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88화 (89/134)

<88>

에이든은 아침 일찍 셀레나에게서 온 편지를 확인했다.

힘 조절이 되지 않아 펜에 잉크가 뚫리고 삐뚤빼뚤한 그와 달리 셀레나의 글씨는 성미처럼 아주 단정했다.

결승전에 꼭 보러 가겠다는 말과 함께 곧 놀라운 소식을 전하게 될 것 같단 것. 그리고 오늘도 힘을 내서 이기라는 응원까지.

그녀가 전한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벅찬 행복을 전했다.

에이든은 셀레나의 편지를 두어 번쯤 더 읽었다.

그러고 나자 궁에 배정된 그의 방에 손님이 찾아왔다.

노크 소리에 문을 열자 어두운 얼굴을 한 시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무슨 일입니까?”

용건을 물었지만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다.

사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시온은 셀레나가 자신과 함께 사는 걸 알았으니까.

에이든이 문에서 몸을 비켜 주자 시온이 안으로 들어왔다.

에이든은 시온의 낯빛이 좋지 않은 걸 확인했다.

안색은 평범했지만 근심 가득한 표정이나 음울한 분위기가 누가 봐도 집안에 우환이 있는 이였다.

“에스타리온 백작의 일은 유감입니다.”

시온은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 해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물었다.

“셀레나는 잘 지냅니까?”

“예. 회사 일도 열심히고 잘 웃고 잘 지냅니다.”

“…….

시온은 실망과 동시에 안도했다. 그리고 그런 스스로가 정말 못났다고 여겨져 울적했다.

“공작님의 시선엔 제가 아주 못나 보이겠지요.”

“…….”

“이해합니다. 저도 스스로가 한심해 죽을 지경이니까요.”

에이든이 시온에게 위로를 건넬 수 없는 건 셀레나가 그를 얼마나 원망하고 있는지 알아서다. 그녀는 시온을 용서하지 않을 테다. 그러니 위로랍시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 집을 이렇게 만든 시에나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건 과거에 셀레나를 납치했던 이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우선은 시에나를 무너트릴 생각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얼마 전, 저는 신전 측에 시에나가 우리 집안에 저지른 짓을 모조리 폭로했습니다. 하지만 신전은 꿈쩍도 않더군요. 그들이 그토록 부르짖는 사랑이니 정의니 하는 것들은 권력 앞에선 아무것도 아닌 모양입니다.”

“시에나라면 황태자 전하께서도 함께 노리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네. 전하께서 시에나에게 주목하는 건 의외였지만 셀레나와 거래를 한 듯하니 당연한 일이겠죠. 그래서 저는 신전을 노리기로 했습니다.”

시온은 숨을 들이마시곤 설명을 이어나갔다.

“레이온 제약이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아직 성장 중인 회사로 신전에 맞서는 건 힘든 일이죠. 전하께선 신전과 싸우는 데 신중을 기하시니 제가 사냥개가 되어 나설 생각입니다.”

말하는 시온의 태도가 상당히 비장해 보였다.

에이든은 심각한 얼굴로 시온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는 오늘 신전의 비리를 터트릴 생각입니다. 에스타리온 백작가에는 그간 신전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쌓아 온 자료가 많죠.”

“그렇게 되면 백작가 또한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될 텐데도요?”

“아버지께선 의식이 없으시고 하나뿐인 동생과는 영원히 척을 지게 되었습니다. 가족을 내치며 스스로의 명예를 더럽혔으니 더 잃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단호한 어조 속엔 그간의 속앓이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시온은 주먹을 꽉 쥔 채 이를 갈았다.

그는 모든 걸 잃었다. 아버지인 전대 에스타리온 백작이 그렇게 되며 집안을 물려받았지만 중요한 건 작위니 재산이니 하는 것들이 아니다.

“제가 신전을 쳐서 신전의 입지가 흔들리면, 셀레나가 시에나를 끌어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당신이 시에나를 벌하지 않고요?”

“화는 나지만 시에나를 처벌하는 건 그 아이가 되어야겠죠.”

사실 남 탓을 하기에도 우스운 일이었다. 시에나가 거짓말을 했다고 해도 그 말에 넘어가서 셀레나에게 모진 행동을 한 건 그들의 선택이었으니까.

시에나를 원망할 수 없게 되면, 납치범들을 잡아넣고 나면 이젠 누구를 원망해야 할까. 시온은 제 못난 면면에 눈앞이 캄캄해져서 마른세수를 했다.

“이단심문소에서 셀레나를 도와준 게 칼립소 공작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날, 저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 아이를 시에나 앞에서 무릎 꿇렸습니다.”

“…….”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요. 그때를 떠올리면 도저히 스스로를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시온은 괴로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자기혐오를 멈출 수가 없었다.

시에나의 진짜 정체를 깨닫고 나니 더더욱 자신이 한 짓이 끔찍하게 여겨졌다.

납치범의 딸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으니 영원히 자신을 증오해도 할 말이 없다.

에이든은 매서워진 눈매로 시온을 향해 주먹이 나가려는 걸 참았다.

셀레나가 시에나에게 무릎 꿇었단 건 알지 못했었다. 마음 같으면 당장 시온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갈 데 없는 셀레나를 도와주시고 살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시온이 몸을 굽혀 마음을 표시했다.

“그런다고 해서 셀레나가 그쪽을 용서하거나 돌아가진 않을 겁니다. 경기를 준비해야 하니 이만 돌아가 주면 좋겠군요.”

“…예. 그럼 행운을 빕니다.”

에이든의 축객령에 시온은 정중하게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

혼자 남은 에이든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분노를 삭혔다.

시에나와 납치범이 셀레나의 인생을 난도질했다.

자신이야 처음부터 밑바닥 인생이었으니 난도질 좀 당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지만 셀레나는 예외여야 했다.

‘네가 항상 행복하길 바랐는데…….’

셀레나가 수렁에 빠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렇게 재회하는 날은 오지 않았겠지. 에이든은 그 사실이 조금 슬펐다.

‘무조건 우승해야 해.’

어제가 32강 경기였으니 오늘은 16강이다.

검술 대회에서 우승하면 황제는 한 가지 상이나 부탁을 들어준다.

에이든이 부탁할 사항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는 검을 햇빛에 비추어 날이 얼마나 서 있는지 확인했다.

다치지 말고 무사히 경기를 치르라는 셀레나의 편지가 떠올랐다.

에이든은 햇빛보다 따스한 셀레나의 문장을 곱씹으며 경기를 준비했다.

* * *

시에나는 셀레나가 남기고 간 말 때문에 며칠째 전전긍긍 중이었다.

셀레나의 말을 온전히 믿진 않지만 에스타리온 백작이 의식 없이 누워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제들에게서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상한 일입니다. 죽지 않을 만큼의 생명력만 존재하더군요.’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어느 신관의 한 마디에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이대로 있으면 나도 에스타리온 백작처럼 될 거야.’

이빨이 딱딱 부딪쳤다. 분명 크루커스를 두고 성물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생명력을 뽑아내는 무서운 물건이었다.

시에나는 제 방에 비치된 크루커스를 노려보며 숨을 삼켰다.

이제까지 크루커스를 사용한 횟수를 대충 계산해도 벌써 에스타리온 백작이 평생 사용한 만큼은 될 거다.

즉, 자신도 백작처럼 의식 없이 누워 있게 되는 날이 머지않았다는 거다.

문제는 성녀가 된 이상 크루커스를 안 쓸 수가 없단 거다. 매일 성수를 뽑아내어 병든 이들을 도와야만 했다.

그것이 성녀의 역할이었고 자신이 성녀이기에 신전은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었다.

‘도망갈까?’

하지만 어떻게?

신전은 에스타리온 백작가와 비교할 수 없이 경비가 삼엄했다.

설사 도망가더라도 신전은 사람을 보내 자신을 찾을 거다.

신전의 비호가 사라지면 에스타리온 백작가에서 자신을 잡아 가만두지 않을 게 뻔하고…….

“어쩌면 좋아. 당장 오후에도 크루커스를 사용해야만 하는데…….”

몸이 아프다고 거짓말을 할까. 아니면 낮에 셀레나가 협박하고 가서 더는 크루커스를 사용하지 못하겠다고 잡아뗄까.

시에나는 한창 고민을 하다가 크루커스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산산조각을 내서 다시는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들 셈이었다.

실수로 귀중한 성물을 깨트렸으니 스스로 성녀 자리에서 내려오겠다며 자연히 자리에서 물러나, 성녀로 남되 더는 성수를 만들어 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크루커스는 깨어지지 않았다. 두터운 도자기라서 그런 걸까.

시에나는 크루커스를 안아 들어 온 힘을 다해 벽에다 내던졌다.

크루커스는 텅, 하고 보통의 도기에선 나오기 힘든 소리를 내더니 바닥에 툭 떨어졌다.

부서지긴커녕 금 하나 가지 않았다. 흠집조차 나지 않는 모습에 시에나는 무언가 잘못되어가는 걸 깨달았다.

“이, 이게 왜 이래…….”

불안으로 인해 겁에 질린 시에나는 의자를 끌어와서 크루커스에 휘둘렀다. 의자를 사용해 온 힘을 다해 크루커스에 휘두를수록 부딪치는 의자 표면만 닳아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인 상황이다. 시에나는 의자를 버려둔 채 손을 떨었다.

이제까지 자신을 구렁텅이에서 구해 준 줄로만 알았던 성물이 악마의 호리병처럼 느껴졌다.

시에나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가슴 속에서 거대한 두려움이 넘실거렸다.

‘이대로 여기에 있다간 죽을 거야.’

크루커스의 정체가 알려지면 신전에서 문제 삼을 테고, 정체가 알려지지 않으면 크루커스를 사용하다가 의식 없이 쓰러지게 될 거다.

“어쩌면 좋아. 어쩌면 좋냔 말이야…….”

시에나는 터져 나오는 신경질을 이기지 못해서 애꿎은 책상을 발로 찼다.

크루커스가 부서지지 않는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해야 할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신경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머리를 굴려도 수가 나오지 않아서, 시에나는 신관에게 가 현재 신전과 황실의 분위기를 떠보기로 했다.

그녀는 곧장 자신을 담당하는 신관의 집무실로 향했다.

문을 노크하기도 전, 문 너머로 격양된 말소리가 들려왔다.

“에스타리온 백작이 그간의 일을 폭로했습니다. 이 일을 어쩐답니까?”

“성녀님이 크루커스를 가지고 나타났을 때 백작가와 척을 진 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가끔 의문이 듭니다. 이런 일을 감수할 만큼 성녀님이 중요한 사람인지.”

“알버트!”

“아니, 그렇잖습니까? 납치범의 딸이자 사기꾼이라지 않습니까? 성녀님을 받아들인 뒤에야 그 사실을 알아 우리끼리 조용히 묻고 넘어갔지만 처음부터 알았다면 성녀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크루커스입니다, 크루커스! 그리고 요즘 백성들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잘 아시잖습니까?”

“그 때문에 황실에서 레이온 제약을 전폭적으로 밀어주게 되었으니, 저는 좋은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황실과의 대립이 나날이 심해지잖습니까. 이게 다 성녀님 때문입니다.”

대화를 듣던 시에나는 마른침을 삼킨 채 제 방으로 돌아왔다.

도망칠 수도, 그렇다고 진실을 털어놓을 수도 없다. 진퇴양난이었다.

시에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처음으로 에스타리온 백작가에 나타난 게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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