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96화 (97/134)

<96>

궁지에 빠진 생쥐의 말을 믿어도 되는 걸까. 시에나는 지금 못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다가 겁에 질려서 넋이 나간 만큼 저 유리한 말을 하려고 거짓도 꾸며낼 수 있으리라.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가서 네 처분이나 기다려.”

“거짓말 아냐. 진짜야. 똑똑히 기억한단 말이야. 케빈을 만나러 온 남자들의 옷자락엔 신전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어. 망토 아래로 보인 자수가 신전의 것이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까지 똑똑히 기억해.”

“그 남자들이 케빈에게 어떤 말을 했는데? 증명할 만한 걸 얘기해 봐.”

“그, 그건…….”

시에나는 입술을 콱 깨문 채 손을 떨었다. 더는 시에나와 함께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만 나가 줬으면 하는데.”

내 의도보다 차가운 음성이 나왔다. 시에나가 어깨를 움찔거리더니 말했다.

“망토를 쓰고 케빈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 남자, 손등에 문신이 있었어. 나비 문신이었지. 그리고 신전에서 그 남자를 다시 봤어.”

“거짓말 그만해.”

“진짜야! 대신관의 심부름을 하는 노예였어!”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줄은 아는 거야?”

“셀레나. 제발 날 좀 도와줘. 대신관을 협박할까 생각해 봤지만 그랬다간 당장 살해당할 거야. 이렇게 빌게. 응?”

시에나가 두 손을 비비며 울었다. 머릿속이 멍했다.

그러니까, 내 납치를 사주한 사람이 대신관일 수도 있다는 거였다.

“…방금 그 말, 증언할 수 있어?”

“증언?”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냐고 물었어. 시에나.”

“증언하면 날 도와줄 거야?”

“이단심문소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 줄게. 넌 신전의 힘이 닿지 않는 곳에 머물게 될 거야.”

“신전에서, 날 꺼내 주겠단 거야?”

“그래. 널 도와줄게. 내게 널 도와줄 힘이 있어.”

“하, 하지만 아무리 너라도 대신관과 맞설 수는 없어.”

“황태자가 합세한다면 또 다르겠지. 알다시피 황태자와 나는 한때 약혼한 사이였고 지금은 꽤 전략적인 관계를 구축했거든.”

“화, 황태자 전하까지… 조, 좋아. 증언할게. 그러니 이제 네가 나한테 뭘 어떻게 해 줄 수 있는지 설명부터 해 줘.”

시에나는 내가 그럴싸한 방법을 제시하기 전엔 돌아가지 않을 기세였다.

“크루커스의 분별을 네게 맡기겠다고 했어. 크루커스가 가짜라면… 어떻게 사제들을 속아 넘길 거야?”

“내가 어떻게 해 주길 원하니? 신전에서 제안하면 거절해 줄까? 아니면 네가 그럴싸한 이유를 들어서 몸을 숨길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끌어 줘?”

“시간을 끌어 줘. 그리고 내가 안전한 곳으로 옮길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내.”

“찾아내?”

명령조의 말에 한쪽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날카로워진 말투에 시에나가 숨을 삼키더니 말을 정정했다.

“찾아내 주면 좋겠어. 부탁할게…….”

“좋아. 신전 측에서 제안이 오면 시간을 끌 테니 넌 가서 기다려. 변명거리를 만들어서 널 다른 곳으로 인도하게끔 만들 테니까.”

내 말에 시에나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간 어지간히 마음고생 한 모양이다.

시에나는 콧물이 마른 코와 부은 눈가를 닦았다. 그녀는 몇 번이고 고맙다 인사한 뒤 떠났다.

나는 시에나가 몰고 온 폭탄 같은 진실에 한참 동안 생각에 빠져 있어야만 했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사이, 많은 이들이 연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다.

* * *

시온은 제 작은아버지인 루카스를 살폈다.

십여 년의 세월 때문에 전에 없던 주름이 생기고 수척해지긴 했지만, 눈을 뜬 루카스는 그가 기억하던 작은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였다.

특히 당당한 말투와 애정이 깃든 눈빛이 그러했다.

“이렇게 깨어나셔서 다행이에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구나. 분명 너는 조그만 소년이었는데 네가 이렇게 멋진 청년으로 컸다니…….”

루카스는 오랜 가사 상태에서 깨어나자마자 셀레나가 위험한데다 파렴치한 죄를 저지른 줄리아를 벌해야 한다며 난동을 부렸다.

그가 가사 상태에 빠지기 전 목격한 상황이 셀레나가 제 정부인 줄리아에게 납치당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백작가의 하녀들은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강제로 진정제까지 먹어야만 했다.

소동은 시온이 등장한 뒤 진정되나 싶었지만 루카스는 훌쩍 자란 시온이 제 조카인 걸 이해하지 못해 한동안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의식이 없는 동안 시간이 십 년이 넘게 지난 걸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걷는 건 좀 어떠세요?”

“이제 꽤 안정적으로 걷는다. 처음에 간신히 몸을 일으키던 것에 비하면 많이 발전했지.”

“금방 회복되셔서 다행이에요.”

“그래. 몸이 회복되면 지나간 시간에도 적응해 나가야겠지.”

“작은아버지께선 잘하실 거예요.”

매끄러운 말투였지만 루카스는 시온이 어딘가 넋이 나간 것 같다 여겨졌다.

첫날부터 그랬다. 시온은 그가 깨어난 걸 반가워했지만 온전히 기뻐하진 못했다.

루카스는 그게 에스타리온 백작가에 변고가 생겼기 때문이라 여겼다.

그가 깨어난 지 일주일이 되었지만 그의 형, 알바로와 셀레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시온은 그 부분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고 루카스는 시온이 가문을 물려받은 것을 확인하곤 제 형이 세상을 떠났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셀레나에게도 변고가 생긴 거겠구나.’

납치를 당한데다 그가 현장을 확인했으니 아이를 가만두지 않을 게 뻔하다.

루카스는 그날 그렇게 저 혼자 가는 게 아니었다며 홀로 자책했다.

셀레나가 잘못되었으니 그의 형 또한 충격으로 잘못되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테다.

“시온. 괜찮은 거냐?”

“예?”

딴생각을 했던지 시온이 놀라 되물었다.

“무슨 일 있는 거냐?”

“아뇨. 아닙니다. 그저 요즘 일이 많아서…….”

“가문의 일이라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다.”

“아닙니다. 영지 일은 아니고 돌아가는 정세가 복잡해서 그렇습니다.”

루카스가 하나 남은 가족인 시온이 염려스러운 것처럼 시온 또한 루카스가 걱정되었다.

당신을 위해 크루커스를 쓰다가 쓰러진 것부터 친딸인 시에나가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든 것까지,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민되는 것들이 많았던 탓이다.

아직 몸이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는데 괜한 말을 해서 충격만 더해지는 게 아닌지 염려되었다.

하지만 당장 신문만 보아도 엉망이 된 집안과 신전과 척을 지며 백작가가 어떤 위기를 맞게 되었는지 알 수 있어서 마냥 입을 다물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셀레나와 아버지에 대해 묻지 않으시는군요.”

“형님도 그 아이도 여태 나타나지 않은 걸 보니 변고가 생긴 거겠지. 내 탓이다. 그날 내가 그렇게 흥분하지 않았다면 셀레나를 무사히 데려올 수 있었을 터인데…….”

“셀레나는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게 정말이냐?”

루카스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시온은 가슴이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충격으로 기억을 잃긴 했지만 집으로 무사히 돌아와 잘 자랐습니다. 아주 예쁘고 착하게 말이죠.”

“그렇다면 셀레나는 지금 어디 있는 거냐? 아, 나이가 있으니 황태자와 혼인해서 황궁에 있겠구나. 어서 몸을 회복해 황궁에 셀레나를 만나러 가야겠다. 형님도 안 계신데 나라도 그 아이에게 아버지가 되어 줘야지.”

“아버지께서도 살아계십니다. …옆 방에… 의식을 잃은 채 누워 계십니다.”

“그, 그게 무슨…….”

질끈 감은 시온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행복했던 제 가족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작은아버지. 마음 단단히 먹으십시오. 지금부터 드리는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시온은 그간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얘기했다.

어느 날 진짜가 나타났 것, 셀레나가 제 아버지에 의해 이단으로 몰려 심문소에 떨어진 것, 그의 아버지가 어쩌다가 의식 없이 누워 있게 되었는지. 그리고 가짜가 크루커스를 훔쳐 달아나서 백작가는 신전과 척을 지게 된 지금의 상황…….

단 하나, 가짜의 정체가 시에나인 건 드러나지 않도록 했다.

사생아지만 딸아이인 시에나가 집안에 접근해 상황을 이렇게 만든 걸 알면 충격을 받을 거라 생각해서다.

긴 설명이 끝나자 루카스는 한 번에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에 경악했다.

그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이불을 꽉 붙들었다.

“형님부터 뵈어야겠다.”

“조금 더 회복하신 뒤에-.”

“나 때문에 형님이 그리되었는데 내가 어떻게 편히 쉰단 거냐.”

루카스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 옆 방으로 넘어갔다.

그곳엔 전대 에스타리온 백작이 잠든 듯 누워 있었다.

루카스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제 형의 상태에 책임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꼈다.

“그대로 죽게 뒀으면 될 텐데 내가 뭐라고 이 지경이 되도록 크루커스를 쓴 건지…….”

“작은아버지께서 이렇게 깨어나신 걸 알면 몹시 기뻐하실 겁니다.”

루카스는 한참 동안 쓰러진 제 형을 바라보았다.

이 모든 사태는 셀레나의 납치와 가짜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건 아마…….

“셀레나는 잘 지내는 것이냐?”

“예. 건강히 잘 지내더군요. 이곳에 있을 때보다 훨씬 행복해 보였습니다. 생기도 있어 보였고… 참, 사업도 시작했습니다.”

“사업을?”

“예. 진통제와 마취제란 약물을 판매합니다. 몇 달 만에 수도를 완전히 장악할 만큼 대단한 회사입니다. 매일 신문에 오르내릴 만큼 장안의 화제라 기사 스크랩북이 벌써 다 찼을 정도죠. 그 아이가 그리 똑똑한 줄 알았다면 진작 지원해 줄걸… 가족이면서 몰랐던 게 너무도 많았더군요.”

“잘 지낸다니 다행이다. 조만간 셀레나를 보러 가야겠구나.”

“셀레나가 알면 무척 기뻐할 겁니다.”

셀레나의 성공을 제 일처럼 기뻐하며 자랑한 시온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루카스는 가슴이 착잡해지는 걸 느꼈다.

“그래. 그리고 알고 싶은 게 하나 더 있다.”

“무엇입니까?”

“가짜의 이름이 무엇이냐.”

시온은 루카스가 무언가를 직감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셀레나와 시에나는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고 루카스는 예전부터 제 사생아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거다.

집안을 어지럽힌 게 제 딸이라는 걸 알면 작은아버지는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까.

시온은 루카스와 적대할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다진 채 대답했다.

“시에나입니다. 작은아버지의 사생아죠.”

“…….”

“신전에서 성녀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만나 보시렵니까?”

“됐다. 만나고 싶지 않다. 그런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 순간, 그 애와 내 인연은 끝이 난 게지. 시온. 네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다.”

“무엇입니까?”

“그렇게 쓰러진 게 내 마지막 기억이 아니다. 중간에 정신이 들었을 때 납치범과 함께 누군가 나를 옮기고 있더구나. 그들은 살려 달라 비는 나를 버려둔 채 도망갔지.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똑똑히 기억한다. 내게는 바로 며칠 전의 일이니까.”

“말씀해 주시면 그들을 찾겠습니다. 마침 셀레나의 납치 사건을 조사하는 중입니다.”

“손등에 나비 문신이 있더군. 나비는 신이 보낸 인도자를 뜻하지. 아마 신전의 사람일 거다.”

“그놈을 찾다 보면 납치를 지시한 범인에게 다다르겠군요.”

에이든이 가진 증거 이외에 또 다른 단서가 나왔다. 시온은 들끓는 복수심을 꾹꾹 눌렀다.

범인이 누구든 그는 모든 걸 내던져서라도 가장 깊은 어둠에 밀어넣을 생각이었다. 그자만 아니었다면 지금의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