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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86화 (87/134)

<86>

제법 고위급 사제가 나올 줄은 알았지만 그게 대신관일 줄은 몰랐다. 당황한 기색을 숨긴 채 대신관에게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셨나요?”

“덕분에요. 앉으세요. 셀레나 양.”

대신관은 사람 좋은 얼굴로 나를 맞아 주었다.

“찾아오신 이유가 유물 감정 때문이라고요?”

“아, 네.”

품에서 손수건에 곱게 싼 나침반을 꺼냈다. 나침반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대신관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가 숨을 들이켜더니 조심스레 나침반을 들어 확인했다.

단순히 살펴보는 것만이 아니라 밝은 곳에서 각인을 살피고 신성력을 불어넣기까지 했다.

“아직 작동하는군요.”

대신관이 신성력을 불어넣자 나침반 바늘이 미친 듯이 뱅글뱅글 돌았다.

하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바늘이 힘없이 멈추자 대신관이 설명했다.

“성기사들만 쓸 수 있도록 만들어져서 제 신성력에는 오래도록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은… 그 나침반이 진짜 신성 시대의 유물이란 건가요?”

“최소한 500년은 된 것 같군요. 제국의 건국 전후로 만들어진 듯합니다. 교회사에 비추어 봤을 때 아주 의미 있는 유물이죠.”

“세상에… 혹시 감정서를 써 줄 수 있으실까요?”

“물론입니다. 이만한 보물을 감정할 수 있다니, 사제로서 정말 영광이로군요.”

대신관은 흔쾌히 감정서를 써 주었다. 자리에서 바로 감정서를 써 줄 거라곤 생각하지 못해서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삿된 기운을 찾아내는 물건이라 들었는데 제대로 작동하면 어떻게 읽어내나요?”

“바늘에 신성이 깃들면 빛이 나며 돌아갈 겁니다. 이단의 기운을 감지해 내면 북쪽을 가리키는 빨간 바늘이 그 방향을 향해 멈추지요. 남쪽을 가리키는 파란 바늘은 기운이 얼마나 가까이에 있는지 설명해 줍니다.”

“어떻게요? 나침반은 거리를 설명하는 물건이 아니잖아요.”

“시계의 시침이라고 보시면 된답니다. 숫자가 커질수록 거리가 가까워지죠. 가장 가까워지면… 자정을 알리는 시계처럼 두 바늘이 겹쳐진다고 배웠던 기억이 나는군요.”

그러고 보니 이 나침반은 바늘이 두 개였다. 길쭉한 바늘 하나로 북쪽과 남쪽을 구분하는게 평범한 나침반이라 옛날엔 다른 방식으로 방향을 구분했나보다 했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성기사와 신관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건가요? 대신관님이 사용할 수 없는 유물이라니 조금 의아해요.”

“모든 신관들은 서품을 받는 것과 동시에 신성력이 부여됩니다만 성기사들은 예외적이죠. 그들은 서품을 받지 않아도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존재입니다.”

“서품을 받지 않아도요? 그래서 성기사들이 드물었던 건가요?”

“예. 성기사에 지원할 수 있는 이들이 드문데다 신관들 못잖은 학식과 단련한 육체를 지녀야 하는 만큼 성기사가 되기란 아주 힘들 수밖에 없죠. 그러니 현대에 이르러선 이름뿐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성기사와 신관 사이에 이러한 차이가 있는 줄은 몰랐다. 존 콕스는 일반인이 신성력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아무리 초대 에스타리온 백작이 성기사였다고 한들 그 힘이 내게도 이어졌으리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그는 500년 전 사람이고 난 그의 얼굴조차 모르는데…….

“제가 이걸 쓸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 걸까요?”

“자매님께 신성력이 잠재되어 있다면 쓸 수 있겠죠. 하지만 보통의 사람들에겐 신성력이 없답니다. 만약 있다고 해도 신성력을 접하지 않은 이가 힘을 발휘하기란 힘든 일이죠.”

“그럼… 신성력을 불어넣는 것 이외에 다른 사용 방법은 없는 건가요?”

“다른 방법이…….”

대신관은 한참 동안 골똘히 생각하더니 손가락을 딱 치며 대답했다.

“한 가지 있긴 하군요! 혈액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성기사 본인의 혈액을 나침반의 바늘 끝에 뿌리면 신성력을 불어넣지 않아도 작동한다고 들었죠.”

성기사가 아닌 내가 혈액을 뿌려도 작동될까?

집에 가면 한 번 시도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나침반을 품에 넣으려는데 대신관이 황급히 말을 건넸다.

“자매님. 혹시 개인 소장품인 걸까요? 아니면 가문의 것?”

“개인 소장품이에요.”

“오… 그렇다면 혹시 신전에서 보관하는 건 어떨까요? 워낙 오래되어 잘 관리해 주어야 하는데다 신전에도 의미가 깊은 물건이다 보니 저를 비롯한 다른 사제분들이 돌아가며 관리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데.”

말이 보관이지 한 번 신전의 소유로 떨어지면 돌려받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려울 게 뻔하다.

사실상 기부하란 걸 돌려 말하는 거라 표정 관리에 소홀했다면 헛웃음이 튀어나왔을 거다.

“선물 받은 물품이다 보니 의미가 깊어서 늘 곁에 두고 보고 싶어요. 죄송해요. 대신관님.”

“선물이요?”

대신관의 기색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뉘앙스를 내비쳤다.

“출처가 어딘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오늘 감정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대신관이 나침반에 눈독을 들이는 것 같아서 적당히 상황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그가 희한한 소리를 하기 전까진.

“혹시, 납치 당시를 기억하는지요?”

“네?”

질문하는 대신관은 아주 심각하고 엄중해 보였다.

그가 풍기는 묘한 분위기 때문에 어딘가 오싹하기까지 했다.

“셀레나 양이 레이온이 아닌 에스타리온이던 때에 납치를 당하고 돌아온 뒤, 당시를 기억하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늘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죠.”

대신관이 이 이야기를 꺼낸 의도를 모르겠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른 척 말했다.

“신전 측에서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 신전은 정신적인 문제까지는 도움을 드릴 수가 없군요.”

“아…….”

나는 뜸을 들이다가 일부러 한 가지 말을 던져 보았다.

그가 내 일에 신경 쓰는 이유를 알기 위함이었다.

“기억나는 게 한 가지 있어요.”

“무엇…인가요?”

대신관의 얼굴이 어딘가 창백하게 질린 것 같다면 그건 내 착각일까.

하긴. 납치범의 딸을 성녀라 공표했으니 예민할 수밖에 없을 거다.

“공범과 그 딸의 얼굴이요.”

“공범과… 딸이요?”

내 의도와 달리 대신관은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그 반응에 조금 황당해진 건 내 쪽이다.

“네. 제게 엄마라 부르도록 강요한 여자와 그 딸이요. 딸은 저와 나이가 비슷했죠. 이름이… 시에라라고 불렸던 걸로 알아요.”

“시에라요?”

“네.”

대신관은 그 시에나가 성녀 시에나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지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대신관을 어설프게 건드려 봐야 좋을 게 없어서 대화를 마무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무튼 오늘 이렇게 시간 내어서 봐 주셔서 감사드려요.”

“아, 예. 자매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빕니다.”

인사를 나누고 나오자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신전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복도에 난 창문으로 확인하자 신자들이 몰려와 있는 게 보였다.

“성녀님! 성녀님이시다!”

아. 시에나가 와 있는 모양이다.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시에나가 진짜 성녀라고 한들 그녀는 사기꾼이자 납치범의 딸이었다.

그녀는 제 잘못에 대해 사과하거나 뉘우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내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고 성녀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저런 저질스러운 사람에게 무릎 꿇도록 한 시온이 저주스러울 정도다.

그래서인지 복도에서 시에나와 마주친 게 운명처럼 느껴졌다.

도망칠 데라곤 없는 곳에서, 그녀는 두 명의 신관을 거닐고 있었다.

“셀레나. 오랜만이야.”

시에나는 우리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가증스러운 태도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어 버렸다.

그녀는 자신을 따라온 신관들에게 말했다.

“먼저 가 보세요. 전 조금 있다가 따라갈게요.”

그렇게 말하는 시에나는 신전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처럼 보였다.

신관들이 떠나고 나자 시에나가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분에 넘치는 자리에 앉아 있구나.”

“내가?”

시에나는 내 말이 어처구니가 없단 양 허, 하고 웃었다.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저렇게 편한 얼굴을 하고 있지 못 하겠지.

아. 양심도 도덕도 없으니 내게 그런 짓을 한 건가.

“넌 그래선 안 되는 거였어.”

“뭐가 말이니?”

“내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

시에나는 입을 꾹 다물었고 나는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작게 뒷걸음질을 쳤다.

느릿하게 손을 들자 시에나의 어깨가 작게 움질거렸다.

나는 그 손으로 그녀를 때리는 대신 볼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었다.

그러자 시에나는 복잡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대체 뭘 믿고 이런 짓을 벌인 거니?”

앞으로 네가 어떤 처지가 될 줄 알고. 나도 황태자도 너를 가만히 둘 생각이 없는데.

찰싹. 시에나가 제 볼가에 머문 내 손을 쳐냈다. 성난 눈빛에 비웃음이 비죽 새어 나왔다.

“헛소리하지 마. 이런 짓이라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난 그냥 성녀여서 성녀가 되었을 뿐이야. 혹시 신성에 의문을 품는 거야? 또 이단심문소에 들어가고 싶은 거니? 그래?”

“감히.”

시에나의 멱살을 잡아 벽으로 내몰았다.

그녀가 나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순순히 비켜 주지 않았다.

오히려 내 쪽에서 멱살을 붙들었다.

“감히 내 앞에서 그딴 말을 지껄이다니.”

“난 성녀야. 성녀는 백성들을 굽어살피는 동시에 이단을 경계해야 하니까.”

시에나는 호흡이 힘든 와중에도 곱게 눈을 접어 나를 약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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