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에스타리온 백작을 만난 날, 하고픈 만큼 욕하지 않았다. 비난을 퍼붓지도 않았다.
짐승처럼 저주하고 싶었지만 백작 때문에 내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잃을 수는 없었다. 짐승으로 지낸 건 이단심문소에서 사람대접 못 받은 걸로도 충분하니까.
그곳에서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품위, 존중 같은 걸 경험하지 못했기에 스스로가 또 한 번 짐승이 되는 걸 용납할 수도, 해서도 안 되었다.
그래서 백작이 제 손으로 자식을 버린 사실을 두고두고 곱씹으며 후회하고 절망하길 바랐다. 그런데 그가 쓰러졌다고? 의식을 차리지 못한다고?
“셀레나.”
“하하하. 하…….”
에스타리온 백작에겐 정말 속 편한 일이다.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이 누워 있다니.
나만 화가 나고, 나만 어처구니가 없고, 나만 고통스러운 거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날 맘껏 화낼걸. 못다 한 분노를, 원망을 모조리 토해 내고 돌아올걸…….
미친 듯이 웃다가 다리에 힘이 쭉 풀렸다. 몸이 휘청거리자 에이든이 단숨에 나를 붙잡아 안았다.
“이게 뭐야. 에이든, 대체 이게 뭐냔 말이야.”
“…….”
백작이 의식이 없다고 해서 슬프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가 미운 것과 별개로 백작은 지난 세월, 내 아버지였다.
그래서 가슴이 착잡하다. 그렇다해서 안타깝다거나 걱정이 되진 않는다.
그냥 상황에 기가 막히고 오갈 데 없어진 내 원망이 슬프다.
백작은 끝까지 이기적이었고 제멋대로였다. 진탕에서 올라온 나를 다시금 지옥 속으로 처넣는다.
누군가는 말할 수 있다. 그가 의식을 잃은 건 하늘이 벌을 내린 것 아니겠냐고. 하지만 그건 신께 치러야 하는 벌이지 내가 내린 벌은 아니다.
“백작은 더 고통스러워야 했어. 더 아파하고, 더 후회하고, 더 미안해해야만 하는데 왜… 왜, 어째서…….”
에이든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숨을 골랐다. 목에서 눈물향이 올라왔지만 삼키고 또 삼켰다.
백작 때문에 울지 않을 것이다. 고작 그따위 사람 때문에 기운빼긴 싫다.
눈을 꼭 감고 어지러울 정도로 숨을 쉬었다 마시길 반복했다.
머릿속이 어지럽긴 해도 마음은 조금씩 진정되어갔다.
“병문안, 가 볼 거야?”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의식도 없는 이를 만나서 무얼 할까. 내 속만 불편해지지.
손안에서 구겨진 편지를 쫙쫙 폈다. 따로 편지지를 꺼내 답장하기도 싫어서 뒷장에 짤막하게 써서 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아까 놀라서 미처 읽지 못한 부분을 확인했다.
[…신관은 생명력이 사라져서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거라고 한다. 하지만…….]
시온이 말한 구절을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다. 생명력이 사라져서 의식을 차리지 못한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산 사람의 생명력이 사라지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거니와, 생명력이 사라졌는데 죽는 게 아니라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건 더더욱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에스타리온 백작가에 가야 해.”
생명력이 사라졌다는 설명에 존 콕스가 주고 간 나침반이 떠오르는 건, 크루커스에 대한 의심이 들었기 때문일 테다.
* * *
크루커스가 만들어 내는 성수는 생명력을 품은 물이라 성수라고 불린다.
성수를 마시면 그 속의 생명력이 병든 이를 낫게 하고 기운을 북돋아 준다.
생명력은 생명을 가진 이들이라면 모두가 가지는 것으로 유사한 것으로는 신성력이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유사할 뿐 같은 건 아니다.
생명력이 우리가 살아 숨 쉬는 에너지 그 자체라면, 신성력은 어디까지나 신체 내의 생명력을 활성화시켜서 보조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생명력이 사라졌는데 살아 있다는 건…….’
건강과 생명력이 비례하진 않는다. 하지만 죽은 사람에게선 생명력이 발견되지 않기에 생명력이 없으면 죽음에 이르는 게 당연하다고 한다.
성수를 만들어 내는 크루커스와 쓰러진 동생의 삶을 유지시키기 위해 지난 시간 동안 꾸준히 크루커스를 써 온 백작. 이 둘 간에 묘한 상관관계가 느껴지는 건 나 혼자만은 아닐 거다.
“셀레나.”
에스타리온 백작가에 도착하자 마중 나와 있던 시온이 나를 맞았다.
오랜만에 온 백작가는 겉보기엔 내가 나올 때와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묘하게 침체된 분위기가 이곳에 사달이 단단히 났음을 말해 주었다.
“와 줘서 고맙다. 의식이 없으시지만 감각은 열려 있을 테니 네가 온 걸 많이 기뻐하실 거야.”
“병문안 온 거 아니에요. 생명력이 사라진 걸 확인하러 온 거지.”
“…신관은 이런 일이 처음이라며 이유를 모르겠다더구나.”
나는 앞장서서 백작의 침실로 향했다. 복도에 들어서자 노집사가 보였다. 그는 나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이 집에서 당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는 터라 집사를 무시하고 지나쳐 침실 문을 두드렸다.
달칵. 문을 열자 낯익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 사이로 비쳐 들어오는 햇빛과 가구의 짧은 그림자, 방에서 나는 체향. 지긋지긋하도록 익숙한 풍경이었다.
가슴이 턱 막혔다. 방 안으로 발을 디디는 게 두려웠다. 다시 이곳에 잠식당할 것 같아서.
“…셀레나?”
시온의 부름에 정신이 들었다. 용기를 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또각. 또각.
침대엔 백작이 잠이 든 것처럼 누워있었다. 꼭 제 동생 루카스처럼.
“아버지께서 쓰러지신 건 너 때문이 아니니 괜한 생각은 마.”
내가 침묵을 지키자 시온은 내가 자책을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 생각 안 해요. 더불어 백작님이 내게 한 일 때문에 벌을 받는 거라고도 생각지 않고요.”
“…….”
“쓰러지기 전 전조 증상은 없었나요?”
“없었어. 감정적으로 힘들어하시긴 했지만 그게 원인이 되진 못하겠지.”
존 콕스는 크루커스가 성물이 아닌, 성배를 본떠 만들어진 마법 물품이라고 했다.
크루커스가 성수를 만들어 낸 게 아니라 체내의 생명력을 뽑아내어 성수처럼 보이도록 하는 거라면 백작이 쓰러진 게 말이 된다.
의식이 없는 작은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일이 년도 아니고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생명력을 뽑아 썼으니까.
“산 사람에게 생명력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에요. 아주 미약하게나마 생명력이 남아 있는 거겠죠.”
“신관이 알아채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야.”
“이단심문소에서 안 것 중 하나가 실력 있는 신관은 귀족들이 이용하는 중앙신전에 없다는 거였어요. 중앙신전에 있는 이들은 정치에 실력이 있는 자들이지, 정말로 믿음이 있고 실력 있는 자들은 수도 외곽에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돌보고 있더군요.”
내 삶에 시에나가 나타나지 않아 여전히 백작의 딸이었다면 지금 이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파 어쩔 줄 몰랐을 거다.
하지만 이젠 사랑보다는 미움이 커서 사무치도록 아프지가 않다.
내 마음을 잘 뒤져 보면 한때나마 그를 가족으로 사랑했던 마음에 한해 이 상황을 안타까워하는 감정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한들 내가 그 감정을 허락하는 건 아니다.
백작에게 마음을 쓰는 것보단 크루커스의 비밀을 알아내고 내 할 일을 해낼 생각이다.
“아는 사제분이 계세요. 그분께 연락해 둘 테니 검사를 받아 보도록 해요.”
나는 마지막으로 에스타리온 백작의 얼굴을 눈에 담은 뒤 가차 없이 방을 나왔다. 시온이 뒤에서 내게 물었다.
“가려고?”
그는 내가 이곳에 더 머물다 가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백작가의 익숙한 정경을 둘러보니 그날이 떠올랐다.
“개처럼 끌고 나가 빗속에 처박으라고 명령하고 싶다 하셨죠.”
시온이 흠칫하고 몸을 떨더니 숨을 삼켰다.
그때의 감정을 떠올리니 기분이 낮게 가라앉았다.
“그런 감정이 든 순간 이미 다 끝난 거예요.”
시온을 돌아보자 턱에 힘이 잔뜩 들어간 그가 보였다. 새파래진 안색을 한 그가 입술을 떨었다.
“나는… 정말로 네가 거짓말을 하는 줄 알았어.”
“정말 거짓말인걸로 판명났다면 그 일을 후회하지 않았을 거잖아요. 이제 와 후회가 되는 건, 내가 가짜였다면 한 점의 후회도 없을 만치 저열하게 분노했기 때문이죠. 안 그런가요?”
“…….”
“그래서 나도 한 점의 후회도 없도록 분노하려고요. 내게 자비를 찾지 마요. 나는 백작이 쓰러진 일에 화가 날지언정 슬프진 않으니까.”
이게 바로 우리가 파국에 이르렀단 증거겠죠.
그렇게 말을 마무리한 나는 다시 뒤돌아보지 않고 마차를 탔다.
눈을 감고 감정을 추스르자 해야 할 것들이 정리되었다.
크루커스의 비밀을 밝히고 시에나를 칠 것. 시온과 황태자에게 복수하는 건 뒤로 미뤄야 할 듯하다.
시온은 건드리기에 시시해져 버렸고 황태자는 아직 쓸모가 많아 보이니까.
* * *
“지원서가 아주 많이 들어왔네요.”
“사장님. 지금 레이온 제약이 얼마나 인기를 끄는지 모르세요?”
“알죠. 매달 300퍼센트가 넘게 성장 중이잖아요.”
“아뇨, 그게 아니라 사장님께서 내건 복지 조건이 너무 좋아서 그래요. 월급도 높은데 매 여름 한 달간 유급휴가에, 매달 자녀 교육비 별도 지급이라니… 요즘 이런 곳이 흔치 않잖아요.”
“앞으로 일이 힘들어질 테니 제가 직원분들께 잘해야죠.”
“일이 힘들어져요?”
알버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생각하는 일이 힘들다와 내가 생각하는 일이 힘들다가 다른 개념일 게 분명해 자세히 설명해 줘야 할 듯했다.
“신전 측에서 우릴 견제하기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이단심문회도 성공적으로 끝났는데…….”
“그러니 더 견제하겠죠. 신전에서 공식적으로 허가한 것과 마찬가지니 약물에 트집을 잡을 수는 없고, 그렇다면 다른 일로 제재를 가할 거예요.”
“잠시만요. 이해가 안 가요. 신전이 왜요? 진통제가 신전의 힘을 약화시키긴 했지만 그래도 요즘 성녀님의 출현으로 신전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인기를 구가 중인데요?”
“왜냐면.”
나는 벽에 걸린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2시 29분. 약속 시간이 다 되었다.
“제가 황태자 전하와 손을 잡고 신전을 견제하기로 했기 때문이에요.”
내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똑똑하고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황태자는 말끔하지만 척 보기에도 아주 고급스러운 옷을 입어,
알버트는 그의 얼굴을 모름에도 귀족이 찾아왔다고 생각해 얼른 인사를 올렸다.
“시간을 꼭 맞춰 오셨군요. 잘 오셨어요. 황태자 전하.”
황태자는 신전을, 나는 시에나를. 우리는 각자의 목표를 위해 잠시 손을 잡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