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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81화 (82/134)

<81>

“베키의 남자친구분이 여기까진 어쩐 일이신가요?”

명함을 품 안에 집어넣으며 존 콕스를 확인했다.

베키가 아이 아빠와 교류하기 시작했단 건 들었는데 내게 찾아온 건 이유를 모르겠다.

“베키에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힘들 때 여러모로 도와주셨다고요.”

“베키가 저에 대해 좋게 말해 주었나 봐요. 도움을 주었다니 조금 민망하네요.”

그는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세상이 미혼모에게 얼마나 각박한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겁니다. 일자리를 준 데다가 친구처럼 잘해 주었다고 들었습니다.”

“베키가 좋은 사람이라 그런 것뿐이에요. 아이는 만나 보셨나요?”

“예. 정말 놀라울 정도로…….”

존은 울컥하는지 숨을 들이켜더니 젖어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를 많이 닮았더군요.”

“성격도 존 씨를 많이 닮았을 거예요. 베키를 닮진 않았거든요.”

“평소에도 에이미에게 장난감이나 간식을 선물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이를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베키에게 잘해 주신 것만도 감사한데…….”

별것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존은 내가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뱃사람처럼 다부진 몸을 한 남자가 코를 훌쩍이는 모습은 묘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그에게 차를 내어주었고 존은 차로 목을 축이곤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가 생긴 줄 알았다면 그렇게 떠나지 않았을 겁니다. 하아. 베키가 저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던지… 미혼모가 되어서 가족과도 의절하고 평생 고생이라곤 안 해 본 사람이 허드렛일을 …….”

“베키와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최대한 빨리 결혼할 예정입니다. 일은 관둬야겠지만요.”

“그렇군요. 베키와 지금처럼 자주 보진 못하겠지만 그녀에게 이렇게 좋은 일이 생겨서 기뻐요.”

“제가 오늘 셀레나 씨를 찾아온 건 그간의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입니다. 제 아이와 베키를 누구보다 아껴 주셨으니까요.”

“오…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내가 손까지 내밀며 괜찮다고 했지만 존은 막무가내였다. 그는 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감사의 표시로 무엇이 좋을까 많이 생각하다가 이게 떠올랐습니다.”

그가 준 선물은 작은 주머니에 담겨 있었다.

주머니 안에는 아주 낡은 나침반이 들어 있었다.

“그 나침반은 연구실을 거쳐서 박물관이나 황실 보물창고에 들어가야 하는 거였지만 그리되면 본래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라 따로 빼 왔습니다. 아, 윗선에 보고하지 않은 보물이니 다른 걱정은 않으셔도 됩니다.”

“헌데 오래되어서 그런지 고장 난 것 같아요.”

나침반을 평평한 테이블 위에 올려놨지만 바늘은 갈피를 못 잡고 사방으로 뱅글뱅글 돌았다.

“그 나침반은 저물어 버린 신성 시대의 유물입니다. 제국이 세워질 즈음 만들어진 것으로 방향을 찾기 위한 나침반이 아니죠.”

“방향을 찾기 위한 게 아니면 뭔가요?”

“신성 시대의 성기사들이 악을 찾아내기 위해 만든 나침반입니다. 즉, 나침반의 바늘 끝엔 가장 사악한 것, 이를테면 악의 힘을 빌려 만들어진 이교도의 물건이 있을 겁니다.”

그런 물건을 왜 내게…….

그는 내 의문을 읽기라도 한 듯 설명을 이어나갔다.

“셀레나 씨께서 에스타리온 백작가의 아가씨였다고 들었습니다.”

“옛날 일이죠. 지금은 레이온 가의 초대 가주랍니다.”

“그렇다 한들 그 속에 흐르는 피가 사라지는 건 아니죠.”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가요?”

“나침반은 성기사들이 쓰던 물건입니다. 정확하게는 성기사들만 쓸 수 있는 물건이었죠. 성기사의 신성에 반응하여 악을 찾도록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모르게 인상이 써졌다.

“이단심문소에 가신 이유가 크루커스 탓이라 들었습니다.”

“어디서 들었나요? 내가 이단심문소에 들어간 원인에 관한 이야기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극비사항인데.”

“제게 지원금을 주어 성배를 찾도록 한 분은 바로 황태자 전하이십니다. 전하께 지난 일정에 대한 보고를 하다가 우연히 듣게 되었지요. 크루커스는 현대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성물이니까요.”

“…나를 놀리는 건가요? 내가 왜 이단심문소에 들어간 건지 안다면 이런 나침반을 못 줄 텐데요. 크루커스는 내게 제대로 반응하지 않았어요. 내겐 초대 에스타리온 백작의 강한 신성이나 성기사로서의 자질이 없단 뜻이에요.”

존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사무실에 우리밖에 없는데도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위기가 아주 엄중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크루커스는 성물이 아닙니다.”

“네?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

“이백 년 전 있었던 침략 전쟁으로 황궁은 물론이거니와 수도 전역이 불에 타서 수많은 기록이 유실되었지요. 또한 많은 이들이 죽어 구전되던 역사 또한 함께 소실되었습니다. 해서 우린 인접한 국가는 물론이거니와 바다 건너 먼 대륙까지 가서 남아 있던 제국의 역사를 찾아보아야 했습니다.”

분명 존은 내게 감사 인사를 하러 왔다.

그런데 지금, 그는 내게 아주 비밀스러운 사실을 전하는 중이다.

존은 냉정할 정도로 차분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머나먼 나라에서야 당시의 기록을 찾을 수 있었죠. 그곳에서 우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 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크루커스는 성물이 아닌, 성배를 본떠 만들어진 마법 물품임을요.”

“그게 무슨…….”

손안에서 뱅그르르 돌아가는 나침반을 꼭 붙잡았다.

나침반을 붙잡은 손에서 땀이 흘렀다.

“자세한 사항은 더 연구해 봐야 하니 이 이상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제가 셀레나 씨에게 나침반을 드리는 이유는 억울하게 이단심문소에 가신 만큼 이 나침반이 악에 대항해 싸울 수 있는 힘을 드리길 바라서입니다.”

크루커스가 마법 물품이라는 건 증거가 없는 주장이었다.

거기다 오늘 처음 보는 내게 저런 비밀을 말하는 건…….

“참. 황태자 전하께서 저를 보내신 건 아닙니다. 전하조차 이 나침반의 존재는 모르니까요. 황실의 연구 지원이 끝나면 에스타리온 백작가에 나침반을 대가로 지원금을 받으려고 따로 챙겨 둔 것인데 이렇게 드리게 되는군요.”

“…이렇게까지 모든 걸 말해 준 이유가 뭔가요?”

“거짓된 역사는 바로잡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셀레나 씨가 아니라 학자로서 잘못된 인식을 정정하기 위함입니다. 무엇보다.”

존 씨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끝맺었다.

“셀레나 씨라면 그 나침반을 이용해 크루커스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꼭 크루커스가 악한 물건이라고 말하는 듯한 그 말에, 나는 다시 한번 내게 폭풍이 몰아칠 거라는 걸 직감했다.

* * *

저택으로 돌아오자 잭슨과 에이든이 진검 대결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다음 주면 검술 대회가 시작된다.

에이든이 노리는 건 검술 대회 우승으로,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상금이 목적은 아니었다.

그가 바라는 건 우승을 통해 귀족 사회에 제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키며 제 세력을 키우기 위함이었다.

‘정치나 권력에 관심이 많은 줄은 몰랐는데…….’

에이든이 아무 이유 없이 권력에 욕심을 내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게 확실한데 통 이야기를 안 하니 알 수가 없다.

멀리서 에이든이 나를 확인했다. 그 틈에 잭슨이 더 사납게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에이든은 부드럽게 잭슨의 공격을 흘리더니 빠르게 허를 찔러 잭슨이 균형을 잃게 만들었다.

검 끝이 잭슨의 목을 겨누었다. 에이든의 승리였다.

“이제 더는 가르칠 게 없는 것 같군요.”

잭슨이 에이든의 손을 잡고 일어나며 말했다.

“하산하라 이거야? 나야 나쁘지 않지. 그래도 우리 집에서 일은 계속해야 해. 종종 검도 봐 주고.”

“어이구. 얼마나 더 부려 먹으시려고.”

“아직 정정하면서 엄살은.”

유쾌하게 잭슨의 말을 받아넘긴 에이든은 검을 집어넣고 내게 다가왔다.

“아침 일찍 나가서 종일 일하면 안 피곤해?”

“조금 피곤하긴 해도 괜찮아. 오늘 어떻게 지냈어?”

“신문도 읽고 훈련도 하고. 중간중간 잡다한 일도 처리하면서 지냈지.”

잡다한 일이라고 얼버무렸지만 사실은 황궁에 다녀온 것임을 잘 안다.

그날 이후 에이든은 황태자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는 우리 사이가 삐거덕거릴 만한 주제는 교묘하게 피해 갔고 나는 또 부딪치고 싶지 않아 마찬가지로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암묵적인 약속 아래 식사를 하고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나누며, 그것이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인 양 굴었다.

하지만 언젠가 이 평화가 깨어질 거란 걸 잘 안다.

내가 황태자의 목을 물어뜯길 바라는 한, 그리고 그가 황태자 아래에서 일하는 한 우리는 한 번은 다툴 수밖에 없을 테니까.

에이든은 내 방 앞까지 나를 따라오며 종알종알 떠들었다.

내가 기억을 찾은 뒤 그는 어린 시절에 누리지 못한 순수한 소년으로 돌아간 것처럼 행동했다.

“베키가 일을 관둔다며. 아쉽진 않아? 둘이 친했잖아.”

“좋은 일로 관두는 거잖아. 행복하게 잘 지내면 좋겠어.”

존이 주고 간 나침반이 떠올라서 복잡한 마음이 밀려들었다.

방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에이든이 돌아가지 않고 문 앞에 버티고 섰다.

“에이든?”

나를 보는 에이든의 얼굴이 진지했다.

약간은 어둡게 가라앉았고 조금은 괴로워 보이기도 했다.

“씻으러 안 가?”

“씻으러 가기 전에 전해 줄 게 있어.”

“뭔데 그래?”

에이든이 품 안에서 편지를 꺼내어 전해 주었다.

왁스 실링에 에스타리온 백작의 문양이 찍혀있었다.

“좋은 일은 아닐 거야.”

“무슨…….”

“백작가에 안 좋은 일이 생겼대. 소식을 들은 네가 상처받을까 봐 겁이 나.”

“…더 상처받을 것도 없어. 기대가 있어야 아픈 법이니까.”

백작가에 생긴 안 좋은 일이 뭔지 몰라도 그것 때문에 슬퍼하진 않을 거다. 편지를 뜯자 시온의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네가 나와 아버지를 증오하는 건 알지만 꼭 한 번은 방문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날 네가 떠나고 난 뒤 아버지께서 쓰러지셨다. 많은 의사가 다녀갔지만 원인불명이라더군.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이지만 와서 아버지의…….]

편지를 다 읽지도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편지를 와작 구겨 버렸다.

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지금 내가 어떤 얼굴을 했을지 짐작이 갔다.

아주 무섭게 일그러지고 지독하리만치 불편해 보일 테다.

“시온의 말, 안 믿어. 괜한 수작인지 누가 알아?”

그렇게 말했지만 어쩔 줄 모르는 에이든의 얼굴을 확인하자 편지에 거짓이 적히지 않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하. 하하…….”

아주 웃긴 일이다. 마음껏 미워할 수도 없게 쓰러지다니. 너무 속 편한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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