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시온은 에이든이 떠난 뒤에도 내 주변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내가 다가오지도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못한 채 바보처럼 말이다.
“좋아 보이네.”
“문제 있나요?”
내 물음에 시온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칼립소 공작과 함께해서 행복하니?”
“당신에게 에이든과 날 반대하거나 허락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황태자도 시온도 모두 지긋지긋하다.
내게 그런 행동을 해놓고 뭐라도 되는 양 행동하는 걸 지켜보자면 기가 차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에이든이 바닥에 깔아 준 옷을 탈탈 털어 챙겼다.
시온의 시선이 어지럽게 나를 쫓았다. 그가 다급하게 해명했다.
“그냥 네가 행복하길 바라서 물은 거였어. 공작과 함께 할 때의 네 얼굴이 예전엔 못 보던 얼굴이라서…….”
“가족이 주지 못한 안정감을 에이든이 줘서 그런가 보죠.”
“아…….”
시온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가 주먹을 꽉 쥔 채 손을 덜덜 떠는 게 보였다.
내가 자리를 피하려고 그를 지나치던 순간이었다.
시온이 내 앞을 가로막더니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셀레나. 용서는 바라지 않는다. 그저 가끔…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라도 섞으면 좋겠다.”
“무리한 바람인 거, 스스로도 아실 텐데요. 에스타리온 백작님.”
“…그래. 감히 어떻게 바라겠어. 그렇다면 위험한 일에서라도 한 발자국 떨어져 있는 건 어떠냐. 복수도 시에나도 모두 내가 할 테니까.”
“허튼소리 마요. 그거야말로 내 몫이지, 당신 몫은 아니잖아요?”
시온은 내가 한 경고보다 자신이 ‘당신’이라고 불린 게 더 충격인지 얼이 빠져 중얼거렸다.
“…당신…….”
시온의 얼굴이 일그러지든 말든 나는 그를 지나쳤다. 시온이 떠나가는 내 손목을 붙잡았다.
“내가 어떻게 해야 네 마음이 풀릴까?”
“그런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셀레나, 제발…….”
흐느끼는 음성에 가슴이 시근덕거렸다.
가장 억울한 건 나인데 가해자가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하는 게 열 받았다.
“시에나가 당신에게, ‘어떻게 해야 당신 마음이 풀릴까요?’하고 물으면 뭐라고 답하실 건가요?”
“그건…….”
퍼렇게 질리는 안색을 보니 지금 내가 어떤 심정인지 확실히 와닿는 모양이다. 나를 붙든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이제 와 후회한들 뭐가 달라진다고. 부모의 연, 형제의 연을 먼저 끊은 건 저쪽이다.
나는 인내할 만큼 했었고 당해 줄 만큼 당해 줬다.
시온을 외면한 채 자리를 옮기자 볼일을 끝내고 나를 찾던 에이든이 보였다.
그가 세심한 눈길로 나를 살폈다. 눈치 보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에이든이 입술을 달싹였다.
“기분, 괜찮아?”
“괜찮아.”
“…그렇다면 지금 말할게. 상황 봐가며 이야기하느라 타이밍을 놓칠 것 같거든.”
“뭔데 그래?”
“황태자가 내게 부탁했어. 네가 계약 파기를 철회하게 해 달라고.”
“그런 이야기라면 듣기 싫어.”
“아니, 들어. 난 네가 당분간은 황태자와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해.”
“언제는 내가 황태자와 계약하는 게 싫다며.”
“맞아. 싫어. 하지만 그건 감정의 영역이야. 아직은 레이온 제약을 위해서라도 황태자와 함께하는 게 좋아.”
주변을 살펴서 이곳에 우리밖에 없단 걸 확인했다.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목소리를 낮춰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존 콕스가 준 나침반과 내게 신성력이 발견된 것까지.
“더 이상 황태자와 함께할 이유가 없어.”
하지만 내 말에도 에이든은 걱정스런 얼굴을 지우지 못했다. 그가 진지한 어투로 설득했다.
“개인과 집단은 달라. 아무리 레이온 제약이 커졌다고 한들 아직은 시기상조야.”
“에이든, 제발.”
“신전과 다투기 시작하면 신전 측에선 네가 이단심문소에 다녀온 걸로 물고 늘어지겠지. 네가 무죄인 건 알지만 그곳에 들어간 경험이 있는 이상 네 치부가 될 게 뻔해. 그러니 황태자를 보조하면서 네가 원하는 걸 얻어내는 게 맞아.”
“이단심문소에 두 번 들어가진 않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곳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손이 떨려 왔다.
에이든이 내 손을 붙잡아 손깍지를 껴 안심시켜 주었다.
“그날 네게 심통 내는 게 아니었어. 네가 위험한 일을 계획하는 만큼 더 이성적으로 접근해야만 했어.”
“…….”
“그땐 내게 아무런 힘이 없어서 널 빼앗길까 봐 겁이 났던 거야. 네가 황태자와 협력하는 게 잘못됐다는 의미는 아니었어.”
에이든이 그렇게 말하니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마따나 황태자와 손을 잡는 게 맞다. 그래서 황태자와 손을 잡을 때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며 담담하게 굴었다.
하지만 막상 내게 나침반이니 신성력이니 하는 것들이 생기자 제일 먼저 황태자와 거리를 벌리고 싶었다.
황태자를 신뢰할 수 없을뿐더러 그를 무너트리고 싶지 협력하고 싶은 건 아니라서다.
“네게 큰 무기가 생긴 건 알아. 하지만 신전은 그렇게 가볍게 볼 존재가 아냐.”
“…알았어. 그렇게 할게.”
“고마워. 어려운 선택일 텐데.”
여름의 초입인데도 한기가 느껴졌다. 나는 몸을 잘게 떨다가 에이든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바란 건 복수인데… 나를 난도질한 이들에게 상처를 돌려주고 싶은데 가끔 왜 이리도 어깨가 서늘해지는지 모르겠다.
가슴이 시릴 땐 내가 잘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그럼에도 내가 할 건 정해져 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과거에 잡아 먹힌다.
그 순간 느꼈던 분노와 설움에 삼켜져 어찌 할 바를 몰라 짐승처럼 울게 될 테다.
그러니 나는 시에나에게, 에스타리온 백작가와 황태자에게 그대로 돌려주어야만 한다.
복수 뒤의 허무 같은 건 이후의 내가 감당하겠지.
에이든이 주는 온기가 폭풍 치는 바다에서 보는 등대 불빛 같아, 간절히 그 품에 매달렸다.
* * *
황실 국립 병원에 약품과 거액의 돈을 기부했던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레이온 제약이 지속적인 사회 환원을 약속하자 신문에선 그 사실을 앞다투어 다뤘다.
기자에게 기부 사실을 알릴 필요도 없었다. 기대 이상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기 때문이다.
‘지속적 사회 환원’이란 개념이 도입되며 레이온 제약은 국민과 함께 하는 회사, 우리 사회와 상생하려는 진심 어린 기업이란 이미지를 얻으며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성녀의 건강이상설.]
신문을 확인하자 레이온 제약의 상승세와 대조되게 신전 측에선 더 이상 성수를 만들지 못하고 있단 기사가 보였다.
성녀가 크게 아프기 시작해서 벌써 일주일째 두문불출 중이라고 한다.
‘그래. 시에나. 이대로 버텨. 이단심문소에 건강한 몸으로 들어가야지.’
황태자와 다시 협력하기로 하자 황실에선 레이온 제약이 황실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공표하길 바랐다.
그래서 나는 황실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황실 군대에 약물을 무상으로 공급했고 이 사실을 기사화했다.
황제의 동생인 디아즈 대공이 레이온 제약의 약물을 사용했고, 우린 우리대로 황실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신전과 제대로 된 대립 구도가 만들어졌다.
“그럼 이제 황태자 차례인가.”
검술 대회가 끝난 지 사흘이나 됐으니 슬슬 황태자가 움직일 거다.
지금쯤이면 고서 해석도 끝이 나서 크루커스가 성물이 아니란 걸 뒷받침할 자료도 충분할 테니 때가 머지않았다.
물론 신전은 자료를 믿을 수 없다며 반발할 게 뻔하다.
그러니 지금부터 나는 내가 나설 타이밍만 재면 된다.
나침반도 신성력도 모두 공표 받았으니 내가 직접 크루커스가 거짓이란 걸 증명하면 신전도 꼼짝하지 못할 테다.
결국 이 모든 건 시간 싸움이다.
“좋아. 그럼 이제 일이나 하자.”
뒤늦게 레이온 제약이 내 것임을 안 사교계 인사들이 티 파티며 낭독회며 많은 초대장을 보냈지만 모두 거절했다.
지금은 상류사회와 친분을 쌓기보다는 기업의 내실을 다질 때여서다.
마침 진통제와 마취제 이후 다른 약물 개발에 힘쓰고 있어서 신입사원이 한가득임에도 할 일이 가득했다.
나는 헤레이스에게서 온 실험보고서를 펼쳤다.
* * *
대낮임에도 시온은 술에 취해 있었다.
아버지인 에스타리온 백작은 의식 없이 누워 있고 하나뿐인 누이는 영원히 척을 지게 되었다.
집안을 물려받아 부와 명예를 거머쥐게 되었지만 그러한 것들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전부나 마찬가지인 가족을 잃었는데 에스타리온 백작가를 거머쥐게 된들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아버지. 지옥 속을 사는 게 우리 벌인가 봅니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채 존재하는 아버지와 혼자가 된 자신.
시온은 술에 취한 채 의식 없이 누워 있는 제 아비의 발치에 엎드려 흐느꼈다.
우스운 건, 의식이 없어서 식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에스타리온 백작은 동생 루카스처럼 주기적으로 크루커스가 만들어 낸 성수를 마셔야만 했다.
그러한 크루커스가 시에나에게 있어서 그는 사람을 시켜서 신전에서 성수를 받아오도록 해야 했다. 이 얼마나 기막힌 일인지…….
“흐으으윽. 으으윽.”
사랑으로 키운 동생인데 거짓에 눈이 가리어 선을 넘어 버렸다.
막말을 내뱉은 제 혀를 끊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버지. 하늘에 맹세코 시에나를 시궁창에 처박아 버릴 겁니다. 그 애에게 용서나 자비는 없을 거예요. 우린 빌어먹을 사기꾼 때문에 셀레나를 잃었습니다. 간교한 속삭임에 넘어가서… 으흐으윽.”
의식이 없는데 제 말을 들을 수나 있을까. 시온은 너무도 원통했다.
가장 슬픈 건 누군가를 원망할 수도 없단 거다.
이 문제는 온전히 그가 잘못해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시에나의 거짓말 때문이기도 하지만, 셀레나를 상처입힌 언행을 한 게 자신임이 달라지진 않는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 때문에 시온이 고통스레 울부짖던 때였다.
밖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하더니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집사가 나타났다.
“백작님. 잠시 와 보셔야 합니다.”
“나가!”
이불에 얼굴을 파묻은 시온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집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얼른 가 보시지요.”
“나가라잖아! 나가!”
“나와 보셔야 합니다! 얼른이요!”
참다 못한 시온이 한 손으론 술병을 든 채 몸을 일으켰다.
술기운에 몸이 휘청거리자 집사가 재빨리 그를 부축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아, 술을 드셨으니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루카스 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뭐?”
시온은 자신이 들은 소식을 믿지 못해 집사에게 되물었다.
집사가 시온의 팔을 힘주어 붙들며 강조했다.
“루카스 님께서, 의식을 찾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