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시에나는 숨을 들이켰다. 크루커스에 손바닥을 올리기만 하면 강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성수가 만들어진다.
그러면 구경꾼들은 탄성을 내지르고 병든 자는 환호한다. 그렇게 시에나는 성녀가 되었다.
‘해야 해. 해야만 해.’
셀레나를 마주치기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해 보이겠단 용기가 가득했는데 지금은 초라하다 못해 구차할 정도로 두려웠다.
“얼른. 다들 기다리잖아.”
달콤한 음성과 달리 그 속엔 칼날이 벼뤄져 있었다.
시에나는 손을 덜덜 떨며 크루커스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몸이 벌벌 떨리다 못해 식은땀이 났다.
손끝이 차가운 호리병에 닿는 순간, 시에나는 욱하고 토악질을 시작했다.
“웁! 우욱!”
긴장을 이기지 못해서 헛구역질을 한 것이다.
그녀는 입을 틀어막고 벌떡 일어나 안쪽의 화장실로 뛰어갔다.
“우웨엑! 웩! 웩!”
시에나는 위액까지 다 게워 냈다. 손끝이 아직도 바들바들 떨렸다.
크루커스에 생명력을 죄 빨려 죽든가 시온의 손에 죽든가.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간질이나 다른 수가 통하기엔 신전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신전은 지금 그녀를 신뢰하지 않을 게 뻔했다.
그렇다고 크루커스가 실은 성물이 아니라고 밝히면…….
‘신전 측에서 날 제거하려고 들지도 몰라.’
성녀가 가짜로 밝혀지느니 사고로 위장해서 처리하는 게 더 나을 테니까.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발악이라도 하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 점이 시에나를 절망케 했다.
“저런.”
뒤따라온 셀레나가 뒤에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시에나는 고개를 휙 돌려 셀레나를 노려보았다.
“다 토했어?”
“너, 대체 무슨 꿍꿍이야!”
“꿍꿍이라니 서운하네. 널 걱정해서 크루커스의 비밀까지 알려 줬는데.”
“…신전에 다 말할 거야. 크루커스가 가짜고 진짜는 백작가에 있는 것 같다고.”
즉석에서 뱉어 낸 거짓말이지만 나쁘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셀레나는 그런 시에나의 기대를 무참히 부쉈다.
“대신관이 인준까지 한 성녀가 이제 와 말을 바꾸면 퍽이나 좋아하겠어.”
“…비켜!”
시에나는 거칠게 변기 칸에서 나와 개수대로 갔다.
물을 틀어놓고 입을 헹구는데 거울에 셀레나가 비쳤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닮은 얼굴이었다.
물론 뜯어보면 다른 점이 많은데다 분위기는 판이하게 달랐지만, 단순히 사촌이라고 보기엔 힘든 점이 많았다.
비슷한 외모에, 같은 에스타리온인데… 셀레나와 제 차이라곤 아버지가 장자냐, 차남이냐 뿐이다.
“과거엔 나처럼 신성력이 있는 사람들을 차출해서 성기사로 만들었대.”
“그깟 신성력 가지고 유세는.”
“그것도 없는 넌 성녀 노릇을 하려면 생명력이라도 뽑아다 바쳐야 하고. 그치?”
셀레나의 비꼼에 시에나는 홱 고개를 돌려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에스타리온 백작가에서 다시 만났을 때만 해도 비꼼은 커녕 작은 공격에도 어쩔 줄 몰랐는데…….
아무것도 아니던 계집애가 자신을 이렇게 곤경에 빠트리다니, 분통이 터졌다.
“날 건드리면 안 되는 거였어. 진짜 자리가 갖고 싶었으면 딱 거기까지만 했어야지. 내가 널 어쩔 줄 알고 그런 거야?”
“네가 뭐라고 두려워해. 나도 에스타리온이야! 네까짓 게 뭔데!”
“반쪽짜리 사생아겠지.”
현실을 일깨우는 단어가 나오자 시에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비릿한 미소 같은 건 어울리지 않았지만 셀레나는 시에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런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네가 작은아버지의 사생아로 나타났다면 널 친자매처럼 여겼을 거야. 갖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을 거고 좋은 집안의 사내와 짝지어 주며 기죽지 말라고 어마어마한 지참금도 줬을 테지. 그 모든 기회를 걷어찬 건 너야.”
“닥…쳐. 네가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야.”
“네가 어리석은 사람이란 것 정도는 잘 알지.”
셀레나는 시에나에게 다가가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녀의 손을 쳐내고 싶었지만 겁에 질린 시에나는 셀레나의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제발 건강하게, 그리고 꿋꿋하게 버텨. 이제부터 시작인데 벌써 이러면 안 되지.”
“…뭐?”
“이래서야 나중에 이단심문소 생활은 어떻게 견디려고 그러니? 크루커스 따위와는 비교되지 않게 힘든 곳인데.”
“무, 무, 무슨-.”
시에나가 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자 셀레나는 쿡하고 웃었다. 그녀는 붉은 기 섞인 시에나의 노란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또렷하게 발음했다.
“넌 곧 이단심문소에 가게 될 거야. 크루커스의 비밀이 언제까지 지켜질 줄 알고.”
“우, 웃기지 마.”
“도망칠 곳은 없어. 네가 도망가면… 맙소사. 그렇게 되면 스스로 사기극을 증명하게 될 테니 넌 마녀나 악마가 씐 사람이 되어서 갖은 상황에 놓이겠지. 이단심문소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거야.”
시에나가 낮게 숨을 삼켰다. 셀레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어깨를 확인하곤 곱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럼 그날까지 잘 지내도록 해.”
쾅. 셀레나가 나가고 나자 화장실 문이 닫혔다.
신관과 셀레나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시에나는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려 거울 속 자신을 확인했다.
윤기가 흐르는 머리와 고급 드레스를 입었는데도 하녀일 때보다 더 초라해 보였다.
그녀는 제 모습에 울음을 터트리며 벽에 몸을 기댔다.
딱 일 년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으면 좋겠다.
다시 돌아가면 다른 선택을 할 텐데. 뒤늦은 후회가 썼다.
* * *
에이든은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벌써 준결승 시합을 앞두고 있었다.
본래라면 검술 대회는 보름에 걸쳐서 천천히 진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황태자가 대회 이후에 진행할 일이 많은 바람에, 모든 일정이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처리되고 있었다.
에이든으로선 그편이 더 나았다. 그가 바라는 건 대회가 주는 축제 분위기나 시합의 짜릿함이 아니라 우승 후 얻을 상이니까.
‘셀레나는 잘 지낼까.’
준결승이니 오늘은 오면 좋겠는데 셀레나는 정말로 결승 경기에만 참석할 생각인 듯했다.
‘많이 바쁜가. 그래도 식사는 잘 챙겨 먹으면 좋겠는데.’
작은 걱정을 한 에이든은 밖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리자 문을 열고 상황을 확인했다. 황태자가 그의 시합 상대와 대화 중이었다.
한쪽을 일방적으로 응원하기 위해 들른 건 아닌지 그는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한 뒤 에이든에게로 왔다.
“시합 준비는 잘 되고 있는가?”
“예. 뭐, 괜찮은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 잠시 이야기 좀 하지.”
동의를 구한 건 아닌지 황태자는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에이든은 불만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그를 쫓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셀레나에게 일이 생겼다더군.”
“일이요? 사고라도 난 겁니까?”
에이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황태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셀레나에게서 신성력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체내에 신성력이 흐르는 게 확인되어 인준을 받았고 그 일로 우리 상황이 많이 틀어졌지.”
“우리?”
이번엔 에이든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누구 하나 물러서지 않고 팽팽히 맞섰다.
에이든은 사납디 사나웠고 황태자는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을 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황태자였다.
“거래를 했지.”
“압니다. 레이온 제약이 황실을 지지하는 대신, 황실은 신전을 쳐서 시에나를 처리하는 거겠죠. 같은 집에 사는데 어떻게 모를까요.”
황태자에게서 평소 음울할 정도로 차분하게 정돈된 분위기가 사라지더니 단박에 사나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에이든은 그런 황태자를 조롱하듯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신성력 때문에 신전이 셀레나를 간절히 바라서 거래가 틀어지기라도 했답니까?”
“…비슷하다. 더는 나와 협력할 필요가 없다며 계약을 파기하자더군.”
“하하. 그것 참 재밌네요.”
에이든은 이 상황이 진심으로 재미난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한쪽 볼에 난 흉터가 선명해졌다. 가늘게 뜬 황태자의 눈이 흉터에 닿았다.
“셀레나를 구하다가 난 상처라지?”
“아. 들었습니까?”
“네가 나타나기 이전부터 많은 걸 공유해 왔지. 약혼이란 그런 거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거라.”
“다행이군요. 약혼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아서. 그거 아십니까? 저는 이 흉터가 늘 자랑스러웠습니다. 흉측하다 욕먹어도 언제나 영광의 흔적이었죠. 내가, 별것도 아닌 노예 새끼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존재를 구해 냈다는 증거니까요.”
에이든은 얇게 말리는 황태자의 입술을 보곤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무튼,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뭡니까?”
“네가 셀레나를 설득해 줬으면 한다.”
“제가요? 한때나마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받은 사이인데, 직접 하시는 게 낫지 않습니까?”
“나날이 건방져지는군.”
“그 일에 있어서 제겐 의무도 책임도 없으니까요. 제가 할 일은 ‘성배를 찾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셀레나가 계약을 파기한 거라면 직접 시에나를 끌어낼 방법이 있단 건데 그 말은 신전과 맞설 수 있는 패가 있단 의미죠. 이러나저러나 전하께 유리하게 돌아갈 텐데 제게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하.”
황태자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꽤 피로해 보였다.
에이든은 시계를 확인하며 시간이 없단 양 황태자를 압박했다.
“시온. 아니, 에스타리온 백작과의 약속이다. 셀레나가 직접 신전과 적대하지 않도록 하라는.”
“…….”
“이단심문소에 다녀온 일이 있어서 어떤 방향이든 신전과 적대하는 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거라는 게 에스타리온 백작의 의견이다. 레이온 제약이 이 이상 신전의 적대를 받지 않으려면 그편이 맞지.”
“그런데도 셀레나가 전하와의 계약을 파기하려는 건…….”
그만큼 황태자와 함께하기 싫다는 의미다.
황태자가 들어올 때부터 기분이 안 좋아 보였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에이든은 낄낄 웃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제가 셀레나를 설득하면 무얼 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녀의 안전을 확보하는 게 최우선인 줄 알았는데?”
“그렇긴 하지만 셀레나를 설득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무얼 원하지?”
“흠. 아무래도…….”
에이든은 황태자를 슬쩍 확인했다. 셀레나에 한해서 황태자는 이상한 구석이 많았다.
일 때문에 미친 듯이 바쁘지만 않아도 그런 면모가 더 드러났을 테다.
“됐습니다. 전하께 뭘 받는 건 도리가 아닌 듯하니 그냥 하도록 하죠.”
사실 처음부터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황태자에게 뭔가를 받는 이상 셀레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득을 위해 행동한 게 되니까.
그저 황태자를 골려주고 싶어서 무언가를 받고자 하는 척을 했을 뿐이다.
그 속내를 파악한 황태자는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고 에이든은 즐겁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들었다.
“시합 시간이 되어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시합에 출전하는 에이든의 발걸음이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