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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94화 (95/134)

<94>

크루커스가 성물이 아니란 사실을 신전 측에 전달해 봐야 조용히 묻히거나 황실과 협상을 시도하려고 할 게 뻔했다.

그래서 황태자가 선택한 건 황실의 이름으로 시에나를 고소, 고발했다.

죄명은 사기죄였다. 거짓 성물인 크루커스를 두고 성녀 행세를 해서 사회를 혼란에 빠트리려 했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고소장은 곧장 신전에 날아갔고 그 과정에 소문이 새어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언론도, 대중들도. 모두가 성녀의 진실 공방을 두고 입방아를 찧었다.

“신전은 크루커스가 마법 물품이란 소문은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했다. 에스타리온 백작가는 대대로 성물인 크루커스를 수호하기 위해 힘써 왔으며 성녀 시에나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에스타리온 백작가 출신이다. 그러니 황실이 크루커스를 문제 삼은 건 백작가에 등을 돌리는 행위와도 같다고 볼 수 있다.”

“…….”

“하지만 근래 들어서 에스타리온 백작의 행보가 심상찮다. 그는 신전의 비리를 고발하며 이제껏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던 신전을 적대하기 시작했고…….”

두 눈을 감고 에이든이 읽어 주는 기사를 들었다.

울림 좋은 목소리가 차분하게 현 상황과 대중의 반응에 대해 읊어 주었다.

“생각보다 반응이 심상찮네.”

“다른 것도 아니고 성녀에 관한 일이니까. 백 년 만에 탄생한 성녀였잖아. 신전도 시에나를 두고 크게 써먹었고.”

“황실에선 크루커스의 진실을 밝히는 회의를 개최하자고 하지만 신전이 거절해. 아무래도 회의를 하는 자체가 크루커스에 의문이 있음을 인정하는 행위가 되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건가. 하여간 병, 아니… 등신들이라니까.”

“그런 것도 있겠지. 내 생각엔 신전이 크루커스에 대해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아. 시에나의 정체를 알고도 덮었으니 그녀가 가져온 물품을 신뢰할 수 없겠지.”

그러니 여차하면 신전은 피해자이며 모두 시에나가 꾸며서 만든 사기극이라고 몰아갈 수도 있다.

진짜 크루커스는 시에나가 다른데다 처리했고 이단에 빠진 시에나가 세상을 어지럽히기 위해 사특한 물건으로 이러한 소동을 일으킨 것이라고.

“그 새끼들, 아니, 신전은 그렇게 빠져나가면 안 돼.”

내 추측을 들은 에이든이 고개를 내저었다.

“왜?”

에이든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엉뚱한 대답을 했다.

“그나저나 오늘 출근도 안 하는데 집에만 있을 거야? 나도, 너도 함께 쉬는 날은 흔치 않은데 나가자.”

자리에서 일어난 에이든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주말에 푹 쉬는 건 오랜만이라 집에 있고 싶었지만 그가 내민 손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정확하게는 기대에 찬 눈빛일 테다.

내가 그에게 손을 얹기가 무섭게 강한 힘이 단번에 나를 잡아 일으켰다.

에이든은 들뜬 얼굴로 먼저 마차로 갔고 나는 옷을 갈아입고 뒤따랐다.

“존 콕스가 좋은 식당을 많이 알더라고. 수도 토박이라더니 맛집에 대해선 모르는 게 없어.”

“좋은 곳을 추천받았나 봐?”

“기대해도 좋아.”

“참. 성배를 찾는 일은 잘되고 있어?”

“간신히 까막눈만 면한 수준이라 존 콕스가 이 근방을 뒤져야 합니다 하면 나서서 수색하는 정도야. 그래서 잘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그러는 넌? 회사 일이 보통 많은 게 아니라던데 몸은 챙기면서 하고 있는 거 맞아?”

우리 사이를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할까.

친구라고 하기엔 서로를 이성으로 느꼈고 연인이라기엔 은근한 선을 그어두는 중이다.

말하자면, 친구 이상, 연애 이하의 간질간질한 관계에 놓여 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많이 부드러워졌어.’

이단심문소를 나와 빗속에서 내게 말을 걸었을 때만 해도 딱딱하고 무서운 인상이었는데 그건 다 긴장해서 그런 게 분명하다.

지금의 에이든은 곧잘 환한 미소를 보여 주고 다정하게 말을 붙이는 남자였다.

물론 여전히 험해서 열 마디에 한 번씩 문장을 고치곤 하지만… 내게서 좋은 모습만 보이려는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전해졌다.

“셀레나?”

“아, 으응. 다 왔네. 내리자.”

에이든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는 나를 외진 골목으로 데리고 갔다.

골목에서 골목으로, 그렇게 깊은 곳까지 가자 소박한 식당 하나가 나왔다.

언뜻 보면 가정집같이 보일 정도로 평범한 분위기였지만 식당 가득 든 햇빛이나 내부에 가득 들어찬 포근한 기운이 좋은 인상을 주었다.

“존 콕스, 그 자식. 이곳이 최고 중의 최고라며 말을 안 하려 하길래 어깨 안마 좀 해 주고 알아 왔지.”

적당한 것으로 음식을 시키고 나자 창밖 골목이 눈에 들어왔다.

식당 맞은편엔 물류창고가 위치해서 장정들이 짐마차에서 나무 상자를 옮기는 중이었다.

“노예네.”

“응?”

“저놈들. 노예라고.”

“그걸 어떻게 알아?”

“발목에 쇠고랑을 찼잖아.”

장정들의 발목을 보니, 신발 위 옷자락 사이로 쇠고랑이 보였다.

쇠고랑이 다른 데에 연결된 건 아니지만 발목에 무언가를 차는 건 자유민이라면 해당되지 않는 일이다.

“뒤에서 담배 피는 저 자식들은 관리자야. 저런 놈들이 제일 악질이지. 뭐라도 되는 양 굴어서 툭하면 침이나 뱉고 욕짓거리에…….”

에이든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곤 물을 따라 마셨다.

마침 애피타이저가 나와 그는 열심히 음식에 집중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노예들을 부리는 건 노동을 해서 돈을 버는 계층이나 아득바득 영지를 운영하는 귀족들이다. 상류 귀족사회에선 절대 집에 노예를 들이지 않는다. 그게 불문율이다.

그렇기에 저 노예들은 에이든을 제외한다면 내가 보는 첫 노예였다. 그런데도 그들을 보고 있자 자꾸 마음이 불편해졌다.

‘에이든도 저렇게 고생했을까.’

국경에서 노예살이를 했으니 더 고되고 고통스러웠겠지. 그렇게 기억을 잃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에이든은 나와 함께 자랐어야 했다.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아는데 그거 다 괜한 생각이야.”

에이든이 손가락 끝으로 내 손등을 톡톡 두들기며 주의를 끌었다.

“그거 다 무의미한 바람이고 가정이라고. 너 없이도 난 잘 컸고 이렇게 성공했잖아.”

“하지만-.”

“하지만은 없어. 네가 살아 도망친 순간, 난 노예가 아니었어. 내 사람을 지켜 낸 기사였지.”

“…….”

내게 그가 구원이었듯 에이든에게도 내가 구원이었다. 그러니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마냥 고맙고 미안해서, 나는 에이든을 보며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야이 자식아! 똑바로 일 안 해? 빨리빨리 하란 말이야!”

메인 요리가 나온 순간, 험악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관리자가 채찍을 꺼낸 게 보였다.

설마 저 채찍을 휘두를까. 그냥 겁을 주려는 걸 거야.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관리자가 채찍으로 노예 한 명을 때리기 시작했다.

나는 헙하고 숨을 삼켰다. 에이든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창문을 닫곤 창문에 달린 커튼을 쳤다.

“젠장. 존 콕스 개자식, 돌아가면 뒤질 줄 알아.”

스테이크를 자른 에이든이 나와 접시를 바꿨다.

내가 손을 떨며 다시 커튼을 열려고 하자 그가 나를 만류했다.

“보지 마. 봐서 좋을 거 없어.”

“저대로 두면 안 되잖아.”

“그렇다고 일일이 나설 수도 없는 일이야.”

부글부글 끓는 속을 꾹 눌러 참는지 에이든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구겨진 미간과 근육이 도드라진 턱만 보아도 지금 그가 어떤 심정인지 알 수 있었다.

휙! 찰싹!

“아악!”

비명 소리가 들렸다. 에이든이 나이프를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나는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저대로 두면 안 될 텐데… 말려야 하지 않을까.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커다란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았다.

“에, 에이든. 네가 안 나서면-.”

“젠장!”

참다 못한 에이든이 벌떡 일어나서 식당 밖으로 뛰쳐나갔다.

사실 누구보다 이 상황에 화가 날 사람은 에이든이었다. 나는 얼른 그를 쫓았다.

나는 에이든이 채찍을 빼앗든지 관리자의 멱살이라도 잡아 분노를 터트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내 예상과 달리 분노를 삼킨 채 담담히 말을 걸었다.

“이봐. 채찍질은 그만하고 잠시 나 좀 보지.”

“누구십니까? 가던 길이나 가시죠.”

“보아하니 노예 놈 같은데 내가 사고 싶어서 그래.”

“예?”

“알다시피 요즘 노예 상인들이 죄 남부로 내려가서 수도에선 노예 구하기가 제법 힘들단 말이지. 저놈도, 저놈도. 아니, 여기 있는 놈들 다 내가 사지.”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그럼 우린 일을 어떻게 하라고-.”

“금화 30개. 이만하면 되나?”

금화 30개면 노예들을 팔고 사람을 고용해 일을 처리하고도 많은 액수가 남을 돈이다.

뒤에 있던 노예들도 어안이벙벙한 얼굴로 눈길을 교환했다.

나는 그들의 등에 피가 번진 걸 확인했다. 속이 상해서 볼 안을 꾹 깨물어 감정을 삼켰다.

에이든은 금화가 잔뜩 든 주머니를 보여 주었다. 관리자의 눈이 번뜩거렸다.

“조, 좋습니다.”

“좋아. 그럼 저 발목의 쇠고랑부터 풀어.”

관리자는 열쇠를 꺼내서 딴말 없이 쇠고랑을 풀어 주었다.

에이든은 그에게 금화 주머니를 던져주곤 노예였던 자들에게 말했다.

“이제 자유니 알아서들 살길 찾아 가. 땀 흘려 일해서 돈도 벌고 먹고 싶은 것도 먹고, 자유가 뭔지 알아가도록 해.”

그들은 하나 같이 주춤거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에이든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주먹 쥔 손을 잘게 떠는 걸 볼 수 있었다.

“나는 에이든 칼립소다. 자유민으로 살다가 먹고 살길이 요원해서 일자리가 필요하면 나를 찾아오도록 해.”

에이든이 제 이름을 내걸자 다들 슬금슬금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나는 울 듯한 에이든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는 도망치는 이들의 뒷모습을, 감히 내가 짐작할 수 없는 감정이 가득한 얼굴로 응시했다.

노예였던 이들이 자유민이 되어 도망치는 모습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절대 울지 않을 것 같았는데 에이든의 눈가가 촉촉했다.

울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꾹 닫은 채 턱에 힘을 꽉 준 게 안쓰러웠다.

내가 귀족으로 태어난 게 운이 좋아서이듯 에이든이 노예로 태어났던 건 운이 없어서다. 그건 그가 바라지도 않았고 그의 탓도 아니었다.

불공평한 세상에서 밑바닥부터 올라온 그가 자랑스럽지만 다른 이들은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은 것 같아 마냥 안쓰럽기도 하다.

“에이든…….”

에이든에게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그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거친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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