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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며칠째 신문은 에스타리온 백작가의 폭로와 신전의 부패에 관해 다루고 있다.
백작가를 물려받은 시온은 흙탕물 싸움이라도 불사할 생각인 듯했다.
그래서인지 그간 친밀한 관계였던 백작가가 신전에 등을 돌리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추측성 기사가 이어졌는데, 놀라운 건 그중에 시에나에 관한 소문도 포함되었단 거다.
[성녀가 에스타리온 백작가 출신인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가 처음부터 백작가의 아가씨인 건 아니었다.
항간의 소문에 따르면 성녀는 백작가에 의도적으로 접근해서 분란을 일으키고 크루커스를 훔쳐 달아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일 뿐이며…….]
기자가 진실을 알고도 추앙받는 성녀를 건드리는 게 두려워서 방어적으로 기사를 쓴 걸까. 아니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소문을 낸 걸까.
‘뭐가 됐건 검술 대회가 끝나면 사냥이 시작될 테니까.’
신문을 넣어두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잭슨이 초조하게 복도를 빙빙 돌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전 안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요, 잭슨. 결승 시합이에요. 보고 싶지 않아요?”
“너무 떨려서 못 가겠습니다. 아가씨 혼자 가십쇼.”
“잭슨. 에이든도 스승님이 와서 지켜보길 바랄 거예요.”
“아이고, 전 공작님이 정말로 결승까지 갈 줄은 몰랐단 말입니다. 마음의 준비가 안 돼서 도저히 못 가겠습니다.”
에이든과 훈련하며 알게 모르게 정이 많이 쌓였던지 검술 대회가 시작한 뒤 잭슨은 눈에 띄게 초췌해졌다.
품에서 결승 시합 초청장을 꺼내서 잭슨에게 보여 줬다.
“봐요. 두 장이나 왔잖아요. 잭슨도 초대받은 건데 안 가면 어떡해요.”
“하지만…….”
잭슨은 전날 영 잠을 못 잤던지 거뭇거뭇해진 눈매를 비볐다.
“좋습니다. 갑시다. 후우.”
그렇게 나는 잭슨과 함께 황궁으로 출발했다.
에스타리온 백작가를 나온 뒤 한 번도 궁에 오지 않았는데도 황궁은 어제 온 듯 익숙하게 느껴졌다.
검술 시합이 열리는 경기장으로 가는 길, 누군가가 잭슨을 불렀다.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이지?”
상대는 황태자의 시종, 피터슨 달튼이었다. 상대를 확인한 잭슨의 얼굴이 단박에 구겨졌다.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습니까?”
“하! 웃기는 일이군. 자네가 무슨 자격으로! 아무튼, 잭슨, 자네와 이런 말도 안 되는 말싸움을 하려고 온 건 아니네. 내 볼일은 셀레나 아가씨에게 있으니까.”
“무슨 일이죠?”
“황태자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어주시죠.”
“저는 전하와 할 얘기 없어요.”
“잠시면 됩니다. 시합 시작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잖습니까.”
“거 싫다는데 왜 자꾸 강요합니까? 아가씨. 갑시다.”
잭슨이 나를 데리고 경기장으로 향하자 피터슨의 얼굴이 벌겋게 익었다.
결승 경기라 그런지 경기장엔 꽤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우리 자리는 가장 앞줄이었다. 자리에 앉자 잭슨은 또다시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리를 덜덜 떨고 마른세수를 하더니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잠시 긴장 좀 풀고 오겠습니다.”
“네. 다녀와요.”
매일 틱틱거려도 속정은 깊은 사람이라니까.
멀어져 가는 잭슨을 보다가 웃음을 참는데 옆자리에 누군가 앉는 게 느껴졌다.
빈 좌석에 가방을 올려뒀던 터라 물건을 치워 주려고 고개를 돌리자 황태자가 보였다.
내가 오지 않으니 직접 행차한 모양이다.
“서운하군. 표정은 풀지 그러나.”
“계약에 대해 설득하려고 찾아오신 거라면 소용없어요.”
“아. 계약 때문에 찾아온 건 아니다.”
“그러면요?”
황태자는 살짝 고개를 틀어 나를 응시했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평소의 무감한 눈도 아니었다. 지금의 그에게선… 분노와 슬픔이 느껴졌다.
“예전의 모습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군.”
“무슨 말씀인가요?”
“행동도, 분위기도, 눈빛도. 정말 모든 게 달라졌어.”
“셀레나 에스타리온의 죽음을 바란 것 아니셨나요? 이단심문소에서 저를 조롱하신 것도 그 때문이라 생각했는데요.”
“그건…….”
“계약 때문이 아니면 제게 뭘 바라서 이곳까지 오신 건가요?”
“…보고 싶어서 왔다.”
“예?”
내가 잘못 들은 걸까. 아니면 황태자가 미친 걸까.
이상한 말을 내뱉어 놓고도 황태자는 평소처럼 담담한 태도를 유지했다.
펄쩍 뛴 건 내 쪽이었다.
“저를 놀리시려는 건가요? 아니면 이제 와 제가 필요해지니 마음을 사야겠다 판단하신 건가요?”
“둘 다 아니다. 나는 그저…….”
황태자는 이를 악물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피로한 기색을 보이더니 한숨을 삼켰다.
“내게 이유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 건가?”
“설사 이유가 있다 해도 제가 알아야 하나요? 우린 더 이상 아무 사이도 아닌데.”
“칼립소 공작과 혼인할 생각인가?”
“그런 건 왜 물으시는 건가요?”
보고 싶어서 왔다고? 그 말이 진심이더라도 나는 그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황태자는 집요하게 내 대답을 기다렸다. 대꾸하기 전엔 물러나지 않을 기세였다.
“그를 사랑하나?”
혼란스러웠다. 나를 뒤흔들어서 에이든을 조롱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그자와 함께하는 건 그대의 명예나 평판에 좋을 게 없을 텐데.”
“출신은 중요하지 않아요. 다 똑같은 붉은 피인걸요.”
“내 앞에서 할 말은 아니군.”
“제 앞에서도 하실 말씀은 아니었어요. 에이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죠. 마음 깊이 사랑해요. 모두가 저를 외면했을 때 그 사람만 제 곁을 지켜 줬어요. 과거에 제 목숨을 걸어가며 저를 구했던 것도 에이든이었어요. 그런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나는 황태자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지는 걸 확인했다.
좌절이 번져가는 표정을 보자 희미한 희열이 솟았다.
때맞춰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곧 시합이 시작될 테니 착석하라는 알림이었다.
“…그대는 아직도 아무것도 몰라.”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더니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황태자가 떠난 자리에 내 가방만 덩그러니 남았다.
마침 잭슨이 허둥지둥 돌아왔다. 결승전 참가자들이 입장했다.
가벼운 셔츠 차림을 한 에이든은 한 손에 크고 긴 검을 쥐고 있었다.
“와…….”
거의 열흘 만에 보는 터라 얼굴을 확인하자 나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에이든은 그간 더 탄 듯했다. 구릿빛으로 빛나던 피부가 더 가무잡잡해졌다. 걸음걸이를 보니 부상도 없는 듯했다.
시합장으로 입장한 에이든이 단박에 이쪽을 찾아냈다.
에이든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허공에서 우리 둘의 눈이 마주쳤다.
찰나가 아주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긴 시간이 찰나처럼 여겨졌다. 세상과 내가 분리되고 이 자리에 그와 나만이 남은 것 같았다.
에이든은 시선을 마주한 채 관객석 근처까지 걸어왔다. 그가 내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참가자 선이 그어져 있지 않았다면 그는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을 테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좋다. 눈빛을 교환하는 것만으로도 그리움이 해소되었다.
레이온 제약 일로 바쁘지 않았다면 에이든의 빈자리가 헛헛하다 못해 공허하게 느껴져 견딜 수 없었을 테다.
‘얼른 경기가 끝나면 좋겠어.’
에이든을 가까이에서 확인하고 싶다. 새까만 눈과 시선을 맞추고 나직한 목소리를 들으며 그간 있었던 일을 조잘대고 싶다.
‘보고 싶었어.’
에이든이 내게 소리 없이 말했다. 뜨거워지는 내 얼굴과 달리 에이든은 부끄러워하는 기색은 아니다. 피부가 너무 타서 얼굴을 붉혀도 티가 안 나는 걸지도 모르겠다.
“큼. 흠.”
옆에 앉은 잭슨이 헛기침을 했다. 나는 손부채질을 하며 웃음을 꾹 참았고 에이든은 하하. 하고 웃더니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마법으로 목소리를 키운 사회자가 나와서 시합에 대해 설명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시합장 한쪽에 앉아 있는 에이든만 보였다.
오래 지나지 않아 시합이 시작되었다. 에이든의 상대는 거인 같은 몸집을 한 황실 근위대장이었다.
그냥 봐도 키가 2미터는 훨씬 넘는 사람이었다. 에이든도 키가 크고 덩치가 거대했지만…….
“이길 겁니다.”
잭슨은 아까까지만 해도 긴장으로 어쩔 줄 모르더니 지금은 이길 거라고 단언한다.
“실전에서부터 다져 온 검입니다. 거기에 훈련으로 기초가 단단해졌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죠.”
“그런 것치고 너무 긴장하신 것 아니에요?”
“그건… 큼. 흠. 제 첫 제자 아닙니까. 그러다 보니 좀 긴장되어서…….”
“어머.”
새빨개진 잭슨의 얼굴을 보곤 웃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뿔피리 소리가 시합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두 사람은 서로 인사를 나눈 뒤 검을 꺼냈다. 먼저 파고든 건 에이든이었다.
에이든은 근위대장보다 몸집이 작은 걸 이용해 품으로 파고들어 검을 휘둘렀다.
챙! 두 사람의 검이 맞부딪치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에이든은 무게중심을 옮겨서 근위대장의 검을 흘렸다.
그는 빠르게 검을 휘둘렀고 근위대장은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잭슨. 저렇게 해도 되는 건가요? 너무 몸을 안 사리는 것 아닌가요?”
“공작님은 방어가 아닌 공격에 능숙한 사람입니다. 전쟁터란 그런 곳이죠. 공격이 최선의 방어가 되는 곳.”
“저러다가 다치면 어떡해요? 너무 위험해 보이는데… 꺅!”
근위대장이 에이든에게 검을 찔러 들어가자 너무 몰라서 눈을 꼭 감았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이래서 오기 싫었다. 에이든이 위험한 걸 보기 싫어서, 혹시나 그가 부상입을까 봐…….
‘네가 또 상처 입는 걸 볼 수는 없어.’
피 흘리며 죽은 듯 쓰러진 에이든이 떠오르자 눈물이 핑 돌았다.
차가워지는 두 손을 비비며 심호흡했다. 잭슨이 옆에서 탄성을 내질렀다.
그 소리에 눈을 뜨자 에이든이 바닥을 구르며 근위대장이 찍어 내리는 검을 피하는 게 보였다.
“헙!”
가슴이 떨어질 것 같아서 고개를 푹 숙였다. 차가워질 대로 차가워진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도저히 못 보겠다. 햇빛에 번쩍거리는 검도, 구경꾼들의 환호성도 모두 끔찍했다.
져도 좋으니 다치지 않고 돌아오면 좋겠다. 그거면 된다.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 시합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미친 듯한 환호성이 들렸다.
옆에 앉은 잭슨이 목이 찢어져라 소리 질렀다.
“공작이 이겼다! 칼립소 공작이 이겼다고!”
눈을 삐죽 뜨자 심판이 나와서 에이든의 손을 맞잡고 소리쳤다.
“올해의 검술 대회 우승자는 칼립소 공작입니다!”
에이든의 왼팔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근위대장의 검과 바닥에도 붉은 피가 번져 있었다.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내가 바라는 건 권력 있는 에이든도, 부자인 에이든도 아니고 건강하게 내 곁에 있는 에이든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