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97화 (98/134)

<97>

“이게 왜…….”

시에나는 혼란스런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가 확인하고 있는 건 법정출석요구서였다.

셀레나가 시간을 끌어 준다고 했으니 이런 것도 막아 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크루커스에 관련된 것만 도와주려는 거구나.’

맹세코 이렇게 빨리 재판이 열릴 줄은 몰랐다.

신전이 재판을 막아 주고 황실과 대립해서 최소한 한 달 뒤에나 이런 서류가 올 줄 알았는데.

“정말로 제가 가야 하는 건가요?”

“성녀님께서 출석하지 않는다고 하시면 황실에선 일을 더 키울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가 출석하는 자체로 신전의 명예가 떨어지게 될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

“신전도 성녀님도 떳떳한데 명예가 바닥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사제의 말에 시에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뒤에선 제 욕을 하면서 이렇게 믿는 듯 굴다니, 신전에게 무슨 수라도 있는 걸까.

“재판에 가야 하는 거라면 일찍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당장 내일이 재판이라니 조금 당황스럽네요.”

“죄송합니다. 사제회의가 오늘에야 끝나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참. 이건 변호사가 짚어 준 질문지입니다. 그리고 내일 재판에 대신관님께서 동행하여 재판을 이끌어가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니 너무 두려워 마세요. 성녀님께선 잘해 내실 겁니다.”

사제가 준 서류는 몇 장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대신관이 재판을 완전히 휘저을 모양인 듯했다. 시에나는 소리 없이 안도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기 전까지 서류를 읽고 또 읽었고, 다음 날 재판장으로 가는 내내 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그런 그녀의 기도가 통했기 때문일까. 재판이 시작되기 전, 대신관이 나섰다.

“교회에는 교회법이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처벌하고자 하는 건, 황실이 신성을 무시한다는 증거겠지요. 저기 떨고 있는 우리 가엾은 성녀님을 보세요. 무고한 분을 이런 험한 곳에까지 출두시키다니 신께서 노하실 겁니다.”

대신관은 다른 이들이 발언하기 전 보란 듯 기자들과 황태자에게 소리쳤다.

“다가오는 성기사의 날에 공개적으로 크루커스의 진위를 밝히겠습니다. 크루커스가 진짜임이 밝혀진다면 황실은 깊은 통감으로 신성모독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재판장이 웅성거렸다. 성기사들이 사라진 이후 신전에선 성기사의 날 행사를 비공개적으로 치러 왔다.

행사를 공개로 돌려 크루커스의 진위를 확인해 주겠단 건 크루커스가 진품이라 확신한다는 의미다.

“이번 사건의 사기 여부는 크루커스가 성물임을 밝혀내는 데에 달렸습니다. 크루커스가 거짓이라 주장하는 황실의 자료는 확인하였으니 신전 측의 자료를 확인할 차례지요.”

“크루커스는 성물입니다. 재판에 관련된 모두를 초대하지요. 그리고 그 사실을 널리 알려 신전의 불명예를 씻어 줄 기자 분들도 함께 초대하는 바입니다.”

“좋습니다. 허면 오늘 재판은 연기하는 바입니다.”

재판은 그렇게 끝이 났다. 신전의 호언장담은 기사를 타고 빠르게 수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성기사의 날 행사를 공개한다고 했던 터라 수도에 거주하는 이들은 성녀와 크루커스를 구경하러 가겠다며 입을 모았다.

그리고 셀레나는 자신을 찾아온 대신관을 보곤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시에나는 대신관의 심부름꾼이 납치범이었던 케빈과 함께 있었다고 했다.

13년 전에도 그 심부름꾼이 대신관의 아래에서 일했다면 납치 사건엔 대신관도 깊이 연루되어 있는 걸 테다.

나는 얼굴이 굳지 않도록 더 짙은 미소를 지으며 대신관을 맞았다.

“대신관님께서 어쩐 일이신가요?”

“큼. 흠. 셀레나 자매님. 잠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그럼요. 없어도 내야지요.”

“그게… 큼. 현재 수도에 도는 소식을 잘 아실 겁니다. 오늘 제가 찾아온 건 셀레나 자매님께 따로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입니다.”

“제가요?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다면 언제든 드려야겠죠. 어려워 말고 편히 말해 주세요.”

달칵. 찻잔을 내려놓자 대신관은 차를 홀짝거리며 나를 힐끔힐끔 살폈다.

나는 최대한 고분고분하게 보이도록 노력했다.

“자매님께서 가지신 신성력으로 크루커스를 감별하는 걸 보여 주셨으면 합니다.”

“크루커스를요?”

“예. 셀레나 자매님께서 가지신 그 나침반을 증폭시키는 유물이 있습니다. 그것을 활용해 다가오는 성기사의 날, 모두에게 증명하고 싶습니다.”

시에나와 내 사이 일을 대충이나마 알 텐데 저런 부탁을 하는 건, 내가 시에나보다 백작을 더 미워한다고 믿기 때문일 거다.

시에나와는 신전에서 몇 번이고 마주쳐 대화를 나누어 그럴듯하게 비추어진 데 비해, 백작과는 공식 석상에서 마주치기만 해도 얼굴을 구겨 왔다.

“음… 제가 큰 도움이 될까요?”

“룰론이죠. 사제들 또한 크루커스가 성물임을 증명해 낼 테지만, 성기사의 후손에 성기사의 자질을 가진 자매님께서 축복된 날 증명해 보이는 건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닐 것이라 믿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크루커스가 마법 물품이라니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황실은 신성을 모독하고 사제분들을 욕보이는 중이에요. 황태자 전하께서 대체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어요.”

흥분한 척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자 대신관의 얼굴에 만족스런 빛이 맴돌았다.

“시에나와 사이가 좋진 않지만 이런 식으로 오해받는다니 마음이 좋지 않았는데 잘되었네요. 오늘 시에나에게 따로 편지를 부쳐야겠어요.”

시에나에겐 시간을 벌도록 노력하겠다고 했지만 처음부터 그럴 생각 따윈 없었다.

그녀가 증언할 수 있도록 적당히 회유해서 안전한 곳으로 옮겨 놓기만 하면 될 일 아니던가.

어차피 이렇게 신전 측에서 부탁할 걸 알고 황태자에게도 따로 언질을 줬었다.

여차하면 시에나를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최선을 다할 테니 맡겨만 주세요.”

아무것도 모르는 대신관은 신전에 방문하면 나침반 증폭기의 사용법을 알려 주겠다고 했다.

“자매님께 기사직을 내리겠습니다. 성기사로서 활동하여 성녀님의 무고함을 밝히고 악과 맞서 싸워 주십시오.”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오해로 인해 이단심문소에 다녀왔지만 실은 성기사가 될 자질을 갖춘 축복된 이였던데다 기사직까지 갖게 되시면 한 편의 극이 따로 없군요.”

대신관은 그 자리에서 내게 성기사로 임명하였다.

나는 그가 돌아간 뒤 곧장 황태자와 시에나에게 편지를 썼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성기사의 날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 * *

“셀레나. 오랜만이야.”

집에 돌아오자 에이든이 나를 보고 인사했다.

검술 대회 이후 일이 있다며 훌쩍 사라졌던 터라 이렇게 에이든을 마주하자 코끝이 찡해졌다.

“어, 어어… 왜, 왜 울어. 내가 실수했어? 왜 우는 거야.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당황한 에이든이 한달음에 다가와 나를 꼭 껴안았다. 그러면서도 안절부절못해 내 눈가를 닦아주었다가 발을 동동 굴렀다.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훌쩍 떠난 게 화가 나고 원망스러운데 이렇게 얼굴을 보니 그간 쌓인 마음이 사르륵 녹는 게 나도 중증인 듯하다.

나는 주룩 흐르는 눈물을 벅벅 닦고는 그의 발을 꾹 밟았다. 나름대로 힘주어 밟았는데도 에이든은 아프지도 않은 눈치였다.

최대한 톡 쏘는 말투로 말했다. 물론 그를 노려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왜 이제 와.”

“그게… 그…….”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게 미워서 그를 노려보자 에이든은 변명을 포기하고 깔끔하게 사과했다.

“미안.”

“정말 멋없는 사과네.”

“그것도 미안.”

에이든은 내 시선에 어쩔 줄 몰라 벌 받는 강아지처럼 끙끙거렸다.

산만 한 덩치에 외모도 무뚝뚝한데 내 앞에선 순한 양이 된 모습을 보자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표정을 풀자 에이든이 안도한 얼굴을 했다. 그가 가방을 들어주며 물었다.

“이제 마친 거야?”

“응. 넌 언제 왔어?”

“한 시간 전에. 가방이 무겁네. 매번 이렇게 무거운 걸 들고 다니는 거야?”

“오늘만. 확인할 서류가 많아서 그래.”

“너무 늦게까지 일하지 말고 일찍 자. 회사도 중요하지만 건강이 더 중요해.”

“일 때문에 며칠씩 집을 비우는 네가 할 소리는 아닐 텐데?”

“그건 그렇지만…….”

대꾸할 말을 못 찾았는지 에이든은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그에게서 가방을 뺏어 문 앞에 대충 내려다 놓았다.

그러자 그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보았다.

“저녁 식사 전에 정원이라도 한 바퀴 돌자.”

은근슬쩍 에이든의 팔짱을 끼자 그의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걸음마저 뚝딱거리는 게 정말 한결같았다.

고장 난 에이든을 보는 게 재밌기도 하지만 안쓰럽기도 해서 다시 팔을 빼려는 순간이었다.

‘아…….’

에이든이 슬그머니 내 손을 잡아챘다. 단순히 손을 붙잡은 게 아니라 어어 하는 사이 손깍지까지 껴서 단단히 붙들었다.

슬쩍 고개를 들어 그를 확인했다. 노을 진 하늘처럼 붉어진 목덜미를 해 놓곤 뻣뻣하게 앞만 보고 있었다.

내 복수가 끝나면 우리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지금도 일반적인 관계는 아니다.

결혼 안 한 미혼의 남녀가 한집에 살기도 하고 서로의 마음을 알면서 마음껏 사랑하는 걸 유보하는 중이다.

다 에이든이 내 상황을 이해해 주고 배려했기 때문에 이런 애매한 관계가 지속될 수 있었다.

내가 에이든이라면 서로 마음을 확인했는데도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상황을 이어가는 건 힘들어서 못 할 테다.

‘어떻게 너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을까.’

납치당했던 건 아주 끔찍한 일이지만 그곳에서 에이든을 만났기에 이렇게 함께할 수 있다.

그럴 때면 내게 깊은 상처를 입힌 그 일이 운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무슨 생각해?”

“응? 에이든, 뭐라고 했어?”

“무슨 생각을 하냐고.”

“빨리 모든 일이 다 끝나서 너와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에이든의 뒤로 불타오르듯 붉어진 노을이 보였다. 역광인데도 그의 피부에 노을이 번져갔다. 나를 붙든 그의 손에 힘이 더해졌다.

“어서 납치 진범을 잡을게. 조금만 기다려 줘.”

“진범을 잡으면 좋지만 꼭 그러란 의미는 아니었어.”

“알아. 내가 잡고 싶어서 그래. 진범을 잡고 나면 네가 온전히 미래만 보고 살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때가 되면 네가 꿈꾸는 미래에 내가 들어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에이든은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은지 푸시시 미소를 지었다.

미소가 선명해지는 만큼 흉터도 진해졌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노력하지 않아도 네가 있을 거야. 너와 꿈꾸는 미래니까.”

내가 말해 놓고 가슴이 콩닥거려서 일부러 에이든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맞잡은 손에 땀이 났다. 에이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궁금한데 막상 보면 쑥스러워서 소리를 지르고 싶을 것 같았다.

“참. 시에나가 이상한 말을 했어.”

“이상한 말?”

“과거에 케빈과 협력했던 남자를 신전에서 봤대. 대신관의 심부름꾼이라고 하던데 좀 알아봐야 할 것 같아.”

그가 꼬치꼬치 캐물을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듯해서 고개를 돌리자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한 에이든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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