇴해 조용히 사라지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더니 기쁜 마음으로 수락했다.
사기꾼인 주제에 명예를 바라는 게 어처구니없었지만 시에나를 이해하는 건 그만큼 이상한 사람이 된단 뜻이라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어찌 됐건 중요한 건 몇 시간 뒤 모든 진실이 밝혀져서 시에나가 진탕 속으로 끌려 들어가게 될 거란 거다.
“긴장돼?”
“조금.”
“잘 해낼 거야. 너무 걱정 마.”
“잊지 못할 행사가 될 거야. 역사에 이름이 남을지도 모르지. 아무튼 오늘 함께 가 줘서 고마워.”
“재미난 구경이 있을 예정인데 빠질 수가 있나.”
에이든은 시에나에 유감이 많은지 나보다 이번 일을 반기는 눈치였다.
곧 마차가 멈추었다. 이른 시간인데도 신전 앞은 행사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셀레나. 나는 자리에 가서 기다릴게. 잘하고 와.”
마차가 멈추자 에이든은 자리를 찾아갔고 나는 나를 기다리던 사제를 따라 신전 내부로 안내되었다.
“셀레나 자매님. 대신관님께서 기다리십니다. 나침반은 챙겨오셨지요? 사람들이 많이 몰려서 신전 하인들로도 질서가 잡히지 않아 사제분들까지 나섰습니다. 아무래도 행사를 조금 빨리 시작할 듯합니다.”
내가 안내받은 자리는 제사 의식이 집행되는 가장 앞자리였다.
그곳엔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한 시에나도 와 있었다.
옆줄엔 황태자와 재판에 관련된 인사들. 그리고 기자들이 가득했다.
시온과 에이든은 황태자의 뒷줄에 자리했다.
“셀레나. 오늘… 괜찮겠어?”
시에나의 말은 내 말을 믿어도 되냐는 뜻이었다.
나는 품에 있는 나침반을 만지작거리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잠시 뒤 신전의 창문이 활짝 열렸다. 신전을 방문한 평민들이 제사 의식을 구경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제사의 시작을 준비하자 오르간이 연주되었다.
그리고 오래전 제국을 건국한 성기사들이 썼던 대검과 함께 대신관이 등장했다.
“우리는 신전이 믿음 있는 신자와 사제, 성인성녀로부터 신성을 유지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안전한 곳에서 신의 가르침을 받고 신성을 유지해 온 게 단순히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 생각해선 안 됩니다. 그건 모두 가장 위험한 곳에서 악과 싸운 성기사들의 보호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대사제는 성기사들이 사선에서 얼마나 많은 위험을 맞닥뜨렸으며 그들 덕분에 긴 시간 신전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뜸을 들였다.
오늘 나를 성기사에 빗대어 그 위용을 과시하기 위함이다.
“어둠의 시대가 도래하였기에 성기사의 자격을 갖춘 이들이 줄어들었고 우린 어둠과 맞서 싸우고 신전을 보호할 강력한 보호자를 잃어버렸습니다. 위대한 성기사들이 건국한 이 나라에 그들이 사라진 건 대단히 비극적인 일입니다. 성녀를 사기꾼이라 매도하고 신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또한 우릴 지킬 파수꾼이 사라졌기 때문이겠지요. 이것은 악의 소행입니다!”
대신관은 시에나를 고소한 황실을 노골적으로 악이라 규정했다. 신전과 황실이 맞부딪쳤다.
헙! 헉!
주변에서 놀라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곁눈질을 하니 기자들은 신이 나서 대신관의 말을 받아적고 있었다.
“그러나 신께선 우릴 버리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성녀님에 이어, 이 시대에 사라진 성기사를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축복임이 분명합니다! 당신의 권능을 보여 주기 위한 신의 말씀이기도 하지요!”
대신관은 좌중을 훑었다. 모두 대신관의 말에 집중했다. 성기사의 등장은 새로운 파란을 일으킬 게 분명했다.
“예로부터 성기사는 악을 분멸하여 어둠을 물리치고 선을 지키는 신전의 수호자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내려진 성기사가 무엇이 진짜 악인지 증명해 보일 것입니다!”
“성기사가 누구입니까?”
좌중에서 누군가 목소리를 냈다. 대신관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는 바로 셀레나 에스타리온, 타락하여 신전을 배신한 에스타리온으로 인해 모함을 받아 이단심문소에 들어갔다가 무고함을 증명받은 여인입니다. 우리 사제들은 그간 많은 노력을 쏟아 그녀가 자질을 갖췄음을 증명하였고 기사직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녀는 신전을 대표하여 어둠의 농간을 증명할 것입니다!”
내가 볼 때 대신관은 사제가 아니라 배우가 되었어야 했다.
어떻게 해야 관심을 끄는지 너무 잘 알았다.
“신전을 밝힐 등불이자 이 시대의 파수꾼이 될 셀레나 자매님. 앞으로 나오십시오.”
대신관이 나를 호명했다.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