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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74화 (75/134)

<74>

나는 에이든의 얼굴에 난 흉터에 시선을 빼앗겼다.

정신이 들어? 물음을 무시하며 손을 뻗어 상처가 났던 뺨을 쓸었다.

내 손길에 에이든이 흠칫했다. 손끝이 흐릿한 흉터를 더듬어나갔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끔찍한 지옥 속에 난 흉터가 웃을 때 선명해지다니.

“…셀레나?”

에이든이 나를 붙잡아 앉혀 주었다. 그러자 그가 더 분명히 보였다.

어른이 되며 몰라보게 달라졌지만 자세히 보면 어릴 때 그 모습이 보였다.

선명한 눈썹이나 새까만 눈, 고집스런 입매, 뾰족한 코끝…….

눈이 시려지며 앞이 흐려졌다. 나는 단박에 에이든의 목을 붙잡아 끌어안았다.

“세, 셀레나?”

“살아 있었어…….”

“아…….”

“네가 죽은 줄 알았어. 네가 죽어서, 나 때문에 죽어서… 널 두고 도망간 걸 후회했어. 스스로가 얼마나 증오스러웠는지 몰라. 어떻게 그렇게 혼자… 살아 있었다니 다행이야. 이렇게 살아 줘서 고마워. 정말 고마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만큼 횡설수설이었지만 이런 나를 자제할 수가 없었다.

수많은 문장과 수백 수천 번 깨어진 마음이 쏟아져 나왔다.

내 비열함과 비겁함, 견디지 못한 죄책감이 방울방울 눈물지어졌다.

에이든이 어색하게 내 등을 툭툭 두드리더니 이내 부드럽게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도망가라고 했잖아.”

“에이든…….”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그게 아니야. 도망가면 안 되는 거였는데… 내가…….”

울음 때문에 발음이 뭉개져서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에이든이 살아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신께 감사드리고 또 감사드릴 정도로 가슴이 벅차다.

“네가 도망가서 안심했었어. 나야말로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

나조차 내가 밉고 증오스러운데, 넌 널 두고 간 내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니.

울음에 삼켜진 말이 입 안에서 엉켰다.

나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가 다시 울기를 반복했다.

에이든이 내 등을 쓸어내리며 작게 웃었다.

웃음을 이해할 수가 없다. 날 원망해야 하는 게 정상 아닐까. 어째서… 어떻게…….

“줄리아가 다 죽어가는 나를 팔며 국경지대로 보내졌기 때문에 네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어. 늘 네가 케빈에게서 안전하게 도망쳤을지 궁금했었는데.”

“난 아주 안전하게 돌아갔어. 너도 함께 갔어야 했는데…….”

어찌나 울었던지 코가 막혀왔다. 눈은 퉁퉁 부어서 도무지 제대로 떠지질 않았다.

축축한 뺨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었다. 등에 어릴 때와 달리 커다래진 에이든의 손이 느껴졌다.

“네가 죽었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어. 그래서, 그래서…….”

“다 괜찮아. 옛날 일인걸.”

과거에 내가 너를 두고 도망간 것? 너를 잊었던 것? 아니면 케빈에 의해 입은 상처? 그게 괜찮다고?

나는 괜찮지 않다. 내가 너무 밉고 원망스럽다. 내가 기억을 거부하지 않았다면 에이든에 대해 추적했을 수도 있다.

그가 죽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전쟁터에서 궂은일을 겪을 필요가 없도록 어떻게든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켜 줬을 테다.

나는 에이든을 두 번 버린 거였다. 아니, 세 번이다. 기억을 두 번 지웠으니까.

“내가 비겁했어. 내가 너무 나약해서 너만 고생했어.”

“셀레나, 셀레나.”

에이든이 내 어깨를 힘주어 붙들었다. 그리곤 억지로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새까만 눈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지만 어렸던 그때처럼 고집스레 빛났다. 그가 경고하듯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넌 잘못한 게 없어.”

“난-.”

“아니, 넌 잘못한 거 없어.”

“에이든.”

“내 의지로 케빈을 막아 세웠던 거야. 널 도망치게 만들고 싶었고 넌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갔어. 그 덕분에 난 천한 노예 새끼가 아니라 널 구한 영웅으로 살 수 있었어.”

“…….”

“물론 난 전쟁 영웅이기도 한데, 아무튼.”

나름의 농담을 던진 그가 곱게 눈매를 접었다. 선한 눈웃음 때문에 또 가슴이 울렁거렸다.

“노예로 산 게 고되고 힘들긴 했지만 그 삶에 네 책임은 없어. 설사 네게 책임이 있다 해도 난 너 원망 안 해. 우린 어렸잖아.”

“…차라리 날 비난해.”

“너야말로.”

“그게 무슨-.”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기억과 함께 감정이 폭풍처럼 휘몰아쳐서 머리가 복잡하다 못 해 터질 듯했다.

그래서인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에이든이 혀로 마른 입술을 쓸더니 고백했다.

“네가 에스타리온 백작가에서 쫓겨난 걸 보고도 진실을 모른 척했어.”

“…….”

“난 아무것도 모른 척 네 옆에 있었어.”

“아…….”

탄성과 함께 모든 게 짜맞추어졌다. 손이 바들바들 떨려 왔다. 그와 함께 에이든의 안색도 창백해져갔다.

그는 처음부터 내가 이네트인 걸 알아보았다. 그리고 모든 걸 알지만 침묵하길 택했다. 왜냐면…….

“널 갖고 싶었거든.”

쓰게 웃는 미소가 지독했다.

* * *

시에나는 마지막으로 짐을 확인했다.

가방 속에는 그간 에스타리온 백작가에서 모든 패물과 돈이 가득했다. 이만한 돈이면 어디 가서 굶어 죽진 않을 테지.

글도 배웠고 귀족 사회에서나 배울 수 있는 예법과 에티튜드도 몸에 익었으니, 운이 좋으면 시골이나 이웃 나라에서 멸문 귀족가의 마지막 자손이라 거짓말을 하며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그쪽 귀족 사회에 받아들여져서 괜찮은 남자를 만나 손에 물 한 번 묻히지 않는 삶을 이어나갈 수도 있다.

“좋아. 완벽해.”

비밀리에 마차도 섭외해 두었고 갈 곳도 정해졌다.

우선은 서부의 시골 마을에 숨어지내다가 국경을 넘어 해외에서 삼사 년쯤 버틸 생각이었다.

‘모든 게 밝혀지기 전에 얼른 도망가야지. 안 그럼 무슨 벌을 받을지 몰라.’

아무리 친딸이 아니라고 착각했다지만 평생 키운 딸을 이단심문소에 집어넣은 게 에스타리온 백작이다.

그가 얼마나 잔혹한 사람인지 지켜보았기 때문에 절대 그를 화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거기다가 그에겐 잔혹함을 실천할 권력이 있다.

‘셀레나 때문에 이단심문회를 개최하도록 만들었을 땐 온몸에 소름이 돋았었지.’

어쩜 저렇게까지 지독할 수 있나 싶은 게 에스타리온 백작이었다.

시온은 또 어떤가.

제 아비처럼 잔악하게 힘을 행사하지 않을 뿐이지 이단심문소에서 나와서 다 죽어가는 셀레나를 제게 무릎 꿇린 게 시온이다.

셀레나가 순해서 그 가족들도 마냥 만만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조금 멍청할 뿐, 한없이 잔인해질 수 있는 게 에스타리온 백작가의 사람들이었다.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아버지.”

시에나는 의식 없이 누워 있는 루카스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평범한 사람이 이렇게 십 년이 넘게 누워 있으면 근육이 다 빠져서 비쩍 말라야 한다.

음식을 섭취하지 못 해 굶어 죽었어야 하지만 에스타리온 백작가에는 크루커스가 있었다.

백작은 크루커스를 사용해서 성수를 만들어 내어 루카스의 생명을 유지시켜 왔다.

“나를 진작 당신 딸로 입적시켰다면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거야.”

엄마, 줄리아와 케빈이 제 아비를 죽인 그날, 줄리아는 다 죽어가는 에이든을 노예상에게 팔아넘긴 돈으로 멀리멀리 도망을 쳤다.

아비가 죽었으니 생활비나 양육비를 뜯어낼 수도 없었다. 그래서 모녀는 정말 죽도록 일했다.

시에나의 어미는 도박 중독이라 빚을 져서 야반도주를 하기도 수 번, 줄리아가 병들어 죽고 난 뒤 하녀로 일하던 귀족가에서 우연히 듣게 되었다.

에스타리온 백작가의 고명딸이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 하는 백치라고.

그래서 도박을 해 보았고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그날부터 시에나 에스타리온이 되었으니까.

그럼에도 성이 차지 않았다. 같은 에스타리온인데 곱게 자란 셀레나를 보니 질투와 열등감이 차올라서 몇 번 물었는데도 어쩌지 못 하기에 아예 집에서 내쫓았다. 그 또한 아주 쉬웠다.

이 모든 일은 그녀가 루카스의 딸로 입적되어 자랐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사건이다.

제 어미도, 자신도 순전히 벌어먹고 사는 게 힘들어서 시작된 일이니까. 그러니까 잘못한 건 제 아비지 자신이 아니다.

“잔인도 하지. 어떻게 아직도 이렇게 숨 붙이고 살아 있을 수 있는 건지. 당신을 보는 내 마음이 어떻겠어. 얼마나 괴롭고 얼마나 불안하겠냐고.”

시에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의 손이 루카스의 목을 쓸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제 아비는 영면에 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시에나는 그러지 않았다. 과거를 기억하는 게 제 아비가 유일한 존재라면 그렇게 했을 테지만 이미 황태자가 모든 걸 알고 있다.

에스타리온 백작가가 진실을 알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인 만큼 지금은 도망치는 게 더 급했다.

“정말 나를 당신 딸로 생각한다면 제발 영원히 깨어나지 마.”

다정하게 루카스의 머리를 쓰다듬은 시에나는 가방을 들고 방을 나왔다.

가방을 들고 다니는 걸 저택 사람들에게 들키면 안 되었기에 그녀는 창문 너머로 가방 먼저 떨어트렸다.

풀숲에 툭하고 떨어진 가방을 확인한 뒤엔 아멜리아에게 놀러 가는 것처럼 집을 나오려고 했다.

막 들어온 에스타리온 백작과 마주치기 전엔 말이다.

“…어딜 가는 것이냐?”

시에나는 단박에 뭔가 아주 잘못되어간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을 보는 눈빛, 목소리, 퉁퉁 부은 눈과 시꺼메진 안색에서 큰일 났다는 직감이 들었다.

‘모든 걸 알았구나.’

하지만 그녀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았다. 평소처럼 화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멜리아와 약속이 있어서요. 잠시 다녀올게요.”

시온과 꼭 닮은 녹안이 그녀를 꿰뚫을 듯 주시했다. 시에나는 등에 우수수 소름이 돋는 걸 꾹 참았다.

셀레나에게 보인 칼끝이 제게 향하는 순간, 그녀는 무참하게 난자당할 것이다.

“헌데 황궁에서 무슨 일 있으셨나요? 얼굴이 많이 상하셨어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보다 오늘은 나가지 않는 게 좋을 듯하구나.”

“네? 하지만 아멜리아와 약속했는데…….”

“시에나.”

나직한 부름에서 그녀를 향한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시에나는 이를 악물었다.

“정말 무슨 일이 있으신 건 아니죠?”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시온에게 내 방에 들르라고 전해 주거라.”

“앗, 네.”

백작은 피로한 기색으로 그녀를 지나쳐 방으로 갔다. 그녀는 할 수 없이 시온의 방으로 향했다.

본래 시온은 기사단에 출근해서 집을 비웠어야 하는데 근래 들어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오후가 되면 금방 돌아왔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시에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방문에 귀를 갖다 대었다. 그러자 아주 작게 말소리가 들렸다.

“…줄리아의 행적에 대한 서류입니다. 보시면…….”

시에나에게 들린 건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숨을 들이켠 그녀는 조용히 뒷걸음질을 쳤다.

얼른 도망가야만 했다.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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