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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80화 (81/134)

<80>

시온은 초조하게 제 아버지가 눈을 뜨기만을 기다렸다.

의사는 백작의 몸에 아무런 이상도 없다고 했다.

오히려 백작이 쓰러진 게 이해 가지 않는다며 심리적 요인 이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노라 확신하기까지 했다.

이번 일로 충격이 크긴 했지만 일주일이나 의식을 못 찾는 건 납득할 수 없었다.

보다 못한 그는 신전에서 사람을 불렀다. 신관은 백작의 몸에 신성력을 흘려보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지?”

“그게…….”

“무슨 일인지 말하게.”

“…생명력이…….”

“똑바로 말하는 게 좋을 거네. 무슨 일인가?”

시온은 낭패 어린 표정보다 어리둥절한 기색을 한 게 더 두려울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생명력이라는 게 느껴집니다. 다 죽어가는 병자라 해도 생명력은 꺼지지 않는 불처럼 타오르곤 하죠. 하지만 백작님께는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저조차 이해가 안 가는군요. 죽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생명력이 없을 수가 없는데…….”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아버지께선 살아 계시다. 의사는 건강에도 이상이 없다고 했고.”

“살아 계시지만 생명력이 없는 사람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의식을 잃은 것과는 또 다른 문제이지요.”

“이대로 돌아가실지도 모른단 말인가?”

“그건 아닙니다. 아무래도 더 정밀한 진단을 받아 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상급 신관을 보낼 테니 며칠만 기다려 주시지요.”

생명력이 없이 누워 있는 것과 작은아버지 루카스처럼 의식이 없어서 누워 있는 게 무슨 차이인지 자세히 말해 주면 좋으련만.

신관은 혼란에 빠진 시온을 내버려 두곤 다시 신전으로 돌아갔다.

흑마법에 당한 걸까. 아니면 정적들이 보낸 독을 섭취해서 이런 걸까. 수많은 가정을 했지만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건 없다.

신관을 불렀으니 조만간 수도 전역에 에스타리온 백작이 쓰러졌음이 전해질 거다.

신전은 이 틈을 타서 크루커스를 완벽히 신전의 소유로 만들려 하겠지.

‘크루커스는 우리 소유고 시에나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해.’

그 간교한 사기꾼이 크루커스를 이용해 성녀가 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건 자신도, 누워 있는 제 아버지도 바라는 바가 아니다.

시온은 의식이 없는 제 아버지를 보다 못 해 눈을 질끈 감았다.

“아버지. 제발 일주일 안에 다시 일어나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백작위를 강제로 계승해서라도 자신이 나설 생각이다.

신전과 시에나를 짓밟고 시에나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하.”

아무래도 자신도, 아버지도, 셀레나에게 지독하게 군 벌을 받는 듯했다.

* * *

신문은 매일 같이 성녀 시에나를 찬송했다.

그녀가 빈민가 병자들에게 성수를 주어 그들을 치유했다는 것부터, 시에나가 죽으면 신전에선 그녀를 성인의 반열에 올릴 거라는 것까지.

하루하루 한 편의 웃긴 극을 보는 것 같았다. 실체도 모르고 신의 자비를 운운하다니.

‘모든 걸 폭로해 버리고 싶지만…….’

지금처럼 시에나가 다시없을 영웅 취급받는 때에는 의문을 제기해 봤자 그녀를 시기질투해 거짓말을 한다며 역풍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신전이 철저히 보호하는 만큼 조용히 지나갈 게 분명하기도 하고.

신전에게 시에나 개인의 도덕은 중요하지 않다.

신전은 더 이상 순수하게 신을 모시는 집단이 아니다.

그들은 이윤을 추구한 지 오래고 시에나를 내치기에 너무 멀리 와 버렸다.

그래서 나는 신전과 시에나를 동시에 몰락시키기로 했다. 방법은 간단하다.

성녀가 필요 없어질 정도로 진통제를 널리 유통시켜 성녀의 값어치를 바닥까지 떨어트리는 것.

그렇게만 하면 황태자는 책임지고 시에나를 내게 건네주기로 했다.

‘그와 손을 잡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어. 개인이 상대하기에 신전은 너무 커다란 존재야.’

제아무리 신전이 타락했다고 한들 사람들에게서 신앙이 사라진 건 아니다.

황실조차 신전을 견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만큼 나 또한 황태자와 협력하는 게 좋다.

황태자에게 내가 당한 모욕을 되돌려 주는 건 그 이후가 될 거다. 그리고 에스타리온 백작가는…….

“하아.”

“사장님. 무슨 고민이신데 하루 종일 한숨이세요?”

알버트가 서류를 내려놓고 내게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긴요. 누가 봐도 걱정이 가득한 얼굴인데요?”

“다 티가 나요?”

“뭔데 그래요. 저 고민 상담 잘해요. 저한테 말해 봐요.”

“그게… 아는 사람이 있어요. 수도 귀족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귀족인데 본인은 이 사실에 큰 불만이 없어 보였어요. 적당히 한 자리 차지하고 지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입장이었죠.”

“네에. 그런데요?”

“그런데 갑자기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야겠다면서 위험한 길을 떠나려고 해요.”

“위험한 길이라고 하면 어떤 건가요?”

“속을 알 수 없는 음험한 대귀족 아래에서 일하는 거요. 전 그 사람이 그런 사람과 어울리지 않았으면 하거든요. 물론 둘은 예전부터 알던 사이긴 하지만…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성공하겠다고 나서는 게 이상하잖아요. 대귀족이 이상한 바람이라도 불어넣은 걸까요?”

에이든은 벌써 일주일째 나를 피하고 있었다.

그와 대화를 하고 싶었지만 나는 나대로 정신없이 바빴고, 에이든은 에이든대로 집에 있는 날이 잘 없었다.

가끔 대화를 하더라도 황태자 아래에서 일하는 문제에 대해선 입도 뻥긋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에이든이 성인이고 황태자에 대해 잘 안다고는 하지만 염려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황태자는 지금 신전을 치기 위해 눈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신전은 황실에 밀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그러니 자연히 에이든이 먹잇감이 될 테다. 에이든은 비호해 줄 인맥도 없고 노예 출신이니 가장 만만한 존재 아니던가.

“그래서 상대분을 말리고 계신 건가요?”

“아뇨. 그 사람은 이 문제로 대화하려고 하지 않아요.”

“아하. 남자분이시군요.”

“어… 네.”

“으음…….”

알버트는 인상을 쓴 채 생각에 잠겼다. 나는 초조하게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자세한 상황을 모르니 그분이 왜 그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없지만?”

“대화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건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 사장님께 멋진 남자로 보이고 싶을 텐데 걱정만 끼치니 오히려 화가 날 수도 있겠네요.”

“네에?”

엉뚱한 대답이라 저절로 인상이 써졌다.

에이든을 이해하고 싶어서 털어놓은 일인데 알버트가 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한다.

“그분, 칼립소 공작님 아니신가요?”

“그, 그걸 어떻게 아나요?”

“맙소사. 사장님. 공작님이 자주 마중 나오는 걸 잊으셨어요? 사장님과 어울리는 귀족이 칼립소 공작님뿐이란 건 레이온 제약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에요. 물론, 직원은 저뿐이지만요.”

알버트는 내 표정을 확인하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걱정을 한 사람처럼 허무한 얼굴을 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분을 믿어 줘요. 그분은 절대 만만한 분이 아니에요. 오히려 누구보다 무서운 분이시죠.”

“에이든이요? 좀 무뚝뚝하긴 해도 무섭진 않아요.”

“성격 말고요. 그분이 사장님 앞에서 순한 양처럼 굴어서 어떤 착각을 하시는지는 잘 알지만 공작님이 전쟁 영웅인 걸 잊지 마세요.”

“…….”

솔직히 전쟁 영웅을 운운하는 건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냥 하는 말 같았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이기도 하거니와 와닿지도 않았다.

과거에 에이든이 겪은 고난보다는 앞으로 펼쳐질 일들이 더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 영웅이 된다는 건 생사를 오가는 현장에서 압도적인 성과를 냈단 거예요. 그런데 가장 먼저 도망가고, 전시에 후방 지원을 맡을 노예가 전쟁 영웅 자리에 올랐다? 보통내기가 아니란 사람이란 거죠.”

알버트는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분은 혁혁한 공을 세운 뒤에도 황태자 전하의 옆에서 함께 전쟁터를 누볐어요. 사장님 앞이라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하기 뭣하긴 하지만, 공작님은 배운 게 없어서 모르는 게 많을지언정 어리석진 않을 거라고요. 오히려 난놈 중의 난놈이겠죠.”

“…….”

“그런 분이니 다 생각이 있을 거예요. 공작님을 염려하는 건 알지만 좀 믿어 주세요. 남자들은 좋아하는 여자의 치마폭에 에워싸여 어화둥둥 대접받는 것보단, 내 님의 응원을 받으며 인생을 거는 승부를 하는 게 더 좋은 법이니까요.”

에이든과 얘기를 해 보고 싶은데 그러면 내가 자신을 못 미더워 한다고 생각하게 될까? 아니, 충분히 염려를 표했다. 이미 못 미더워한다 생각해 우울해할지도 모르겠다.

“못 믿어서 그런 게 아니었는데…….”

“알아요. 사랑하면 누구나 겁쟁이가 되는 법이죠.”

“맞아요. 겁쟁이… 사, 사랑이요?”

얼굴에 화르륵 열감이 올랐다. 알버트가 왜 그러냐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두 분, 연인 사이 아니셨어요? 진지하게 만나는 줄 알았는데.”

“아, 아, 아니에요!”

그를 좋아하고 있고 그 또한 나를 특별한 마음으로 대하고 있긴 하지만 우린 각자의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런데 모르는 사람에겐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니!

민망하다고 할지 쑥스럽다고 할지… 괜히 가슴이 쿵쿵 뛰었다.

내 반응에 알버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공작님도 딱하시지. 그렇게 좋아하는 게 티가 나는데 여태…….”

“아, 알버트!”

“이크! 전 13지구에 있는 대형병원과 미팅이 있어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알버트는 헐레벌떡 옷을 챙겨 도망갔다.

문을 열고 사라지려던 그가 멈칫하더니 내게 보고했다.

“아참, 이번에 신입 뽑겠다고 신문에 채용공고 냈잖아요. 그거 내일부터 실린대요. 전달을 빼먹어서… 그럼 전 진짜 가 보겠습니다!”

알버트가 떠난 뒤 서류에 집중하려 했지만 좀처럼 속도가 나질 않았다.

다 실없는 소리를 들어서다. 그리고… 알버트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에이든은 맨몸으로 노예에서 귀족까지 올라온 사람이었고, 사람의 민낯을 보기 좋은 전쟁터에서 황태자와 함께했으니 나보다 더 잘 알 테다.

‘다 이유가 있으니 그런 거겠지. 그러니 걱정은 내려놓는 게 좋아.’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은 쉽게 놓아지지가 않는다.

에이든이 전쟁을 잘 안다면 나는 수도 귀족들의 비정함을 잘 아니까.

똑. 똑.

사무실 문에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딸랑. 맑은 종소리가 손님의 등장을 알렸다.

남자는 안경을 쓰고 학구적인 분위기를 했는데 다부진 몸을 보아하니 의사 같진 않았다.

“여기가 레이온 제약 맞습니까?”

“네. 제가 사장인 셀레나 레이온입니다만 무슨 일이시죠?”

“아. 셀레나 레이온씨로군요.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저는 존 콕스입니다. 베키의 남자친구죠.”

존 콕스는 인사를 하며 명함을 한 장 건네주었다.

‘존 콕스. 신성 고고학자.’

명함을 확인하자 지금 같은 때에 존 콕스를 알게 된 게 운명처럼 느껴졌다.

신성 고고학자라는 건 성배를 추적하는 역사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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