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성녀에게 불경한 행동을 하면 안 되지.”
“…….”
“그러니 이 손 떼.”
시에나는 서늘한 음성으로 명령했고 나는 멱살을 잡은 손에서 힘을 뺐다. 그녀는 켁켁거리며 숨을 골랐다.
“오늘 하루만 봐주는 거야. 그래도 우린 자매니까.”
“자매?”
“아. 이젠 아닌가. 넌 더 이상 에스타리온이 아니니.”
“…뭔가 오해하는 모양인데. 내가 널 놓아준 건 네가 성녀여서도, 너를 두려워해서도 아냐. 그저.”
찰싹. 시에나의 뺨이 힘을 못 이겨서 옆으로 돌아갔다.
시에나는 놀라서 하얗게 질린 채 나를 휙 돌아보았다.
그 순간 다른 쪽 뺨을 내리쳤다.
단순히 뺨을 때린 게 아니라 후려갈기듯 퍽하는 소리가 났다.
“제대로 된 체벌이 필요해서지.”
“너, 너, 너… 너 미쳤어?”
“미친 건 너겠지. 내가 뭘 할 줄 알고 날 건드렸니? 내가 기억을 되찾았는데 네가 성녀가 된들 무사할 줄 알아? 혹시 오래된 일이라 증거나 없으니 괜찮을 거라고 믿은 건 아니지?”
시에나가 두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갖은 풍파를 겪었더니 그런 눈빛 따윈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런. 정말로 그런 거였어?”
“즈, 증거 같은 건 없어! 헛소리하지 마.”
“증거는 없어도 증인은 있지.”
“무슨… 아…….”
시에나의 눈에서 일렁이는 두려움을 보았다.
그녀는 입을 뻐끔거릴 뿐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에이든이 시에나와 마주친 적이 있다더니 이제야 그가 떠오른 모양이다.
시에나가 창백하게 질려서 잘게 어깨를 떠는 걸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고작 이 정도로 두려워할 거면서 내 삶을 망치려 했다니.
“그냥 얌전히 진짜인 척 살지 그랬어. 그랬으면 다들 속아 넘어가서 평생 에스타리온 백작가의 딸로 살았을 텐데.”
“나, 난 그냥… 셀레나. 그, 그게. …누가, 누가 믿어! 고작 노예 말을 누가 믿느냔 말이야! 난 성녀야! 성녀라고!”
“살인자의 딸이겠지. 아참, 크루커스를 훔친 건 아주 잘한 선택이었어.”
내 칭찬에 시에나는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다.
내가 알기로 그녀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크루커스를 사용하는 중이었다.
에스타리온 백작이 보름에 한 번 사용한 것과 비교한다면 그녀의 생명력도 금방 한계가 보일 테다.
나는 시에나가 백작처럼 되길 바라지 않는다.
그녀는 정신이 온전한 채 이단심문소에도 들어가야 하고 마땅히 치뤄야 할 벌을 받아야만 한다.
“에스타리온 백작이 크루커스 때문에 생명력을 빼앗긴 걸 모르나 봐? 의식도 없이 누워 있게 된 지 꽤 오래됐는데.”
크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아하니 아직도 소식을 모르는 모양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에나를 위해 친절히 설명해 주기로 했다.
“크루커스 말이야. 실은 성물이 아니었어.”
“이,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시전자의 생명력을 뽑아내 성수와 같은 효과를 내게 만드는 마법 물품이었나 봐. 에스타리온 백작이 한 달에 두 번 사용했으니 네게 남은 시간은…….”
시에나를 위아래로 훑어 주었다. 그녀는 이제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이 덜덜 떨기 시작했다.
“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유감이야.”
“거짓말이지?”
“불안하면 직접 확인해 보든지.”
“…난 네 말 안 믿어. 이단심문소까지 다녀온 사람 말을 어떻게 믿어.”
“믿건 안 믿건 네 선택이겠지.”
이만하면 경고도, 위협도 충분히 됐으리라.
성녀인 척하는 이상 크루커스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아도 매일 성수를 만들어 내야 할 테다. 그 순간순간마다 얼마나 불안에 떨지 눈에 선하다.
크루커스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것으로도 제 입지를 깎아 먹고 문제가 될 테지.
어떤 식으로든 시에나는 앞으로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낼 게 뻔하다.
“그럼 다시 만나는 날까지 잘 지내도록 해. 부디 무사하길 빌게.”
곧 죽을 사람처럼 하얗게 질린 시에나를 남겨두고 뒤돌아 신전을 나왔다.
또각. 또각. 구둣발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제발 시에나가 무사하면 좋겠다. 이단심문소에서 피를 토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 * *
신전에 들렀다가 집에 돌아오니 어느새 늦은 저녁이 되었다.
마침 에바도 저녁을 먹지 않은 상황이라 둘이서 간소하게 식사 거리를 만들어서 식사를 했다.
에이든은 검술 대회가 끝날 때까지 황궁에 머물러야 해서 집에는 나와 고용인들뿐이었다.
“잭슨이 내색은 안 해도 되게 긴장한 것 같아요. 공작님께서 황궁에 출입할 수 있게 손을 써 주겠노라 할 때 응했으면 좋을 텐데 괜한 고집을 부린 것 같아요.”
“결승전 경기 때 잭슨을 꼭 데려가야겠네요.”
나는 에이든이 우승할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우승하길 바란다.
황실 포상이니 귀족 사회의 인정이니 하는 것들을 떠나서, 그냥 에이든이 좋은 성취를 보이면 좋겠다.
에이든이 하는 모든 것들이 잘 풀리길 바라고 그가 염원하는 것들이 이뤄지길 바란다.
“참. 에바. 베키가 없으니 쓸쓸하진 않아요?”
“조금요. 하지만 나쁜 일도 아니고 좋은 일 때문에 일을 관둔 거잖아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베키니 응원해 줘야죠.”
베키를 응원해 주는 마음이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에바가 신경 쓰였다.
정보 길드를 이용해서 부모님을 찾기 위해 고리대금업자까지 찾아갈 정도였는데 아직 에바에겐 다른 소식이 없었다.
“에바. 우리 제약의 유통망을 통해서 전단지를 병원에 뿌릴 수도 있어요. 말하자면 범죄자 수배지처럼 부모님을 수배하는 거죠. 병원에 한 장씩만 걸어놔도 많은 사람이 보게 될 거예요. 무엇보다 병원에 가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 좋은 방법 같은데… 어때요?”
“네? 괜히 저 때문에 그러시지 않아도 돼요. 그랬다간 회사 이미지가 나빠질 거예요.”
“그럴 리가요. 그냥 병원에 실종아동이 부모님을 찾는다는 사실을 걸어두는 것뿐인걸요.”
“그러면… 부탁드릴게요.”
“좋아요. 전단지는 에바가 예전에 쓰던 걸로 할게요.”
저녁 식사 시간은 훈훈하게 끝났다. 식사를 마친 뒤 에바는 전단지가 남았는지 확인하겠다며 곧장 방으로 돌아갔고 나는 나대로 씻고 나왔다.
책상 위에는 낮에 에이든에게서 온 편지가 놓여 있었다. 내용을 확인하자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오늘 맞붙은 상대를 어떻게 이겼는지 시시콜콜 적혀 있었는데 아직 어린아이 같은 글씨 때문인지 에이든이 소년처럼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했을 때 분위기가 안 좋았는데 당시 상황은 까마득하게 잊은 지 오래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결승 경기는 보러 가겠노라 답장한 뒤,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나침반을 확인했다.
“피를 뿌리라고?”
긴가민가하는 마음으로 바늘을 찾아 손끝을 찔렀다.
붉은 피가 방울지며 나침반 바늘 끝에 툭툭 떨어졌다.
대신관이 신성력을 불어넣었을 때와 달리 나침반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평소처럼 고장 난 듯 빙글빙글 돌아갈 뿐이다.
“역시… 신관도 성기사도 아닌 내게 신성력이 있을 리가 없지.”
기대가 없었기 때문인지 실망도 들지 않았다. 담담하게 수건으로 바늘을 닦으려는 때였다.
“…아…….”
바늘 끝에서부터 빛무리가 모이더니 좌우로 왔다갔다하며 돌았다. 다른 쪽 바늘도 마찬가지였다.
두 바늘은 교차되었다가 각자 희한한 방향으로 빙빙 돌기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툭하고 멈췄다.
그러자 빛무리가 잦아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바늘 끝엔 빛이 휘감겨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곤혹스러울 정도로 당황했다.
나침반이 작동했다. 내게 신성력이 있었던 걸까?
어쩔 줄을 몰라 나침반 뚜껑을 닫았다. 그럼에도 빛무리나 고정된 바늘 방향은 유효했다.
“대신관이 잘못 안 걸 수도 있어. 피만 있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걸 거야.”
내게 신성력이 있는 것보단 그쪽이 더 믿을 만하다.
다시 나침반 뚜껑을 열어 바늘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그러자 나침반이 본래대로 돌아갔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에바의 방으로 갔다. 똑똑. 노크를 하자 잠옷을 입은 에바가 나를 맞이했다.
“에바. 늦은 시간에 미안해요. 잠시, 뭣 좀 도와줄 수 있을까요?”
“무슨 일이에요?”
내 방문에 에바는 큰일이 난 줄 알고 얼른 나를 안으로 들였다. 그녀에게 나침반을 보여 주며 상황을 설명했다.
“정말 빛이 났다고요? 이게 정말 성물이라면 제게도 반응하면 좋겠어요.”
에바는 그렇게 말하며 손끝을 찔렀다. 핏방울이 바늘 끝에 떨어졌지만 나침반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십여 분이 지나도 정신없이 돌기만 하자 에바의 피를 닦아 내고 내 피를 뿌렸다. 그러자 다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신이시여, 맙소사. 세상에…….”
에바가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가 벌떡 일어나더니 격양된 어조로 주장했다.
“셀레나 씨는 성녀일지도 몰라요!”
“아니에요. 뭔가, 뭔가 잘못된 걸 수도 있어요. 에스타리온 백작가의 혈통에 어떤 힘이 있는 걸 수도 있고요.”
“아무리 백작가 사람이라고 해도 아무나 이렇게 빛을 내지 못할 거예요.”
손바닥 아래 가슴이 세차게 울렸다.
내게 신성력이 있다는 게 인정되면 이 바늘을 이용해서 이단을 감별할 수도 있다.
그렇게만 되면 시에나는…….
“셀레나 씨? 셀레나 씨!”
“아. 네. 에바.”
“신전엔 언제 가 보실 거예요? 얼른 신전에 가 봐요!”
“조만간 가야죠. 아… 이게 꿈은 아니겠죠?”
“절대 아니에요. 셀레나 씨. 신성력이 있다는 게 보통 일인가요?”
맞다. 신성력이 있다는 건 성기사가 될 자격이 있단 거다.
지금 상황이 얼떨떨한데 바보처럼 웃음이 새어 나왔다.
검술 대회는 일주일 뒤면 마무리된다.
그때가 되면 황태자도 나도 제대로 된 반격을 시작할 예정인데 때맞춰서 나침반이 작동한다.
‘이건 기회야.’
신전을 제대로 치기 위해서라도 일주일 안에 신성력에 대한 확인을 받아야겠다.
“에바. 늦은 시간에 도와줘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덕분에 신기한 구경도 하고 정말 좋았어요!”
흥분한 에바는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신전에 가 보라며 잔소리를 했고 나는 웃으며 내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눕기 직전, 마지막으로 나침반을 확인했다. 이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에 무엇이 있을까.
그게 크루커스인지 다른 무언가인지 모르지만 확신할 수 있는 건 시에나는 이 나침반 때문에 몰락하게 될 거란 거다.
‘넌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해.’
거짓을 속삭여 나를 나락에 떨어트렸듯이 시에나는 자신이 쌓아 올린 거짓말에 똑같이 나락에 떨어지게 될 거다. 내가 그리 만들 테고 예외란 없다.
‘그러니 그때까지 제발 건강하게 지내.’
언제 거짓이 드러날지 몰라 전전긍긍하길.
크루커스 때문에 언제 쓰러질지 몰라 불안에 떨기를.
나는 존 콕스에게 고마워서라도 베키의 결혼선물을 제대로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