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85화 (86/134)

<85>

Chapter 7. 크루커스

하지 않던 행동을 하는 에이든이 낯설었다.

“무슨 일 있었어?”

에이든의 마른 뺨이 움찔거렸다. 얼굴이 흐려지더니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염려되는 마음에 에이든의 두 손을 붙잡고 물었다.

“무슨 일이야.”

내 물음에 에이든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가 소리 없이 입을 뻐끔거리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난 네가 황태자와 너무 가까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왜? 그가 내 약혼자여서 그래? 아니면 날 조롱했던 사람이라서?”

“그 두 가지도 이유가 된다면 되겠지만…….”

에이든은 말을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중요한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침묵하려고 하자 속이 갑갑해져 왔다.

“대체 그 자식의 어디를 믿고 손을 잡는 거야.”

“믿음이 중요한 게 아냐. 서로 무얼 주고받을 수 있느냐가 중요하지.”

“내가 힘이 있었으면 그 자식과 힘을 합칠 필요는 없었겠지. 셀레나, 황태자는 네 상상 이상으로 양아치야. 잘나빠진 행동 아래 숨긴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넌 모를 거야.”

“황태자가 뭘 숨겼는데 그래?”

“모든 것. 모든 걸 숨겼어.”

“얼버무리지 말고 자세히 말해.”

내 요구에 에이든은 고개를 내저었다. 어중간한 조언은 속만 불편하게 할 뿐인데.

“황태자와 손을 잡기로 했단 편지 봤어. 보려고 본 건 아니고 어쩌다가. 필요한 게 있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내게 말해도 됐잖아.”

“네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고 황실이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어. 그러니 그런 생각하지 마.”

“난 네가 황태자를 가까이하지 않으면 좋겠어. 이건 진심이야.”

“황태자가 어떤 사람인지 나라고 모르는 것 아냐. 너야말로 황태자와 함께 일하는 이유가 뭐야? 나한텐 황태자를 멀리하라면서 넌 괜찮단 거야?”

에이든의 얼굴에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빛이 번져 나갔다.

실망과 자괴감 따위가 복잡하게 엉킨 표정에 내가 실언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한참 말을 망설이다가 어렵사리 고백했다.

“…성배를 찾는 일을 맡게 됐어.”

“뭐?”

순간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서 에이든이 한 말을 복기했다.

성배를 찾는다고? 에이든이?

황태자가 그에게 이런 일을 맡긴 것도 믿기지 않는데 이제 와 성배를 찾으려는 것도 이상했다.

황태자는 신전을 멀리하려는 줄 알았는데.

“검술 대회가 끝나면 어떤 고고학자 자식이랑 성배를 추적할 예정이야. 제국이 성기사들에 의해 세워진 만큼 성배를 찾아서 황실의 권위를 높일 생각인 듯해.”

“아…….”

황태자는 이미 크루커스가 성물이 아니라고 확신하는 게 분명하다.

성배를 찾는 일이야 칠 년 전부터 시작한 일이지만 그걸 에이든에게까지 맡기는 건…….

‘신전에서도 오랫동안 추적해 왔겠지.’

다른 것도 아니고 성배다. 건국과 동시에 자취를 감춘 성물인 만큼 신전 측에서도 손 놓고 있진 않았을 거다.

특히 진통제의 등장으로 유례없이 위기를 맞이했으니 물 밑에서 아주 치열한 경쟁 중일 터.

에이든이 긴긴 한숨을 내뱉더니 생각에 빠진 내게 말했다.

“식사부터 해. 난 입맛이 없어서 나중에 먹을게.”

에이든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손을 휘휘 내젓는 게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는 모양새라 그럴 수 없었다.

서재를 떠나는 에이든의 뒷모습이 지독하게 쓸쓸해 보여 마음이 무거웠다.

* * *

[네가 오늘 대련 상대를 손쉽게 이길 거란 거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응원하고 싶어서. 잘하고 와.]

에이든은 셀레나가 남기고 간 쪽지를 확인하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셀레나는 레이온 제약의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아침 일찍 출근하기 일쑤였다.

셀레나가 일이 많음에도 야근 대신 새벽 출근을 택하는 건, 자신이 퇴근하지 않으면 직원들도 편히 퇴근을 못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서류를 집에 가져와서 새벽까지 보고 자는 일이 있어도 퇴근만큼은 제시간에 하려고 노력했다.

에이든은 그게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적어도 저녁엔 셀레나의 얼굴을 맘껏 볼 수 있단 뜻이니까.

그는 쪽지를 서랍 속에 고이 넣어두었다. 서랍 안은 텅 비어 있다시피 했지만 안쪽의 잘 보이지 않는 곳엔 아주 중요한 편지 한 장이 보관되어 있었다.

[…가 마차를 준비해 뒀으니 앞서 말한 시일에 맞춰 배를 타고 떠나게. 자네가 붙잡히면 나뿐만 아니라 내게 일을 맡긴… 도 위험해지니…….]

편지는 오래되어 끝이 바래고 얼룩이 졌지만 글을 읽는 데 문제는 없었다.

에이든은 이 편지를 구하기 위해 아주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 그가 공작이 되자마자 한 일 중 하나라고 봐도 좋았다.

셀레나를 납치한 사내의 집을 뒤져 입수한 범행 증거이자 배후를 밝히는 열쇠였으니까.

그는 편지에 잠시 눈길을 주었다가 서랍을 닫고 열쇠로 잠그기까지 했다. 편지도 쪽지도 잃어버려선 안 되는 중요한 물건이었다.

황궁으로 가는 내내 에이든은 지금 상황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했다.

셀레나는 황태자와 손을 잡았고 자신은 황태자의 아래에서 성배란 물건을 찾게 되었다.

사실 황태자와 일을 하려는 건 계획에 없었다.

셀레나와 황태자가 편지를 주고받던 걸 보게 된 뒤 충동적으로 결정 내린 거였다.

‘셀레나. 넌 나를 몰라.’

누군가 노예로 지내는 삶이 어떻냐고 묻는다면 살아남기 위해 아귀처럼 발악하는 삶이라고 대답해 줄 테다.

밑바닥 인생은 누구보다 치열해야 했고 끔찍하리만치 저급했다.

그렇게 살면서 그는 교활하고 이기적인 놈으로 자랐다. 그런 그가 살면서 갖고 싶은 유일한 빛이 셀레나였다.

과거, 이네트 옆에 있으면 노예 새끼가 아닌 평범한 자유민이 된 것 같았다.

그 애가 준 꿈처럼 달콤했던 순간은 이네트를 탈출시킨 뒤 다시 노예로 팔렸던 에이든에게 보잘것없던 삶을 지탱시켜 주던 기둥이었다.

그녀는 무엇 하나 제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는 게 없던 노예가 태어나 제 생명마저 걸어가며 지켜 낸 어떤 ‘가치’였다.

노예 새끼 목숨엔 한 푼의 가치도 없지만 셀레나는 달랐다.

셀레나는 영롱하게 빛나는 보석인 데 반해, 그는 영웅이니 귀족이니 하며 잘 포장되어 봤자 결국 노예 놈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는 바로 제 곁에 있는 셀레나를 놓치기 싫었다.

절대로, 절대로 누구에게도 주지 않을 거다.

‘네게 있어서 나는 비열할 수밖에 없어.’

셀레나에게 가정교사를 운운하며 다가간 건 비겁한 행동이지만 제겐 그 방법밖에 없었다.

그녀가 곁에 있으니 더 오랫동안 함께하고 싶었다.

자신을 봐 주면 좋겠고 제게만 미소를 보여 주길 바랐다. 마음을 얻고 싶고 닿고 싶고…….

셀레나는 복수심 때문에 황태자가 자신을 어떤 눈으로 보는지 모르지만 같은 남자에겐 너무도 잘 보였다.

그 눈은 남자의 눈이었다. 그래서 애가 타고 겁이 났다.

황태자는 그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신분도, 혈통도, 배움도, 행동거지도… 무엇 하나 황태자보다 더 나은 점이 없었다. 그가 기댈 곳이라곤 셀레나의 복수심밖에 없는 게 비참했다.

황태자를 용서하지 않더라도 필요하다면 둘이 전략적인 약혼을 할 수도 있는 게 정쟁 아니던가? 그런 생각이 들자 머리에 벼락이 쳤다.

그래서 제 세력을 키우고자 잠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다.

여차하면 황태자의 목을 물어뜯을 수도 있고, 약점이 있다면 셀레나에게 건네줄 수도 있다.

자존심이 상해도 좋다. 무시당해도 괜찮다. 그저, 그저 셀레나가 황태자에게 돌아가지만 않으면 좋겠다.

‘난 네가 복수를 위해 날 버릴까 봐 겁이 나. 그리고…….’

자신 때문에 셀레나까지 못난 취급을 받을까 봐 염려되었다.

황궁에 출입하다 보면 싫어도 듣게 되는 말이 많다.

지난 무도회 때 그들이 함께하는 걸 보인 뒤로 셀레나를 두고 혀를 차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억울하게 이단심문소에 다녀온 이후 인생을 막 살기로 했나 봐요. 노예 출신과 어울리다니.’

‘어쩌면 원래 질이 나쁜 사람이었는지도 모르죠. 그러니 오해를 사서 이단심문소에 간 것 아니겠어요?’

자신이 들었던 말을 떠올린 에이든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천한 놈이라고 해서 셀레나까지 천한 대접을 받으면 안 된다.

셀레나가 제 옆에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이 그녀 옆에 있는 건데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제게 더 큰 힘이 있다면 셀레나가 그런 취급을 받을 필요가 없을 테다. 더 인정받으면, 더 알려지면…….

에이든은 눈을 질끈 감고는 감정을 갈무리했다. 다시 한번 굳은 다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마차가 멈추었다. 황궁에 도착한 것이다.

검술 대회에 내걸린 수많은 것들 때문에 지난 몇 달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훈련해 왔다.

그는 오늘도, 내일도. 종례엔 결승에서까지 모두 이길 것이다. 우승자가 되어 여론도, 상황도 모두 뒤집을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모든 게 원활하게 진행되리라.

* * *

새벽부터 출근해 잠시도 쉬지 않고 업무를 처리하자 점심시간이 되었다.

식사는 거르고 잠시 짬을 내어 신전에 들렀다. 신전에서 제대로 나침반을 확인받기 위해서다.

존 콕스가 내게 나침반을 사용하는 법을 알려 주지 않아 그 또한 신전 측에 물을 생각이다.

사제들과의 개인 면담을 요청하기 위해 신전 직원에게 가자 그녀가 나를 알아보았다.

에스타리온 백작가에 지내던 때에 자주 신전을 드나들어 자연히 안면을 트게 된 사이였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방문하시는군요.”

“신관님께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요. 이단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하시는 사제분이면 좋겠는데…….”

“무슨 일인가요?”

이단이란 단어에 직원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나는 웃으며 긴장한 그녀를 안심시켰다.

“성기사 분들이 쓰던 유물을 발견해서요. 제대로 감정받고 싶은 것뿐이에요.”

“유물이라니!”

그녀는 조금 감동한 듯 탄성을 내질렀다.

“아무래도 초대 에스타리온 백작님이 성기사 출신이라 유물이 많겠네요! 바로 사제님과 연결해드릴게요. 3호실에 들어가서 기다리고 계세요!”

“고마워요.”

인사를 한 뒤 곧장 3호실로 들어갔다. 오래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신관을 확인한 나는 헙하고 숨을 삼켰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나왔기 때문이다.

내게 배정된 신관이 일반 평신관이 아니라 대신관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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