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손님이 황태자인 걸 알게 된 알버트는 입을 쩍 벌렸다.
“화, 화,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저희 직원이에요.”
“그랬군.”
황태자가 만나서 반갑다며 인사를 건네자, 알버트는 얼굴이 벌게져선 어쩔 줄 몰랐다.
“알버트. 가서 일 봐요.”
“어, 어어. 네, 네! 그… 저는 그럼 근처 병원에 상품 납품하고 오겠습니다!”
가방을 챙겨 나가는 알버트의 팔다리가 삐걱거렸다.
오른팔과 오른 다리가 동시에 나가는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황태자의 시선이 그런 내게 닿자 얼른 미소를 지우고 그를 안으로 안내했다.
제집처럼 회의실에 앉은 황태자는 차분하게 내부를 훑었다.
나는 황태자에게 차를 건네곤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제국 전역에 진통제를 공급하려면 사무실이 지금보다 더 커야 할 거다.”
“그건 제 일이지 전하께서 신경 쓰실 부분은 아니에요. 본론만 말하도록 하죠.”
황태자와 손을 잡기로 한 건 지난번 그의 편지가 당도한 뒤였다.
그는 내게 아주 정중한 태도로 업무상 만남을 요청했다.
황태자의 요구에 응한 건 순전히 레이온 제약을 위해서였다.
지금 레이온 제약은 수도 전역의 약방 및 병원에 물품을 납품하고 있다.
지방에도 입소문이 나 하루하루 사업이 확장되는 중인데, 이럴 때일수록 회사에 체계를 가지고 제대로 내실을 다져야만 했다. 채용 공고를 낸 것도 그래서다.
레이온 제약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이때에 황태자와 손을 잡으면 그에게 숟가락을 얹게 해 주는 것밖에 안 된다.
회사는 그가 없어도 순조롭게 성장할 테다. 상황이 바뀐 건 성녀가 나타나면서다.
‘성녀가 과거의 신성 시대를 재현시키고 있어.’
그때처럼 수많은 성인 성녀가 나타나 백성들을 구원하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의 의식은 과거로 회귀하게 된다.
성녀나 신관들이 만든 것들이야말로 진짜 치유의 힘을 지닌 것들이며 약은 흉내에 지나지 않는다고.
실제로 성녀가 나타나며 잠깐이지만 판매량이 주춤하기도 했다.
판매량이 회복된 뒤에도 사람들 사이에서 묘한 말이 나오는 걸로 안다.
‘성녀님이 계신데 이런 약을 먹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필요에 의해 구입하긴 하지만 마음 한편엔 내심 약물로 고통을 다스리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단 뜻이다.
아직은 조그만 기업이 사람들의 인식까지 바꿀 수는 없다. 이럴 때 이용하기 좋은 게 황실이었다.
“얼굴이 많이 좋아졌군.”
“기억을 찾은 덕분이에요.”
“그런 것치고 이전엔 기억을 감당하지 못했던 걸로 아는데.”
황태자의 시선이 예리했다. 나를 꿰뚫을 듯한 눈빛에서 약간의 호기심을 읽을 수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그 아이, 살아 있었어요.”
“그대 때문에 피 흘리며 죽었다는 노예 소년 말인가?”
의외란 듯 말하는 그에게 기분 좋게 털어놓았다.
“죽지 않고 살아서 모진 삶을 버텨 냈더라고요. 알고 보니 바로 곁에서 머물고 있었어요.”
“그게 누구지?”
“칼립소 공작님이요.”
황태자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그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그날 저를 살린 게 에이든이었어요.”
에이든이 살아남은 게 자랑스럽다. 그가 공작이 된 게 내 일이 아님에도 진심으로 기쁘다.
나와 달리 황태자는 떨떠름한 얼굴로 침묵했다.
전쟁터에서 등을 내맡긴 사이였을 텐데 둘은 썩 좋은 관계는 못 되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칼립소 공작의 집엔 언제까지 머물 생각이지? 미혼 남녀가 한집에 사는 건 보기 좋은 일이 아닐 텐데.”
“다른 이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아요. 이단심문소에 다녀왔단 낙인이 찍혔는데 더 이상 무슨 신경을 쓰겠어요.”
“그럼 계속 함께 지내겠단 의미인가?”
황태자의 턱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신경을 쓴들 그에겐 아무런 이득도 없는데 이 문제에 예민하게 구는 이유를 모르겠다.
옛 약혼녀에 대한 소유욕? 아니면 통제 욕구? 나를 먼저 버린 건 황태자다.
“전하께서 사생활에 관심이 있으신 줄은 몰랐어요.”
“…….”
“중요한 건 사생활이 아니라 신전을 견제할 방법 아닐까요?”
그에게서 나직한 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태연하게 차를 홀짝였다.
찻물이 아직 식지 않아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 앞서서 몸에 바짝 든 긴장을 풀어 주었다.
황태자는 어딘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시다. 내년 즈음 황위를 양위할 계획이라고 하니 신전을 견제할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할 터. 그러기 위해선 가장 먼저 성녀의 존재를 무너트려야겠지.”
“따로 생각해 둔 계획이 있으신가요?”
“성녀를 이단심문소에 보낼 생각이다.”
나도 모르게 볼가가 움찔거렸다. 황태자는 그런 내 모습을 확인하고도 못 본 척 말을 이어나갔다.
“시에나는 에스타리온 백작가의 피를 이었어요. 크루커스가 반응한 건 당연해요. 그런 시에나를 무슨 수로 이단심문소에 보낸다는 건가요?”
“그녀가 성수를 만드는 데 쓰는 크루커스가 성물이 아니라면 상황이 달라지겠지.”
“…크루커스가 성물이 아니라뇨?”
존 콕스에게 이미 들었던 이야기지만 황태자의 입에서 나온 건 또 다른 무게를 가지는 법이다.
모른 척 황태자에게 되묻자 그가 설명했다.
“크루커스는 성배를 본떠 만들어진 마법 물품이었고 얼마 전 그 증거를 발견해 냈다.”
“증거요?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요?”
“제국의 건국에 관한 기록서. 초대 황제와 초대 에스타리온 백작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었지. 나는 이 기록서를 가지고 신전에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다.”
“만약 그 기록서가 거짓이고 크루커스가 진짜 성물이라면 후폭풍이 거셀 거예요.”
“상관없다. 중요한 건 여론이니까.”
한마디로 신전과 황실에서 크루커스의 진실을 두고 다투는 동안 신전을 향한 백성들의 마음을 분열시키겠다는 의미다.
후에 크루커스가 진짜임이 밝혀지더라도 이미 얼룩질 대로 얼룩진 이미지를 원래대로 되돌리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진실보다는 흥미 위주의 이야기에 더 주목한다.
결국 황태자가 원하는 건 신전의 권위가 추락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성녀를 뒤흔들어야 하고.
“신전에선 레이온 제약을 짓밟기 위해 수를 쓰기 시작했더군.”
황태자가 품에서 조그만 종이를 꺼내 주었다. 오늘 자 신문을 스크랩한 거였다.
[과학은 신성을 허무로 만드는 무신론자들의 희망으로, 새로운 ‘악’이라 볼 수 있다.]
레이온 제약의 약물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을 이용해, 성분을 체취하고 비율과 농도, 제조방식을 정교하게 조절해 만든 현대 과학의 선물이다.
이미 신전에서 진통제와 마취제를 두고 이단이 아니라 공표했기에 번복하지는 못하니 이렇게라도 경계를 하는 거였다.
신실한 신자들은 신전의 말이라면 합리적인 판단 없이 믿을 테니, 성녀로 인해 신전의 입김이 거세질수록 레이온 제약을 향한 거부감도 커질 게 뻔하다.
하지만 진통제의 효과를 본 이들이 온전히 신전의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누군가에겐 믿음이 목숨보다 중요할 수도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믿음보단 현생의 삶이 행복한 게 더 중요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레이온 제약이 성장하고 신전이 성녀를 데리고 신심을 높이려 할수록 백성들도 분열될 게 뻔하다. 황태자는 분열된 그 틈을 이용해 강수를 두려는 걸 테다.
“신문사에 작은아버지 되는, 디아즈 대공의 수술 사실을 실을 예정이다. 그때 레이온 제약의 약물을 이용했으니 자연히 홍보가 될 테지.”
그냥 홍보가 아니다. 신전에서 인정하고 황실에서 사용할 정도로 효과가 좋노라 ‘증명’될 것이다.
“시에나를 이단심문소에 보낼 좋은 구실이 있어요.”
“뭐지?”
“에스타리온 백작이 쓰러진 건 알 거예요.”
“생명력이 사라졌다던데 원인불명이라지.”
“네. 아는 사제님께 백작의 상태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드렸더니 죽지 않을 만큼의 생명력만 남아 있다고 하더군요. 제게 짐작 가는 게 있어요.”
황태자가 얼른 말해 보란 의미로 턱을 까딱거렸다. 나는 차를 홀짝여 입을 축인 뒤 털어놓았다.
“크루커스가 성물이 아니라면 크루커스에서 나오는 생명력은 어디에서 비롯한 걸까요?”
“…설마…….”
“에스타리온 백작은 오랫동안 크루커스를 써 왔어요. 의식 없이 누워 있는 동생을 살리기 위해서였죠. 동생을 위해 제 모든 생명력을 끌어써서 잠든 거라면, 크루커스를 단순한 마법 물품으로 볼 수 있을까요?”
늘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던 황태자의 얼굴에 경악이 번져 나갔다.
“놀라시는 걸 보니 기록서엔 크루커스의 구체적인 기원이나 진실이 적혀 있지 않은 모양이군요.”
“기록서에 쓰인 건 단 하나, 에스타리온 백작가는 크루커스를 파괴할 방법을 찾는 날까지 책임지고 보관하겠다는 문장뿐이었다. 다만, 아직 해독이 끝나지 않은 기록서가 몇 권 더 남아 있긴 하지.”
아무래도 500년 전의 기록서다 보니 지금과는 언어가 많이 다를 테다. 작게는 단어 쓰임과 발음, 크게는 문법까지.
“돌아가는 대로 곧장 크루커스에 관한 이의를 제기하셔야겠군요.”
“그리되면 에스타리온 백작가의 명성도 바닥을 칠 텐데 괜찮은가?”
황태자의 물음에 코웃음이 나왔다. 무례라는 걸 알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전하야말로 백작가와 척을 져도 괜찮으신가요?”
“그 문제는 이미 시온과 이야기가 끝났다. 에스타리온 백작가는 이제껏 크루커스를 단 한 번도 외부에 공개한 적이 없지. 해서 그간 제국을 크루커스로부터 ‘보호’해 온 것이며 성물이라 칭한 것은 성물과 마법 물품을 분간하지 못한 신전의 우매함 때문이라 발표하기로 했다.”
톡. 톡. 톡.
손끝으로 찻잔을 두드렸다. 차는 다 식은 지 오래다.
황태자는 철저하게 신전을 무너트려 제정 분리를 시키려 하고 나는 나대로 시에나에게 볼일이 많다.
“꼭, 시에나를 이단심문소에 넣어주세요.”
내가 이단심문소에 들어간 건 시에나 때문만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이간질로 내 삶이 유린당한 건 사실이다.
악몽 같던 시에나의 어미는 세상을 떠났으니 시에나에게라도 내 모든 분을 풀어야겠다.
“약속하지. 그자는 이단심문소의 가장 깊은 곳에서 심문받게 될 것이다.”
“좋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건 정해졌군요.”
황태자가 신전을 물어뜯는 사이 나는 시에나를 진탕에 처박고 레이온 제약을 공격적으로 키우면 된다.
그러니 얼른 신입 면접을 끝내 실전에 투입시킬 수 있도록 철저히 교육시켜야겠다.
나는 다가올 미래를 상상하며 기꺼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