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가끔 생각했다. 내가 진짜면 상황이 어떻게 되는 걸까 하고.
그러니까, 누가 진짜든 이 상황에 그게 중요하냔 의미다.
나는 상처받았고, 백작가와 나는 영원히 끝났다.
물론 피해자와 가해자가 분명한 사건이긴 하다.
시에나는 상황을 조작했고 백작과 시온은 꾐에 빠져서 내게 몹쓸 짓을 했다.
나는 세 사람 모두에게 피해 입은 입장이고, 관계를 회복시킬 생각이 없으니 진실이 드러난들 달라질 건 없다.
‘저기 있네.’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내 문가를 주시하다가 내 등장에 벌떡 몸을 일으킨 백작과 시온이 보였다.
염치도 없지. 감히 내게 만남을 청하다니.
“안녕하세요.”
그들은 완전히 일어나지도 제대로 앉지도 못한 어정쩡한 자세로 나를 맞았다.
맞은편에 앉아 두 사람을 살폈다.
황궁에서 내게 가만두지 않겠노라 선전포고를 할 때까지만 해도 기세가 하늘을 뚫을 듯했는데 지금 백작은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초췌했다.
시온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초조하게 내 눈치를 살피다 음료로 목을 축이길 반복했다.
“…….”
백작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손을 달달 떨었다. 결국 시온이 말을 꺼냈다.
“…잘 지냈어?”
“우리가 안부를 물을 사이는 아니었을 텐데요.”
“그건…….”
시온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 했다.
종업원에게 음료를 시키자 오래 지나지 않아 커피가 나왔다.
커피를 홀짝거리자 향긋한 커피 향기에 날 선 신경이 가라앉는 듯했다.
이제껏 입을 다물고 있던 에스타리온 백작이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살이 많이 빠졌구나.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는 거냐?”
주제넘은 물음에 탁. 하고 커피잔을 내려놓자 시온이 움찔거렸다.
“보자고 하신 이유가 뭔가요?”
백작이 숨을 들이켰다. 그는 좀처럼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 했다.
아주 웃긴 일이다. 기세등등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저런 모습을 하는지.
“…….”
“할 말 없으시면 이만 가 볼게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시온이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이제야 진실을 알았어.”
“진실이요? 무슨 진실?”
시온이 말하는 진실이 뭔지 알지만 모르는 체를 해 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서다.
“그 애가 가짜였어.”
그는 괴로운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시에나에게 우리 모두 당했던 거야. 너는 진짜 셀레나였고 시에나는 우릴 속이기 위해 접근했던 사기꾼이었어.”
“네가 거짓말을 했다고 가리킨 것들이 모두 꾸며진 거였단 걸 뒤늦게 알았단다. 어떻게 감히… 백작가를 두고 그런 짓을 꾸미는 건지!”
나는 대답 대신 그들을 응시했다.
속았단 사실에 분노하는 건지, 그들이 내게 한 짓거리가 후회되어 저러는 건지 분간가지 않았다.
표정 변화도 없이 지켜보고만 있자 시온은 내가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했던지 말을 이어나갔다.
“기억이 없단 네 말을 믿었어야 했는데… 면목이 없다.”
이 상황이 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시에나가 감히 사기를 친 것처럼 그들은 감히 나를 찾아왔다.
그러면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비굴한 얼굴을 한다.
놀라울 정도로 우스운 사람들이었다.
“면목이 없다뇨. 정말 면목이 없다면 제게 편지하지 않았겠죠.”
시온과 백작이 동시에 움찔거렸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지금 이 자리에 왜 나왔는지 상기했다.
“알아요. 시에나가 거짓말을 했다는 거. 기억이 다 돌아왔거든요.”
“기억이 돌아왔단 말이냐?”
백작의 낯빛이 밝아졌다. 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은 주먹을 꽉 쥔 채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가 이야기를 꺼내기 전 내가 먼저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 상황은 전해 들었어요. 설사 시에나에게 당한 거라 할지라도 무슨 염치로 연락하셨는지 모르겠군요.”
“세, 셀레나…….”
시온이 말을 더듬었다. 백작이 마른침을 삼키며 어깨를 떨었다.
저들이 내게 한 짓을 분명히 기억한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굴욕감에 심장이 내려앉고 어깨를 타고 소름이 돋을 만치 선명하게.
“시에나가 거짓말을 했다고 한들 뭐가 달라지나요? 우린 이미 가족도 뭣도 아닌데.”
“그건-.”
나는 백작의 말을 끊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설사 시에나가 가짜고 제가 진짜라고 밝혀져도 시에나만이 백작님의 자식이라 생각하셨던 것 아닌가요?”
“아니, 아니다. 나는 정말로 그 애의 교활한 거짓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백작은 고개를 저어가며 애끊는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나로선 그조차 교묘한 거짓말 같았다.
나는 백작의 바닥을 보았다. 그런 이의 진심을 믿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거짓말을 믿었고, 그래서 그녀가 당신 딸이라 확신했으니 저를 이단심문소에 보낸 거겠죠.”
예상대로 백작은 무섭도록 표정을 굳혔다.
그는 숨 쉬는 것조차 멈춘 채 몸을 떨었다.
잘게 흔들리는 눈과 하얗게 질린 얼굴이 볼만했다.
백작은 하고픈 말이 많은 눈치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 못 했다는 게 정확할 테다.
사람이라면,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이단심문소에 관해선 변명하지 못 한다.
“돌이킬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착각일 거예요. 이미 한참 전에 선 넘으셨어요.”
“아가… 내가 미안하다. 부모란 작자가 제 새끼도 못 알아보다니, 얼마나 한심하고 무능한 일이냐. 하지만 우리가 부모 자식 간이란 건 달라지지 않는다. 제발 그렇게 냉담하게 말하지만 마렴.”
“하! 부모 자식 간이요? 핏줄이건 뭐건 세치 혀에 끊었다 붙었다하는 것도 부모 자식인가요?”
진심 어린 코웃음이 튀어나왔다. 시온이 불안한 듯 나를 주시했다.
백작도 시온도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떤 말을 하고 싶을까.
그들이 속에 무엇을 품었든 다 깨어 줄 용의가 있는데.
“설마 용서를 바란 건가요?”
“아냐. 어떻게 감히 그러겠어. 아버지께서 얼마나 후회하고 괴로워하시는지 몰라. 나도, 아버지도 네 얼굴을 볼 면목이 없지만 그럼에도 잘 지내는지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서… 그래서 연락했던 거야.”
“이제 와서요? 공자님도 백작님도 정말 우습네요. 아니지, 절 우습게 보는 건가요?”
“공자…….”
시온은 내가 자신을 공자라 지칭하자 벼락이라도 내리친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런 짓을 해 놓고 감히 얼굴 볼 생각을 하다뇨. 당신들이 내게 한 짓은 단순히 시에나에게 속아서 그런 거라고 합리화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에요.”
“…….”
“이단심문소가 그렇게나 편해 보이던가요? 억울하게 집에서 내쫓기게 만든 시에나에게 무릎 꿇은 건 또 어떻고요. 차라리 온몸의 뼈가 부러지는 게 낫지, 자존심을 버리는 게 그렇게 간단해 보이나요?”
두 사람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없어서 가족에게 더 의지했다.
그래서 에스타리온 백작과 시온을 정말로 사랑했다. 그래서 그들이 내 말을 들어 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둘은 시에나가 크루커스에 반응하는 걸 보자마자 나를 이단으로 몰아 지옥에 밀어 넣었다.
나는 이들에게서 받은 상처를 똑똑히 기억한다.
그곳에서 손톱이 부러지도록 신음했고 죽여 달라 기도했다.
이단심문소가 주는 고통보다 더 힘들었던 건, 믿었던 가족들이 나를 이단으로 만들었단 사실이었다.
이단심문소에서 받은 멸시와 아픔은 그들을 떨쳐내는 과정이었다.
믿음은 증오가 되었고 사랑은 냉담함이 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가족이란 울타리의 허상을 확인했다.
이들은 무너진 과거의 잔재이자 멍청하도록 순진했던 그 시절의 파편이다.
후회 없이 사랑했기에 미련도 없다. 그러므로 망설임 없이 이들을 산산조각 낼 수 있다.
“난 당신들이 지옥에 떨어지면 좋겠어.”
속에서 뜨거운 게 올라왔다. 내 음성에 분노가 실리는 게 느껴졌다.
이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고통에 신음하며 단박에 죽는 건 싫다.
둘은 과거의 제 행동을 후회하고 신음하며, 괴로워해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암담함을 느껴야한다.
“셀레나. 내 아가…….”
백작이 신음을 내뱉었다.
사과하면 적당히 울며 용서해 줄 거라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곱게 키운 아이가 마녀처럼 변한 게 놀라운 걸까?
이 모든 건 백작이 자초한 일이다. 그는 제 어리석음을 탓해야 한다.
“미안하다. 내가 다 미안하다. 네가 괴로워하는 게 당연하지. 널 이해한다.”
“교만한 소리 하지 마요. 당신은 날 이해 못 해요. 당신은 나처럼 이단심문소에 가지도 않았고 가족이라 믿었던 이들에게 외면당해서 나락에 떨어져 본 적도 없잖아요.”
백작이 침음을 삼켰다. 시온은 눈시울을 붉힌 채 테이블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아가. 미안하다. 아비가 못나서 그렇다. 시온은 아무 죄 없으니 나를 미워하렴. 사이좋던 남매를 갈라놓은 건 다 내가 어리석어서다.”
수습하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음에도 백작은 그 사실을 인정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원망을 해도 좋고 증오를 보여도 좋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다오. 외간 사내의 집에서 머무는 건-.”
“후회는 당신들의 몫이죠.”
나조차 놀라울 정도로 냉담한 말투였다. 깜짝 놀란 시온이 숨을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마시고 싶었다. 목을 타고 서늘한 음료가 내려가며 속을 식히는 상상을 하자 더욱더 갈증이 일어났다.
미지근하게 식은 커피를 쭉 들이마셨다. 커피 향이 나야 하는데 목을 타고 올라온 시큼한 위액 때문에 오히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와 사과한들 늦었어요. 후회는 당신들 몫이고 나는 영원히 당신들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오늘 그 말 하려고 나온 거예요.”
커피잔을 내려놓은 나는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시온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코를 훌쩍거렸다.
저들의 반응에 짜증이 났다. 아무렇지 않게 끔찍한 짓을 저질러 놓고 몇 마디 말만으로 어쩔 줄 모르다니.
다리가 부러져 우는 옆 침상의 환자보다 종이에 베인 제 손가락이 더 아프다고 하는 꼴이다.
“찾아오지 마요. 당신들 손으로 날 죽였잖아요. 그러니 죽었다 생각하고 살아요.”
“오, 셀레나, 제발… 아버지가 미안하다. 어떻게 해야 네 마음이 풀릴지 모르겠구나.”
“내겐 가족 같은 거 없어요.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고, 당연히 돌아갈 집도 없으니 헛꿈 그만 꿔요.”
두 사람이 나처럼 되면 좋겠다.
내가 증오에 시뻘게진 눈을 한 짐승이 된 것처럼 이들도 스스로가 만들어 낸 지옥에 울부짖는 짐승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 어디 한 번 실컷 후회하고 죽도록 힘겨워 하라지.
수백 번을 사과해도 미움 이외엔 아무것도 주지 않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