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당연한 일이지만 시에나가 크루커스를 가지고 도망친 이후 백작가는 난리가 났다.
뒤늦게 그녀를 쫓아 추적했지만 시에나가 더 빨랐다.
그녀는 곧장 신전으로 향했고 신전은 몇 시간만에 성녀가 나타났노라 공표했다.
그렇게 성녀는 신전 소속이 되었고 성녀의 손에 들린 크루커스 또한 신전의 관리 하에 들어갔다.
즉, 크루커스를 되찾는 게 쉽지 않아졌으며 시에나를 벌하기가 힘들어졌단 거다.
“우리가 사기꾼에게 당했구나…….”
에스타리온 백작이 텅 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에게 모든 사실을 전해들은 시온은 멍하니 바닥을 응시했다.
사기꾼에게 당해서 부당하게 제 누이를 무릎 꿇렸다.
셀레나에게 퍼부었던 모욕이 매 순간 머릿속을 맴돌며 그를 괴롭혔다.
가족이라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아니, 남에게도 해선 안 되었다.
제 원수라 믿었기에 등을 돌렸고 마음껏 분노했는데, 그 모든 게 사기꾼에게 당해 제 가슴에 칼을 꽂는 행위였단다.
스스로의 멍청함에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라 시온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토해 냈다.
“하, 하하.”
돌이킬 수 없다. 그건 누구보다 그들이 잘 알았다.
시온은 손바닥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소리 없는 흐느낌이 나오며 어깨가 잘게 떨렸다.
바보 등신처럼 교활한 이간질쟁이에게 눈이 가려져서 제 핏줄도 못 알아보고 악마 같은 짓을 해 버렸다.
애간장이 끊어질 듯한 후회에 턱턱 숨이 막혔다.
그리고 그건 에스타리온 백작이야말로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제 새끼였다.
어려서부터 몸이 안 좋아 전전긍긍하며 키웠고 납치를 당한 뒤론 사랑으로 심장이 녹아내릴 듯 애정을 퍼부었다.
목숨을 내줘도 아깝지 않을 아이이건만 세 치 혀가 부리는 이간질에 넘어갔다.
제 머리가 어떻게 되었던 걸까. 아니면 죽을 때가 되어서 총기가 사라졌던 걸까.
에스타리온 백작에게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참고 또 참았지만 미처 눌러 삼키지 못한 고통이 새어 나온 것이다.
“흐으윽.”
엎지른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다. 그런데 그들은 단순히 물을 엎지른 게 아니다.
오물 속에 내던져 산산조각을 내고 저주를 퍼부었다.
조각난 물 잔을 수복하려는 셀레나에게 어찌하였던가.
퍼부은 독설을 뒤로한다 쳐도 이단심문소에 이어 이단심문회까지 개최하도록 한 건 정말 끝을 보았다고 밖엔 설명할 수가 없다.
“몸. 몸은 괜찮은지 알아봐야겠다.”
울며 말한 그 말이 스스로에게 말한 건지 시온에게 말한 건지 분간가지 않았다.
본래 건강이 좋지 않은 아이인데 악명 높은 이단심문소까지 들어갔으니 얼마나 고생했을지 알아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에스타리온 백작은 과거의 자신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제 기억을 지우고 또 지웠을까.
아비란 작자가 그것도 모른 채 새끼가 아니라 믿어 제 손으로 내쳤다.
“으흐윽.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
“내 새끼… 우리 아가… 아비가 미안하다. 셀레나, 못난 아비라 미안해…….”
“아버지. 그럴 염치가 없다는 걸 알지만… 제가 셀레나에게 편지를 해 보겠습니다.”
“애야. 시온. 우리가 감히 어떻게 사과를 한단 말이야. 그 애의 가슴에 두 번 칼을 꽂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시온은 눈물범벅이 된 제 아버지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의 시선에 에스타리온 백작은 셀레나가 납치된 때보다 더 끔찍이 괴로워 보였다.
“염치가 없단 이유로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사과하는 게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좋지 않겠습니까? 감히 용서를 바라진 않습니다. 아버지. 저는, 저는…….”
애써 담담한 어조로 설명하던 시온은 끝내 슬픈 숨을 토해 내었다.
이제 와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셀레나에게 무슨 말을 한들 변명이 될 게 뻔하다.
하지만 사과해야 했다. 물론 셀레나가 바라지 않는다면 못 하겠지만, 기회를 준다면 기꺼이 무릎이라도 꿇으리라.
“…셀레나에게 연락을 취해 보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없는 용기조차 짜내어야겠지만요.
시온은 쓰러질 듯 힘겨워하는 아비를 보며 바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닫았다.
이 모든 게 거짓이길 그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며.
* * *
기억은 에이든과 내 사이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그중 가장 큰 변화라면 우리 사이에 미묘한 거리감이 사라졌단 걸 테다.
에이든과 함께 있을 때면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사소한 대화에 까르륵 웃던 그 시절로.
“셀레나 씨. 분위기가 많이 바뀌셨어요.”
점심 식사 후 함께 저택을 거닐며 산책하던 중 에바가 말했다.
옆에 있던 베키도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맞아요. 예전에 비해 편안해 보여요.”
“그런가요?”
기억이 돌아왔을 뿐인데 좋아 보인다는 말을 들으니 머쓱해졌다.
“공작님과도 부쩍 사이가 좋아 보이세요. 그래서인지 두 분 다 표정부터가 다른걸요.”
“그래 보였어요?”
에이든은 에이든대로 나를 속였단 마음의 짐을 덜었고, 나는 나대로 그에게 가지고 있던 죄책감을 해소했다.
그러니 우리 둘 다 편안해진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게 되었다.
길 저편에 에이든이 있었다. 그가 나를 발견하고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공작님을 저렇게 환히 웃게 만드는 건 셀레나 씨가 유일할 거예요.”
“저도 동의해요.”
베키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에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에요. 에이든이 무뚝뚝하긴 하지만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은 아닌걸요.”
“오… 셀레나 씨에겐 무뚝뚝한 정도로군요.”
에바가 납득했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더 사용인들에게 에이든이 어떤 이미지인지 알 수 없어졌다.
“황궁에 간 줄 알았는데.”
“방금 돌아왔지.”
미소 짓는 그의 얼굴에 흉터가 선명히 드러났다.
에이든이 에바와 베키를 힐끔 보며 은근히 내 옆으로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같이 가자. 나도 소화시키던 참이었어.”
“그래, 그럼-.”
“큼. 흠. 그럼 두 분이서 산책하세요.”
“베키?”
“에바와 전 오늘 이불 빨래를 하러 가야 해서요. 먼저 가 볼게요!”
베키가 에바를 붙들고 빠르게 사라졌다.
에이든은 내가 얼떨떨해할 시간도 주지 않고 제 이야기를 꺼냈다.
“방금 황실 검술 대회에 신청서를 내고 오는 길이야.”
“검술 대회에?”
“검술 대회에서 우승하면 폐하에게 한 가지 소원을 빌 수 있잖아.”
“무슨 소원을 빌고 싶길래?”
“몸은 좀 어때?”
대답 대신 다른 소리를 꺼내는 게 수상쩍었다.
구체적인 소원을 밝히는 게 쑥스러운 모양이다.
“이제 괜찮아.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
“기분은?”
“기분도 좋아. 우울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아. 기억도 잘 정리되고 있어.”
그는 이제까지와는 비교되지 않는 세심한 태도로 나를 챙겼다.
이제까지 보여 준 딱딱한 모습은 연기였던 것처럼 말이다.
시선이 마주치자 에이든은 내게 흐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걸음을 걷는 내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기억을 떠올린 뒤 에이든은 부쩍 밝고 명랑해졌다.
어린 시절엔 지금처럼 활기차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래도 보기 좋은걸.’
시에나가 크루커스를 가지고 도망쳐 성녀까지 된 상황에, 에이든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건 기쁜 일이었다.
‘백작가에도 모든 게 알려진 거야. 그러니 도망을 친 거겠지.’
시에나가 정말로 아픈 이들을 돕기 위해 신전에 가진 않았을 거다. 백작가에서 크루커스를 신전 측에 내어줄 리도 없고.
상황이 흥미롭게 돌아가고 있다. 성녀가 병든 이들을 돕겠다고 선포했기 때문에 백작가는 크루커스를 내놓으라 요구할 수 없었다.
신전 측에서 성녀를 전적으로 밀어줘서, 크루커스를 되찾으려고 했다간 신전과 척을 지는 것도 감당해야만 했다. 민중의 반발은 당연한 거고.
나는 백작과 시에나, 두 쪽을 칠 생각이다.
‘그러니 어서 이곳에서 나가서 새집을 구해야겠지.’
나 때문에 괜히 에이든이 피해를 보는 건 싫었다.
“검술 대회가 시작되기 전엔 집을 구해서 나갈 생각이야.”
“뭐?”
걸음을 멈춘 에이든이 굳은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미간 사이에 희미한 주름이 졌다.
“혼자 지내는 건 위험해. 물론 나랑 지내면 이상한 소문이 나서 힘들 수 있다는 건 알지만… 정 나가야겠다면 옆집으로 이사 오는 건 어때?”
칼립소 저택에는 옆집이 없었다.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는 지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나 때문에 에이든이 정치적 공격을 받을까 염려되는데, 정작 당사자는 그 문제에 대해 자각이 없었다.
“혹시 내가 네 명예를 해치는 걸까? 그래, 그렇겠어. 너만 한 사람이 나 같은 놈이랑 있으면 네 평판이…….”
“그런 게 아냐. 네가 공격받을까 봐 그러는 거야.”
“내가 공격한다고 순순히 당해 줄 놈이야?”
에이든은 별 희한한 말을 다 듣는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당황해 얼굴을 붉혔다. 그가 투박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자, 잠시만. 날 걱정한 거야?”
“걱정이 되지. 어떻게 안 되겠어.”
“그런…….”
“에이든?”
내 부름에 그가 큼, 큼. 목을 가다듬었다.
표정을 지우려 얼굴에 힘을 줬지만 슬며시 올라간 입꼬리를 감추진 못 했다.
“일단 그 문제는 조금 더 생각해 보도록 해. 네가 혼자 지내는 건 걱정돼서 안 되겠어.”
반발하기 위해 입을 여는데 때맞춰서 프레드 씨가 왔다.
그가 내게 익숙한 인장이 찍힌 편지를 내밀었다.
“에스타리온 백작가에서 셀레나 씨에게 보낸 겁니다. 백작가의 시종이 직접 와서 전하더군요.”
에이든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반전되었다.
그는 당장에라도 토할 것 같은 얼굴로 편지 봉투를 노려보았다.
프레드가 나가고 난 뒤 망설임 없이 봉투를 뜯었다.
에이든이 그런 나를 만류했다.
“네 기분을 상하게 만들 거야. 읽지 말고 불태워 버려.”
“괜찮아. 고작 편지인걸.”
이깟 편지로 마음이 상하기엔 그간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편지를 읽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