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대기 중인 의료진들이 에이든을 데리고 가서 처치를 했지만 직접 가서 상처를 확인하고 싶었다.
피를 많이 흘린 걸 봐서 크게 다친 것 같은데 괜찮을까. 통증이 심할 텐데…….
내가 초조하게 차가워진 손을 비비자 옆에 앉은 잭슨이 말했다.
“스친 정도로 보였습니다. 그러니 괜찮을 겁니다.”
“스치기만 했는데 저렇기 피를 많이 흘려요?”
“움직임이 격하다 보니 그런 게지요.”
이런 폭력적인 시합이 뭐가 즐겁다고 매년 개최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에이든이 부상을 치료받는 동안 시상식이 준비되었다.
몸이 크게 아파 좀처럼 쾌차하지 않는 황제 폐하께서 직접 행차했다.
황제는 거무죽죽한 안색에 피골이 상접하도록 말랐다.
황태자가 황좌를 물려받을 준비를 하는 게 이해가 갈 정도였다.
황제는 부축을 받아 단상 위로 올라갔고 에이든은 단상 아래에서 황제에게 예를 갖췄다.
“칼립소라… 필립소가 데려온 노예 출신이로군. 그 녀석이 보는 눈이 있는 게지.”
황제는 선연한 시선으로 에이든을 샅샅이 뜯어보았다.
“제국에 충성하거라.”
“예. 폐하.”
“그래, 그래. 검술 대회 우승자인 에이든 칼립소 공작에게 우승상금으로 1000골드와 한 자루의 검을 하사하노라. 그대에게 주는 검으로 충성을 다하고 이 나라를 위해 맞싸우도록 하라.”
황제가 하사품인 검을 꺼내 에이든의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 그렇게 수여식이 끝나는가 했다.
“폐하. 상금은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상에서 내려오던 황제가 눈을 가늘게 뜨곤 에이든에게 물었다.
“정녕 상금이 필요 없더냐?”
“예. 제가 바라는 것은 이 나라의 정의이지 쓰고 나면 사라질 돈이 아닙니다.”
“정의? 무슨 말을 하고픈 게냐?”
“제가 귀족이 되기 전, 노예로 지내던 어린 시절에 몇 개월간 범죄자의 심부름꾼으로 지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그들이 저지르는 범죄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들은 죄 없는 아이를 납치해 저와 그 아이를 한 여인에게 맡겼습니다.”
에이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깨달았다. 저건 내 이야기였다.
갑자기 왜? 무얼 하려는 거지? 손가락 끝을 꼭 붙든 채 에이든의 말에 귀 기울였다.
자리에 있는 관중들도 에이든의 돌발 행동에 관심을 가지고 들었다.
“그 여인은 범죄 공범으로 제 죄가 드러날 위기에 처하자 진실을 아는 목격자를 살해했습니다.”
헙! 주변에서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손바닥에 땀이 찼다.
“저는 목숨을 걸고 그 아이를 도망치게 하였습니다. 이후 저는 다른 지역으로 팔려 갔지만 그때 그 일이 늦게라도 청산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수도에 입성한 뒤, 그 일이 조금도 해결되지 않은 걸 알게 되었지요.”
“설마 그 일이 에스타리온 백작가의 일인가?”
“예. 저는 셀레나 에스타리온 납치 사건의 증인입니다. 제게 당시 범죄의 수사권을 주십시오.”
황제가 침음을 흘렸다. 주변이 웅성거렸다. 나를 알아본 이들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살갗이 따가웠다.
긴장과 놀라움. 그리고 표현할 수 없는 감각이 폐부 깊숙이 쌓였다. 결코 원망은 아니다.
범인을 찾을 수 없었던 무력함이 희망으로 전환되며 생기는 어떤 감정이었다.
“그때 그 일을 다시 수사하고자 하는 이유가 뭔가? 공작은 목격자에 불과하고, 오래전 일이라 증거도 불충분한데 무엇하러 그러는 게지?”
“그건…….”
에이든은 잠시 숨을 들이켜고는 뒤 돌아 이쪽을 확인했다. 그가 나를 보며 알 듯 말 듯한 얼굴을 했다.
우린 범인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다. 이제 와 찾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긁어 부스럼 만들기 싫어서다.
“그녀… 셀레나에게 그 일이 커다란 상처이기 때문입니다.”
“상처?”
“그리고 공범의 딸이 이 나라를 우롱하고 있어서 더더욱 진실을 밝혀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제게 수사권을 주시면 폐하께서 내리신 검으로 정의를 지키겠습니다.”
에이든이 한쪽 무릎을 꿇고 맹세했다. 황제가 황태자와 시선을 교환했다.
황태자는 에이든의 돌발 행동이 조금 당혹스러운 듯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제 당황을 알아차릴 만큼 티를 내진 않았다.
“좋다. 칼립소 공작에게 셀레나 에스타리온 납치 사건의 수사권을 주겠다. 허나 이 일을 공작 홀로 맡는 건 부담이 크니 에스타리온 백작인 시온 에스타리온이 함께 수사하게 될 것이다.”
“폐하의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절대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에이든의 우렁찬 목소리가 경기장을 울렸다. 와아아아! 커다란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노예에서 공작으로. 그리고 과거, 수도를 떠들썩하게 했던 납치 사건의 목격자에서 수사관으로. 그의 모든 게 한 편의 드라마였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 이야기 속에서 나는 손바닥을 치맛자락에 비볐다.
진범을 잡을 수도 있다. 그러한 생각에 희망과 기대가 교차했다.
* * *
대회가 마무리되자마자 정신없이 에이든을 찾아 헤맸다.
관중들은 대회가 끝나고 황궁에서 열리는 작은 연회를 즐기러 떠났고 나와 에이든은 황궁 복도에서 마주쳤다.
“셀레나!”
복도 끝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에이든은 나를 발견하곤 한달음에 달려왔다.
“스승님은?”
“연회에 가셨어. 제자가 우승자라서 황궁에 있는 아는 사람들에게 자랑해야 한대.”
“그래? 고주망태가 되어서 집에 돌아오겠네.”
“상처는 괜찮아? 어디 봐.”
“아. 괜찮아. 걱정 안 해도 돼.”
괜찮다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에이든의 팔을 살폈다.
붕대를 둘둘 감아 뒀지만 여간 걱정되는 게 아니다.
“깊은 상처도 아닌걸. …걱정했어?”
“그럼 안 해? 피가 꽤 많이 흐르던데…….”
“내가 다쳐서 속상해?”
에이든의 새까만 눈이 내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그제야 나는 내가 붙든 에이든의 왼쪽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간 걸 깨달았다.
내 손짓 하나에 이렇게 긴장하면서 오히려 시합 땐 여유로웠던 게 생각났다.
“속상해.”
너무.
마음이 상해서 얼굴이 굳고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에이든은 발개진 얼굴로 흐릿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새까만 눈이 즐겁게 반짝이는 걸 보자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나를 신경 쓸 게 아니라 제 몸부터 돌보면 좋겠는데.
“우승 축하해.”
“와 줘서 고마워. 그리고 미리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
무엇을 말하지 않았냐는 생략되었지만 그게 무얼 뜻하는지 모르진 않았다.
에이든은 나를 인적이 드문 곳으로 데리고 갔다. 복도를 빠져나와 햇빛이 비치자 눈이 부셨다. 그가 내 위로 손을 들어 그늘을 만들어 줬다.
우리는 건물 뒤편의 그늘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겉옷을 벗어서 바닥에 깔아 주었다.
그 위에 나란히 앉자 소풍이라도 온 것 같았다. 마침 여름의 초입이라 날씨가 조금 더워 더 그런 착각이 들었다.
“아.”
에이든이 갑자기 엉덩이를 옮겨 내게서 거리를 벌렸다. 벌레라도 있는 걸까. 바닥을 살핀 내가 의아한 기색을 하자 그가 말했다.
“나 땀 냄새 나.”
“괜찮아.”
“아냐. 좀 떨어져 있는 게 좋은 것 같아.”
“…거의 열흘 만에 보는 건데 거리를 두고 싶단 거지?”
“그, 그건 아냐.”
당황해서 허둥지둥대던 그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대답했다.
“너한테 잘 보이고 싶단 말이야. 내가 뭣도 없는 놈이지만 좋아하는 여자한테 멋진 모습만 보여 주고 싶은 건 어쩔 수 없어.”
“아…….”
여름날에도 서늘한 온도를 유지하는 동굴 같은 목소리와 달리 에이든의 얼굴은 붉게 익어 있었다.
그가 힐끗 나를 훔쳐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찰나 에이든의 손목을 잡아 내게 끌어당겼다.
잘 보이고 싶다며 거리를 벌린 것과 달리 힘을 주자 순순히 딸려왔다.
“내 옆에 있어.”
“어, 어어?”
더 이상은 말 못 하겠다. 얼굴이 터질 듯 뜨거웠다. 담담한 척하려고 했는데 다 티가 날 게 뻔했다.
나도 에이든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우리 둘 다 콩닥콩닥거리는 심장박동을 들으며 옆에 있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러다 바람이 불어 달아오른 열기를 식혀 주었다. 에이든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납치범 케빈이 누군가에게 사주를 받았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어.”
“그게 정말이야?”
“단순 납치가 아니었어. 그래서 수사권을 달라고 했던 거야.”
“처음부터 이러려고 검술 대회에 나온 거지?”
“응. 그냥 부탁해선 무시당할 가능성이 크니까.”
황제가 못 들은 척할 수 없도록 관중들 앞에서 옛이야기를 꺼냈다. 그건 황제를 압박하기 좋은 패였다.
“난 그들을 잡고 싶어.”
에이든이 손끝으로 제 뺨에 난 흉터를 쓸었다.
“네 납치 뒤에 뭐가 있는지 똑똑히 알아야겠어.”
날 선 음성에서 에이든이 나보다 납치 사건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내 불행에 나보다 더 슬퍼하고 내 행복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셀레나 에스타리온일 땐 에이든 같은 존재에 지금처럼 감사하지 못했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난 뒤 에이든 같은 사람이 내 곁에 있는 게 벅차도록 행복한 일이란 걸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이따금 에이든의 존재가 기적 혹은 운명처럼 여겨졌다.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만나 목숨을 걸고 나를 지켜 준 소년은 내게 구원, 그 자체였다.
나는 에이든의 손을 붙잡아 손깍지를 꼈다. 내 돌발 행동에 에이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목덜미가 벌게지도록 쑥스러워하면서도 손에 힘을 주어 내 손을 단단히 감쌌다.
강한 힘이, 굳은살 가득한 손바닥 감촉과 따뜻한 체온이 순간이 꿈도, 환상도 아님을 증명해주었다.
“고마워.”
네게 고맙다는 말 이외에 무얼 더 할 수 있을까.
나를 지켜 주어서, 이제껏 살아남아 주어서, 나를 좋아해 줘서…….
가슴이 벅차오르자 코끝이 시큰해졌다. 손깍지 낀 손을 끌어당겨 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에이든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가 팔을 뚝딱거리는 게 보였다.
또다시 바람이 불었다.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멀리 연회장에서 웃음소리와 음악소리가 들렸다.
맛있는 음식 냄새도 났지만 건물 뒤 그늘 아래에서 우리 둘만 있는 게 더 좋았다.
우리 사이에 내려앉은 평화가 달콤했다. 서로를 향한 감정이 영원하면 좋겠다.
그때 나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시온이 서 있었다. 그가 조금 당황한 얼굴로 우릴 확인했다.
나는 에이든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일어나서 시온에게 인사하려는 에이든을 꼭 붙들어 앉혀놓았다.
“…칼립소 공작. 폐하께서 수사권에 대한 인장을 주신다고 합니다.”
“아. 예. 알겠습니다.”
“다녀와.”
에이든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는 나와 시온을 걱정스레 번갈아 보았다.
“가 봐.”
에이든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꾸물대다가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나와 시온만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