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셀레나가 떠난 뒤 에스타리온 백작과 시온은 멍하니 자리를 지켰다.
카페에서 나는 소음이 그들을 에워쌌지만 세상은 철저하게 그들과 유리되어 있었다.
착한 딸이자 사랑스런 누이였던 셀레나다. 그런 아이가 한 말들은 모질기 그지없었다.
‘난 당신들이 지옥에 떨어지면 좋겠어.’
한 마디 한 마디가 증오를 짓이겨 내뱉은 말이었다.
백작은 제 딸의 냉담함에서 절망을 느꼈고 시온은 돌이킬 수 없다는 걸 확신했다.
‘후회는 당신들의 몫이죠.’
셀레나의 말이 맞았다. 후회는 그들의 몫이었다.
시에나에게 당했다고 한들 셀레나에게 모질게 굴기를 택한 건 그들이었다.
아무리 셀레나가 밉다고 한들 먼저 가족이길 포기한 건 그들이었다.
이단심문소에 보내고 막 심문소에서 나와 다 죽어가는 아이의 자존심마저 짓밟았다.
백작은 주변에 사람이 있음에도 북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내겐 가족 같은 거 없어요.’
그 말이 비수가 되어 백작의 가슴을 후벼팠다.
먼저 버려 놓고 이렇게 셀레나를 찾은 것 자체가 염치없는 짓임을 안다.
그럼에도 셀레나에게 편지한 건 보고 싶어서였다.
제 새끼에게 저지른 짓을 알고 나니 밥은 잘 먹는지, 잠은 잘 자는지 궁금해서.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알고 싶어서 돌이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에 매달려 셀레나를 불렀다.
하지만 얼굴을 보니 모든 게 확실해졌다. 일말의 여지조차 없이 모든 게 끝났다.
“흐으으으.”
에스타리온 백작은 짐승처럼 흐느꼈다.
자신이 얼마나 잔인하게 굴었는지 뼈저리게 체감했거니와 변해 버린 딸아이의 모습이 다 저 때문이란 걸 알아 견딜 수가 없었다.
시온이 제 아비를 안아 주며 소리 없이 눈물 흘렸다.
얼굴을 마주하면 어떻게든 문제를 봉합할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차갑게 내려앉은 눈을 똑바로 볼 수 있어서 셀레나가 받은 상처가 선명하게 전해졌다.
“시온. 어쩌면 좋으냐. 이 일을, 이 일을 어쩌면, 흐으으윽.”
시온은 제 아버지의 처진 어깨가 한없이 작아 보였다.
왜 우리 집이었을까. 하고 많은 아이들 중에 하필이면 셀레나가 납치를 당해서 이런 상황이 된 걸까.
그는 상황의 원인을 납치범들에게 돌리며 제 아비를 위로했다.
“아버지. 시간을 두고 기다립시다. 셀레나의 분노가 풀릴 그날을요.”
“시간을 가진들 그 애가 받은 상처가 사라지진 않을 거다. 시온, 내가 내 발등을 찧어 버렸다. 제 새끼를 몰라보고 그런 짓을 하다니…….”
체면도 생각지 않고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던 백작은 시온이 주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정리했다.
슬픔에 잠겨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이었지만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옆에 앉은 제 아들의 손을 꽉 붙들었다.
흐으. 흐읍.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길 반복하자 감정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백작은 울음으로 거칠어진 호흡을 잠재우곤 카페 창문 밖을 확인했다.
셀레나는 마차를 타고 떠난 뒤였지만 제 딸아이가 떠나간 방향을 공허한 시선으로 확인했다.
“부디 칼립소 공작이 셀레나를 가엾이 여겨 잘 대해 주면 좋겠구나.”
“아버…지?”
“셀레나가 그의 집에서 나올 생각이 없다니 우리가 어쩌겠느냐. 현실을 받아들여야지. 칼립소 공작에게 따로 연락해서 부탁이라도 넣어야겠다.”
“셀레나가 약혼자도 아닌 외간 사내와 함께 지낸다는 게 알려지면 큰일이 날 겁니다. 조용히 모른 척 묻어 두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 칼립소 공작에게 몰래 연락했다간 셀레나의 심기를 건드릴지도 모릅니다.”
“그것도 그렇구나.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구나. 아무것도…….”
도움을 줄 수도 없고 용서를 구할 수도 없다.
백작이 할 수 있는 건 울고 후회하는 것밖에 없었다.
“이만 집에 돌아가자.”
“예. 들어가서 쉬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두 사람은 카페를 나갈 준비를 했다. 백작이 쓰러진 건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기던 순간이었다.
몸에 힘이 쭉 빠지더니 균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백작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진 얼굴을 한 채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아버지! 아버지!”
시온이 백작을 부축해 그를 흔들었지만 백작은 의식을 차리지 못 했다.
단순히 스트레스 때문에 쓰러진 거라기엔 조금 이상한 현상이었지만 놀란 시온은 알아차리기 힘든 부분이었다.
* * *
나도 시에나도 같은 에스타리온의 핏줄이었지만 크루커스의 반응은 확연히 달랐다.
크루커스가 시에나에게 보인 강한 빛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 순간 내가 가짜라고 확신했으니까.
착오가 있어서 내게 공명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성물에 착오가 생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상해. 정말로 이상해.’
무어라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위화감 같은 게 느껴졌다.
그건 직감에 가까운 불편함이기도 했다.
‘황실은 성배를 잃어버렸는데 에스타리온 백작가는 성물인 크루커스를 지키고 있었던 것도 이상한 일이야.’
성배는 성물보다 더 가치 있는 물건이었다.
성배가 만들어 낸 성수는 남아 있는데 성배가 사라진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 하위격인 크루커스가 에스타리온 백작가에 고이 남겨진 것도 이상하다. 하지만 가장 이상한 건…….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위화감의 정체는 이거였다. 성배도 크루커스도 제대로 된 기록이 없다는 것.
건국 때부터 내려온 물건인데 정확한 유례가 알려지지 않은 게 크루커스였다.
심지어 크루커스를 보관 중인 에스타리온 백작가 또한 제대로 알지 못 했다.
중간중간 전쟁과 내전으로 가주들이 준비 없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들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가주들이 갑작스레 죽으며 누가 어떻게 크루커스를 만들었는지는 영원한 비밀로 묻혔다.
“크루커스에 대해 알아봐야겠어.”
그까짓 성물 때문에 내 삶이 유린되었다는 게 견디기 힘들었다.
백작과 시온을 만난 뒤라 감정적으로 더 피로했다.
그렇다고 휴식을 취하겠다며 너부러지는 건 싫었다.
이럴 때일수록 독하게 내 인생을 챙기고 싶었다.
마차를 돌려 의회도서관으로 향했다.
건국 역사, 성물의 비밀 등 여러 서적을 훑었지만 이렇다 할 내용은 없었다.
사실 다 비슷비슷한 내용이었다. 제국인이라면 아는 이야기가 전부였다.
‘조금 더 깊이 있는 설명이 필요한데…….’
500년 전, 타락한 왕이 자리를 지키는 조그만 왕국, 고모라가 있었다.
고모라는 성녀가 배출되는 신전과 놋쇠로 만들어진 황소를 섬기는 이단이 혼재하는 혼란스러운 국가였고 해가 갈수록 악은 기승을 부렸다.
어둠에 눈이 먼 왕은 백성들을 비탄에 빠지게 만들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욕심에 신전으로부터 성배를 빼앗았다.
그는 백성들의 목숨으로 성녀를 협박해서 성수를 만들고 또 만들었다.
왕은 성수를 마셔 영생을 누리고자 했지만, 흰머리가 돋아나고 주름이 생기는 제 얼굴을 확인하곤 성수 이외에 다른 것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해서 그는 흑마법에 손대었다. 백성들의 생명을 이용해 제 목숨을 연장시키는 악마적인 마법이었다.
이에 날 적부터 친구였던 에스테반 마르티네슨과 윌리엄 에스타리온이 힘을 합친다.
그들은 신전에 소속된 성기사이자 정의로운 심장을 가진 사내들이었고, 사람을 모아 왕을 끌어내려 사형에 처한다. 그런 뒤 그들은 약속한다.
‘황위는 마르티네슨이, 크루커스는 에스타리온이.’
건국 신화는 이렇게 막을 내린다.
성배가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 크루커스의 기원은 어떻게 되는지 따위는 나오지 않았다.
“이상해. 꼭 일부러 감춘 것 같잖아.”
무언가 숨길 게 있는 것처럼.
가슴이 갑갑해져서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창밖을 확인하자 하늘에 붉은 노을이 진 게 보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돌아가야 할 듯했다.
도서관을 나와 마차를 타고 저택에 도착하자 에이든이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내내 나를 기다린 듯했다.
에이든이 마차에서 내리는 내게 손을 뻗어 에스코트를 해 줬다. 그러면서도 두 눈은 정신없이 내 안색을 살폈다.
그는 오늘 내가 누굴 만났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괜찮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같이 좀 걸을까?”
에이든은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함께 정원을 거닐었다.
그와 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정원을 걷자, 이 순간 내가 느끼는 정적이 평화롭게 느껴졌다.
“납치범 말이야. 케빈, 그 자식. 찾고 싶지 않아?”
“십 년이 넘은 사건이야. 이제 와 찾는다고 한들 못 찾을 가능성이 대부분인걸.”
안 찾은 게 아니라 못 찾은 거였다. 이 넓은 제국에서 숨어 버린 죄인을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이미 외국으로 도망갔을 수도 있는데 케빈을 추적한다는 건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다.
“황태자에게 협조할 생각이야.”
“뭐?”
난데없는 고백에 고개가 휙 돌아갔다.
“왜? 무얼 위해서?”
“황태자는 뭔가를 아는 것 같았거든. 아니, 알고 있을 거야. 그 자식은 그런 놈이니까. 모든 걸 알고 체스판 위에 흐르는 긴장을 재밌다는 듯이 관망하는 놈이잖아.”
“나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하지 마. 황태자에게 충성한들 달라지는 건 없어. 그 사람이 널 위해 뭔가 해 주리란 기대는 버려.”
“그놈이 어떤 놈인지는 너보다야 내가 더 잘 알걸?”
“혹시 검술 대회에 나가는 것도 그것 때문이야? 권력을 쥐고 싶어서? 아니면 인정받고 싶어서?”
흥분한 내게 에이든이 불쾌하단 듯 털어놓았다.
“허울뿐인 귀족으로 사는 건 싫어서.”
“…….”
에이든은 자신이 귀족이 될 수 없다는 데에 선을 그어두는 사람이었다.
제 처지에 쓴 웃음을 날리면서도 늘 당당했는데 지금의 그는 오히려 초조해 보였다. 무슨 일이 있는 건 내가 아닌 에이든 같았다.
에이든의 새까만 눈을 주시했다. 그 속에 낮게 깔린 초조함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겠다.
조심스레 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그러자 에이든은 슬쩍 몸을 뒤로 빼서 내 손길을 피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일이 있어야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잖아.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쉬어.”
“잠시만, 잠시만 에이든.”
머리가 어지러웠다. 에이든이 하고자 하는 걸 반대할 생각은 없다. 애초에 그럴 권리도 없으니까.
하지만 황태자는 위험한 사람이었다. 음험하고 잔인해서 에이든이 그런 사람과 함께하는 게 걱정된다.
“네가 무슨 생각인지는 알겠지만 황태자와 함께 일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차라리 다른 공을 세우는 건 어때? 해적선을 소탕한다든가…….”
“그런 걸로는 한계가 있다는 거 잘 알잖아.”
에이든이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가슴께가 뻐근해졌다. 혼란스런 내게 그가 말했다.
“내가 바라는 건 집 지키는 개치고 재주가 좋다는 칭찬이 아니야. 개집이랍시고 들쑤실 생각을 못 하도록 만들 힘이지.”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단 며칠 만에 사람이 이렇게 변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