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아침이 밝아왔다. 지옥 같은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공주처럼 좋은 대접을 받으며 성녀님하고 떠받들어 주기에 하루하루가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는데 이젠 매분 매초가 지옥 같았다.
시에나는 창문을 투과한 햇빛을 피하기 위해 이불을 뒤집어쓰며 눈을 꼭 감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을 텐데 야속하게도 10시 정각이 되자 하녀가 찾아왔다.
“성녀님. 괜찮으세요?”
그녀를 모시는 하녀가 걱정스레 물었다.
“으응. 아직도 몸이 으슬으슬하네.”
“신관 분들을 부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냐! 괜찮아. 그건… 너무 번거롭게 하는 거잖아.”
“아니면 성수라도 만들어 드세요.”
성수라는 말에 시에나가 크게 움찔거렸다. 하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녀에게 제안했다.
“아무리 백성들을 위한다지만 성녀님 몸부터 챙겨야죠. 성녀님이 건강하셔야 백성들도 건강해지는걸요.”
“아, 안 돼!”
“성녀…님?”
“그… 성수는 백성들을 위한 거잖아. 내가 쓸 수는 없어. 성수가 언제까지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러니 아끼는 게 좋아.”
“성녀님… 어디서 이런 천사 같은 분이 나타난 건지…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주방에 말해서 몸에 좋은 것들로 음식을 만들어 올게요.”
“으응. 고마워.”
하녀가 나가고 나자 시에나는 이불 아래에서 울먹거렸다.
지난 며칠간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누워만 있는 중이다.
언제까지 이 핑계가 통하지는 않을 거다.
그러니 어서 다른 핑계를 만들든 크루커스를 부술 방법을 찾아내든 해야 하는데 어느 쪽이든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머리가 아파. 생명력을 너무 많이 써서 그런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덜컥 겁이 나서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간 너무 많은 양의 성수를 만들어 냈다.
에스타리온 백작이 보름에 한 번 사용한 것과 달리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성수를 만들었다.
정확히는 몰라도 에스타리온 백작보다 더 많이 사용한 것만은 확실하다.
시에나는 제 손과 팔을 확인했다.
과거엔 햇볕 아래에서 일하느라 가무잡잡하게 탄 제 피부가 싫었는데 창백하게 질린 피부를 보자 옛날의 그 모습이 그리워졌다.
“어쩜 좋아. 핏기가 하나도 없어. 정말로 잘못되는 건 아니겠지?”
눈물과 함께 콧물이 비죽 나왔다. 시에나는 몇 번이고 제 피부를 확인했다.
이불 아래에서 나와 햇빛 아래에 팔을 비추어 보고 거울로 얼굴도 확인했다.
“아냐. 아닐 거야. 이제까지 사용했는데 아직 쓰러지지 않은 거면 난 괜찮은 건지도 모르잖아.”
안도가 드는 것도 잠시. 시에나는 신전 때문에 겁이 나서 울음이 쏟아졌다.
성녀가 성수를 만들지 못하고 아파서 누워 있기만 하면, 신전이라고 계속 자신을 내버려 두진 않을 거다.
‘그래도 성녀로 공표되었는데 그렇게 허무하게 버리진 않겠지?’
손톱을 딱딱 깨무는데 며칠 전 신관들이 나누던 대화가 생각났다.
‘이게 다 성녀님 때문입니다.’
이미 신관들도 제게서 등을 돌리고 있다.
어제 신문을 보니 에스타리온 백작가에서 신전의 기부금 착복과 신관들의 범죄 사실을 터트렸다.
에스타리온 백작가 출신이라는 게 알려질 대로 알려져서 가만히 있어도 눈치가 보이는 상황에 백작가와 신전의 진흙탕 싸움이 시작되자 그녀로선 죽을 맛이었다.
거기다 신전은 그녀의 출신과 그건 저지른 악행을 알고 있다.
즉, 신뢰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성녀라는 타이틀 때문에 억지로 받아주는 중이었다.
그러니 쓸모가 다 하면 자신을 에스타리온 백작 가에 버릴 수도 있는 노릇 아닌가? 그렇게 되면 시온이 자신을 찢어발길 게 뻔하다.
“안 돼… 시온에게 맡겨지면 난 제대로 죽지도 못할 거야.”
사실 가장 잔인한 건 제 자식을 스스로 이단심문소에 넣은 에스타리온 백작이지만 그는 지금 의식이 없는 상태다.
그렇다고 그 아들이 잔인하지 않은 건 아니다. 시에나는 시온이 누구보다 잔혹해질 수 있는 걸 옆에서 지켜봤다.
제 아버지가 성난 말처럼 날뛰어서 본인은 자중했지만 시온은 백작을 많이 닮은 아들이었다.
적어도 셀레나에게 했던 것처럼 무릎을 꿇리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거다.
생각이 최악의 상황까지 미치자 시에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러든 저러든 제 결말이 정해져 있다면 성녀로 대접받다 죽는 게 나았다.
성녀의 권세를 유지해야 저쪽에 공격을 가할 수도 있고.
“어라? 성녀님. 몸이 안 좋아서 쉬시는 건 아니었어요?”
“백성들이 기다리고 있을 게 뻔한데 제가 어떻게 쉬겠어요.”
시에나는 아직 머리카락 끝이 다 마르지도 않은 채 백성들을 만나러 갔다.
성수를 뽑아내는 광경을 전시하는 건 아주 좋은 선전효과를 냈다.
‘성녀님, 성녀님! 성녀님께서 기적을 행하신다!’
다들 그렇게 자신을 추앙했다. 크루커스가 제 생명줄을 깎아 먹는, 악마적인 물건인 것도 모르면서.
시에나는 크루커스를 가지고 도망친 과거의 자신을 원망하며 복도를 꺾었다.
그러자 어느 신관과 대화를 나누는 셀레나가 보였다.
“아…….”
셀레나는 아주 건강해 보였다.
피부는 진주빛으로 빛났고, 표정도 눈빛도 생기 있었다.
에스타리온 백작가에 있을 때 어딘가 가라앉아 보이던 분위기와는 확연히 달랐다.
‘난 네가 싫어.’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다. 똑같은 외모에 똑같은 에스타리온 백작가의 핏줄인데 셀레나는 아가씨였고 자신은 하녀의 딸이었다.
고생 한 번 안 해 본 손이나 말간 눈빛이 짜증 났다.
자신도 셀레나처럼 고운 손과 순진한 눈망울을 해야만 했다.
도벽 있는 엄마나 사생아 신분은 그녀가 바란 게 아니었다.
제 아비가 에스타리온 백작의 동생, 루카스 에스타리온인데 그 딸인 자신이 밑바닥 인생을 사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오갈 데 없는 분노는 셀레나를 볼 때마다 몸집을 키워갔다.
그래서 셀레나를 넘어트렸다. 혹시 그녀가 기억을 되찾기라도 하면 제 처지가 곤란해지니, 신뢰할 수 없도록 수를 쓸 필요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셀레나는 언제 진탕에서 올라온 건지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잘 관리된 머리카락이나 고급 실크로 만들어진 드레스는 차치하고서, 셀레나에게서 뿜어져나오는 환한 기운이 싫었다.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어서다.
‘내가 가진 모든 게 거짓이라고 증명하는 것 같아.’
제 웃음, 성녀란 신분, 백작가 출신이란 배경까지… 네가 감히 욕심낼 게 아니었다고 온몸으로 말해 주는 듯하다.
그래서 셀레나를 피해 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시에나?”
오늘은 셀레나가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시에나는 초라해지는 스스로가 싫어서 이를 악물고 어깨를 폈다.
“안녕. 셀레나.”
시에나는 그녀와 제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단 듯 환하게 미소 지었다.
대중들은 시에나가 백성들을 위해 크루커스를 들고 신전에 오며, 크루커스를 독점하려고 한 백작가와 척을 지게 되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신관들은 어렴풋이 진실을 알았다. 에스타리온 백작의 지위를 물려받은 시온이 모든 걸 폭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셀레나와 대화하던 신관은 긴장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살폈다.
시에나는 그게 부끄럽고 치욕스러웠다.
크루커스가 이상한 물건이라고 해도 자신은 성녀인데 분명한데 저런 눈빛은 뭐란 말인가.
“신전까진 어쩐 일이니? 날 보러 온 거야?”
“확인받을 게 있어서.”
“확인?”
“아무래도 내게 신성력이 있는 것 같거든.”
“신성력?”
시에나의 미간이 모였다. 표정 관리를 한다고 했지만 얼굴이 굳는 게 느껴졌다.
“신관도 아닌 네게 신성력이 있다고?”
“간혹 서품을 받지 않아도 신성력이 있는 분들이 있죠. 그런 분들은 성기사가 될 자격이 갖춰진 거라고 보면 된답니다.”
신관의 설명에 시에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셀레나에게 신성력이 있다고? 다 거짓말일 거다.
이단심문소까지 간 애가 무슨 신성력이란 말인가.
“뭔가 착각한 거 아냐? 신성력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이단심문소에서도 아무 말 않았는데.”
“서품을 받으면 정순한 신성력이 생기지만 자연 그대로의 신성력은 정제되지 않아서 피를 내어 확인하기 전까지는 확인하기 힘들대. 교구장님과 대신관님이 직접 확인해 주셨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어.”
셀레나가 시에나에게 대신관이 써 준 확인서를 보여 주었다.
시에나는 이를 악문 채 확인서를 돌려주었다.
“그나저나 넌 어딜 가는 길이니? 성수를 만들려고?”
셀레나의 시선 끝에 크루커스가 걸렸다. 시에나는 품에 안은 상자를 힐끗 내려다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크루커스는 피부와 접촉하면 성수를 만들어 내어서 상자에 담아 옮기곤 했다.
백성들 앞에서 성수를 만드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일부러 상자에 담은 건데 꼭 자신이 셀레나, 그녀의 말을 믿어서 크루커스를 멀리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으응. 성수를 만들어야만 고통에 빠진 백성들을 구할 수 있는걸.”
“네가 이렇게 누군가를 위할 줄 몰랐네. 같이 가자. 네가 성수를 만들어 내는 광경이, 너무너무 보고 싶어.”
싱긋 웃는 셀레나의 미소가 서늘한 건 기분 탓일까.
시에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움직여 늘 성수를 만들던 1층의 홀로 갔다.
그녀가 나타나자 아침 일찍부터 기다리던 백성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성녀님이시다!”
“성녀님이 우릴 구원하신다!”
평소에는 달콤하게만 느껴지던 환호성이 오늘은 무섭게만 느껴졌다.
크루커스가 성물이 아니란 게 알려지면 저 환호성은 자신을 비난하는 소리가 될 테다.
시에나는 느릿하게 바닥에 앉아 상자를 내려놓았다.
성수를 만드는 게 꺼림칙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행동이 배는 느려졌다.
“성녀님! 저희에게 자비를!”
“성녀님께서 성수를 만들어 내신다!”
손을 들어 올리던 시에나는 제 손이 덜덜 떨리고 있는 걸 확인했다.
‘크루커스가 성물이 아니란 건 셀레나의 거짓말이야. 날 위협하려고 허튼수작을 부린 거야.’
스스로에게 속삭일수록 에스타리온 백작이 쓰러졌다는 신문 기사가 선명하게 기억났다.
‘내가 이제껏 크루커스를 몇 번이나 사용했더라?’
에스타리온 백작은 몇 번이나 사용했을까?
나도 한계에 다다른 거라면 이번 한 번으로도 백작처럼 쓰러지게 될 텐데…….
시에나는 힐끗, 제게 환호하는 백성들과 옆에 선 신관을 확인했다.
쓸모를 보이지 않으면 버려진 패가 되어 과거 하녀로 생활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처참한 처지에 놓이게 될 거다.
‘어떻게 해야 하지… 무서워… 난 쓰러지기 싫어.’
딱딱. 턱이 떨리자 이빨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옆에 있던 셀레나가 그녀에게 환히 웃으며 말했다.
“뭐 해? 어서 크루커스를 써야지.”
셀레나는 지금 아주 즐거워 보였다.
밝은 표정이 크루커스가 정말로 생명력을 빨아들여 성수를 만드는 물건임을 증명해 주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