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어깨 옷자락이 축축하게 젖어갔다. 커다란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에이든은 노예 시절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그는 그 시절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무수한 고통이 따랐을 것이다.
왜 하필 에이든인 걸까. 하고많은 사람 중 에이든이 노예여야만 했을까.
소리 없이 우는 에이든을 안아 달래며 그에게 내 슬픔이 전해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이 방법이 맞는지 모르겠어.”
그가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노예들을 사면 그것대로 노예 제도에 기여하는 꼴이 되잖아. 매번 노예들을 사서 풀어 줄 수도 없고… 근데, 제발 한 번쯤은 참아 넘기고 싶어도 그게 안 돼.”
“어떻게 참아. 내가 이렇게 속상한데 네가 어떻게…….”
“글을 배우고 책을 읽고 매일 신문을 확인해도 어떻게 해야 세상이 바뀌는지 모르겠어. 나는… 너무 후져. 여기까지 올라와도 아무것도 못 해. 네 옆에 있는 것도, 사람 행세하는 것도 다…….”
후지다는 단어가 가슴을 후벼팠다. 후진 건 세상이지 에이든이 아닌데 왜 이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해야 할까.
숨이 막히도록 속상했다. 에이든은 정말 잘하고 있다. 뭐든 성실하게 익혔고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런 말 하지 마. 네가 왜 후져.”
에이든이 내 허리를 휘감았다. 그가 내뱉는 뜨거운 숨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떼려고 하자 그가 힘주어 나를 붙들었다.
“공작이 되면 뭐 해. 여전히 마음이 노예 상태에 머물러 있는데.”
그는 그런 자신이 부끄러운 듯 한참 동안, 아주 한참 동안 나를 붙잡고 흐느꼈다.
* * *
신성 시대가 저물고 과학이 태동하는 때다 보니 신전을 향한 굳건한 믿음은 쉽사리 흔들리기 마련이었다.
더군다나 신전의 측근이나 마찬가지인 에스타리온 백작가에서 폭로를 시작한데다 황실까지 합세하자 여론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무엇보다 성녀인 시에나가 벌써 몇 주째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처음엔 몸이 안 좋겠거니 하다가도 그녀가 몸을 숨기고 나자마자 황실에서 고소, 고발이 이루어지자 미리 알고 도망갔다는 소문이 도는 중이었다.
“에스타리온 백작가에서 크루커스를 가지고 우리에게 장난을 친 겝니다! 어떻게 크루커스를 의심한답니까? 성녀가 가지고 온 건 가짜이고 진짜는 백작가 지하에 숨겨져 있겠죠!”
“만에 하나 크루커스가 가짜면요?”
“크루커스가 가짜일 리가 있습니까? 그렇게 되면 우리 모두 끝나는 겁니다!”
“황실에서 저렇게 강경하게 나온 데엔 그만한 패가 있어서겠죠. 성녀를 백 프로 신뢰할 수 없다는 거 다들 잘 아실 겁니다. 갑자기 아프다며 힘을 쓰지 못하는 것부터 수상쩍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죠.”
자리에 참석한 신관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관은 다른 사제들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 상황에 대비해 일 안, 이 안, 삼 안까지 마련해 놔야만 합니다. 아시다시피 한 달 뒤, 재판이 열릴 예정입니다. 그러니 우린 그 이전에 신도들의 혼란을 잠재우고 믿음을 결집시켜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다가오는 여름, 성기사의 날을 맞이해 공개적으로 신전 예식을 거행합시다.”
이제껏 신전은 성기사의 날의 축하 예식을 사제들만 모여서 비공개로 진행해 왔다.
성기사가 사라지다시피 한 존재기 때문이다.
“백성들도 귀족들도 와서 참석할 수 있도록 합시다. 그리고 예식이 끝나면 함께 성기사들이 먹었던 마른 빵을 나눠 먹는 겁니다.”
“대신관님의 말씀에 찬성하는 바입니다. 마른 빵을 나눠 먹는 의식은 오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꼭 이뤄지던 일이었으니 이번에 다시 부활시키면 의미가 크겠지요. 수도의 귀족들 위주로 초청장을 보내야겠군요.”
“그리고 재판 말입니다. 재판 이전에 자체적으로 크루커스를 조사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시에나가 크루커스를 가지고 신전에 왔을 때 신전은 크루커스에 대해 간단한 조사를 마쳤었다.
그때 신관들은 크루커스가 다른 성물들과 다른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크루커스가 가짜라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모르니 조심하자는 거지요. 성기사는 아니지만 크루커스가 가짜인지 정도는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셀레나 에스타리온. 아니, 이젠 셀레나 레이온이로군요. 그 여인은 성기사의 자질을 갖췄습니다. 성기사들이 쓰던 나침반을 가지고 있기도 하거니와 신전에 남은 옛 성기사들의 유물을 사용하면 최소한 크루커스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정도는 알 수 있겠죠.”
“대신관님께선 크루커스를 조사한 신관들을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지금이야 성기사들이 사라져서 우리가 하지만… 그 옛날부터 진정한 이단 분별은 성기사들의 몫이였던 걸 아실 겁니다. 셀레나 레이온이 성기사는 아니지만 교차 검증을 하기 좋은 인물이긴 하지요. 무엇보다 그녀는 성녀와 사이가 좋지 않은 걸로 유명하잖습니까?”
대신관은 실내에서 바람이 분 것 같은 느낌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문도, 문도 닫혀 있는데 어디서 바람이 분 걸까.
“셀레나 레이온이 크루커스가 진짜임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그녀가 미워하는 성녀님와 우리에게 힘이 더해질 겁니다. 알다시피 그녀는 에스타리온 백작가와 완벽히 적대 중이니까요.”
이런 때에 신성력을 갖춘 여인의 등장이라니. 꼭 성녀 전설이 떠오르지 않는가.
대신관은 차라리 셀레나가 성녀였다면 상황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회의를 마무리했다.
* * *
“사장님. 손님이 오셨어요.”
“손님이요? 오늘 약속된 분은 안 계신 걸로 아는데.”
“그게 음… 성녀님이라고 하시는데 확인되지 않아서 그 부분은 잘 모르겠고, 사장님과 무척 닮으셨더라구요.”
상대가 시에나인 건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내게 찾아온 이유라면 뻔하다. 그녀를 내쫓을까, 안으로 들일까 고민하다가 어떻게 나오는지 구경이나 해 보잔 심산으로 직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이 나가자 다시 문이 열리더니 시에나가 나타났다.
급하게 나왔던지 그녀에게선 옅은 땀 냄새가 났다.
“건강해 보이네. 어쩐 일이니?”
시에나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푹 숙이고 있기만 했다.
“부, 부탁할 게 있어서 왔어.”
“무슨 부탁?”
“그게…….”
나는 시에나가 말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녀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시 입을 다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나를 훔쳐보는 걸 지켜보았다.
“무슨 부탁이냐고 물었어.”
“바, 방금 대신관이 사제들을 모아 놓고 회의하는 걸 듣고 왔어. 네게 크루커스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별하는 걸 시키겠다고 해.”
아. 이건 예상치 못했는데.
“크루커스가… 저, 정말로 성물이 아닌 거야? 정말로, 마법 물품이나 뭐 그런 거였어?”
“그렇다고 믿어서 여태 몸이 아프다며 두문불출한 거 아니었어?”
“…….”
“자꾸 이런 식으로 시간만 허비할 거면 이만 나가. 너와 달리 난 아주 바쁜 사람이야.”
내 말에 시에나가 숨을 삼켰다. 그녀가 울먹울먹한 얼굴로 내게 다가와 내 손목을 붙잡았다. 시에나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녀에게서 손을 빼냈다. 맞닿은 살이 불쾌하다 못해 혐오스러울 지경이다.
“세, 셀레나. 미안해…….”
“하.”
어처구니가 없어서 고개를 돌리자 책상 한쪽에 놓인 거울에 내 얼굴이 비쳐 보였다.
나조차 놀랄 정도로 차가운 눈을 하고 있었다. 무시무시하게 굳은 얼굴은 또 어떻고.
“어, 어, 어떻게 하면 나, 나를… 용서해 줄래?”
“용서? 겁에 질려서 하는 사과가 진짜 사과일까?”
“아냐. 네겐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어. 내가 너무 과했다고… 사람이라면 그래선 안 되는데…….”
두려울 테다. 크루커스 때문에 죽는 것도, 신전에서 이단으로 몰려 이단심문소에 처박히는 것도… 모두 두렵겠지. 하지만 가장 겁이 나는 건 신전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걸 테다.
벌벌 떠는 시에나의 모습은 어딘가 병적인 구석이 있었다.
하얗다 못해 퍼렇게 질린 얼굴 하며 덜덜 떠는 몸, 겁에 질린 눈빛.
고작 이 정도로 겁먹을 거면서 제 인생을 우롱했다니.
다시 내 손을 잡으려는 셀레나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쳐냈다. 그러자 시에나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크루커스의 비밀이 밝혀지면 난 정말 죽은 목숨이야. 셀레나. 제발 한 번만 도와줘. 응? 이렇게 부탁할게.”
“그걸 왜 나한테 도와 달라고 하니. 잘난 네 오라비한테 가서 부탁해.”
“셀레나, 제발… 제발 이렇게 부탁해. 내가 다 미안해. 한 번만이야. 딱 한 번만. 우, 우린 그래도 피가 이어진 사촌이잖아. 아버지를 봐서라도 날 도와주면 안 될까?”
시에나가 두 손을 비비며 빌기 시작했다.
처절할 정도로 구차한 모습이었지만 내 마음은 냉담하게 얼어버려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정도는 각오하고 사기 친 거 아니었어? 네가 책임질 일이지 내 알 바 아냐.”
“안 돼. 신전에선 날 죽일 거야.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란 말이야. 흐으윽.”
“그럼 그대로 밑바닥까지 떨어져. 나한테 이러지 말고.”
내 말에 시에나가 숨을 삼키더니 한순간 비명처럼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너, 넌! 신전이 얼마나 잔인한 곳인지 넌 모르지? 난 알아! 난… 신전은 절대 자비로운 곳이 아냐. 자기들 이권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단 말이야!”
“잘 알면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되는 거였어.”
“넌 신전이 어떤지 몰라. 이단심문소? 그 이상도 할 수 있는 놈들이란 말야. 그놈들이라면 날 노예로 만들어서 평생 죽느니 못 한 삶을 살게 만들 거야. 그러니 제발, 이렇게 부탁해. 날 신전에서 꺼내 주기만 하면 무슨 짓이든 할게. 응? 난 시, 신전이 무섭단 말이야. 걔들은 오죽하면 너, 너, 너를 납치까지 했겠어.”
“…뭐라고?”
지금 시에나가 무슨 말을 한 거지? 머리가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나도 모르게 한껏 낮아진 음성에 시에나는 눈을 질끈 감고 고백했다.
“네가 도망치고 난 뒤 신전에서 사람이 왔어서 알아. 널 납치한 건 신전이었어. 그들이 사주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