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에이든은 매 순간 속이 바짝바짝 타서 죽을 지경이었다.
마누엘 사제는 마법이 풀리며 반동으로 의식을 잃은 거라는데, 무슨 빌어먹을 반동이 사흘이나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드냔 말이다.
“…제발…….”
눈만 뜨면 좋겠다. 정신이 든 셀레나가 모든 기억을 떠올려서 그를 비난해도 괜찮다. 어차피 그가 잘못한 것이니까.
노예로 살던 곳에서 전쟁이 터졌다. 살기 위해 무기를 들었고 정신을 차렸을 땐 황태자의 아래에서 일하고 있었다.
황태자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지만 주변의 다른 이들은 달랐다.
그들에게서 ‘셀레나 에스타리온’이라는 이름이 나왔을 때 정말 많이 안도했었다.
너는 살아남았구나. 그래서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구나.
‘도망가!’
그날 케빈의 앞을 가로막으며 간절히 바랐다. 이네트가 살아남아 집에 돌아가길.
부모도 모르는 천한 노예로 태어나 천대만 받고 자란 그에게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 준 게 이네트였다.
그녀는 제게 노예 놈이라 욕하지도 않았고 무식하다고 무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친구라고 대해 주었다.
그것이 얼마나 시리도록 기쁜 일인지, 단 한 번도 노예로 살아 보지 않은 이들은 이해할 수 없을 테다.
“내가 비겁해서 미안해. 그냥 내가 다 털어놓을걸.”
셀레나 덕분에 노예살이를 하며 제법 똑똑하다는 평을 받았다. 고작 이름을 쓸 줄 안다는 것만으로 말이다.
꼬부랑꼬부랑 기어 다니는 모양새가 어떻게 제 이름을 발음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꽤나 자랑스러웠었다.
‘네가 노예라도 우리는 좋은 친구야.’
아주 오래전 대화인데 이네트가 한 한 마디 한 마디가 잊혀지지 않았다.
설사 그것이 어린 마음에 내뱉은 실수라한들 그는 평생 그 말에 의지해 살았다.
나 같은 놈을 좋은 친구라고 해 주는 사람이 있어. 내가 아무리 천해도 날 환영해 주는 사람이 하늘 아래 한 명은 있다고.
“제발 일어나…….”
셀레나의 손을 붙들고 애원하는 목소리는 곧 죽을 듯 간절했다.
그렇게 헤어진 뒤 평생 이네트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어린 시절 짧은 추억이 삶의 이정표가 되었다.
그러다가 이네트가 무사히 집에 돌아갔단 사실을 듣는 순간 환희가 온몸을 강타했다.
노예에서 벗어나 황궁에 갔을 때, 만발치에서 셀레나가 된 이네트를 확인했다.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신비로운 금빛 눈은 흔한 게 아니기도 하거니와 어린 시절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아주 짧게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자신을 알셀아보지 못했다.
처음엔 자신이 많이 변해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여자들과 달리 남자들은 2차 성징이 지나면 놀랍도록 달라지니까. 하지만…….
“기억이 없다고?”
수도 귀족 사회에서 셀레나 에스타리온이 어린 시절의 기억이 없다는 건 유명한 일이었다.
인맥이 없는 그조차 그토록 쉽사리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녀가 자신을 기억치 못하기에 앞에 나설 수 없었다. 그녀에 대한 소식에 귀를 귀울이며 어떻게 지내는지 소문이나마 주워듣는 수밖에 없었다.
셀레나가 시에나 때문에 집에서 쫓겨난 걸 알게 되었을 때, 그녀는 이미 이단심문소에 들어가 있었다.
“젠장!”
진작 아는 척을 할걸. 그랬다면 이단심문소에 끌려가진 않았을 테다.
엉망진창이 된 그녀를 데리고 집에 오는 날, 속으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이네트는 절대 모를 테다.
그리고 열에 들끓어 정신을 차리지 못 하는 모습을 보며 무슨 마음으로 버텼는지도 모를 것이다.
‘내가 왜 그들에게 너를 보내야 해. 널 이렇게 만든 놈들이 어떻게 가족이야.’
이네트의 옆을 계속 맴돌고 싶어서 자신이 아는 걸 감췄다.
어른이 된 이네트와… 셀레나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아. 가까워진다는 단어는 그가 가진 검은 마음에 비하면 지나치게 말끔한 단어리라.
갖고 싶었다. 감히, 그녀를 소유하고 팠다.
비열하고 치졸해져도 좋았다. 언제고 모든 걸 알게 된 이네트에게 버림받게 되어도 괜찮았다.
순간이 지독히도 달콤하여 그는 눈먼 장님이 되어 절벽을 향해 뛰었다.
그는 행복한 부나방이었고 세상에서 가장 충만한 노예였다. 그리고 더없이 기쁜 남자였다.
그러나 이네트가 이렇게 정신을 차리지 못할 줄 알았다면… 그랬다면 그런 선택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미안해… 미안해, 이네트…….”
에이든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제까짓 게 감히 욕심을 내어서 이런 상황이 되었다.
이렇게 건강하게 이네트와 재회한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는데…….
“어서 일어나서 날 비난하고 질책해. 넌 그래도 돼.”
누워 있는 셀레나보다 에이든의 얼굴이 더 수척했지만 그는 그녀가 깨어나기만을 기도했다.
그의 간절함이 닿았을까. 에이든이 붙든 셀레나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조그만 반응에도 화들짝 놀란 에이든이 숨을 들이마셨다. 셀레나의 얇은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그리고.
“…에이든?”
잠긴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에이든’이라고.
* * *
“지난 번에 이런 말을 하셨었지요. ‘어째서 그 애가 자네의 딸임을 믿지 못 하고 내친 거지’라고. 그런 말을 한 의중을 이해하지 못 하겠군요.”
에스타리온 백작이 며칠 전 나눈 대화를 거론한 건 사과를 받기 위함이었다.
그날 그들의 대화는 셀레나의 이단심문회 종료 소식이 전해지며 허무하게 끝이 났었다.
셀레나가 딸이라니. 어디서 허튼소리를 들었거나 그 아이의 거짓말에 농락당하고 있는 거겠지.
에스타리온 백작은 황태자가 생각보단 순진하다 생각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
“어떤 의도로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까?”
“셀레나는 기억을 잃은 체했던 게 아니었네.”
“사기꾼에게 당하셨군요.”
“그 애의 기억을 봉인한 건 나였다.”
“…예?”
백작은 자신이 들은 게 헛소리는 아닌지 의심해야 했다. 황태자가 셀레나의 기억을 봉인하다니?
“충격으로 인해 어린 시절을 기억하기 못 해서 황실의 성수를 마시게 했지. 그랬더니 기억을 회복하더군.”
“그게 무슨…….”
“기억이 너무도 잔혹해서 감당치 못하기에 마법사를 동원해 기억을 통째로 봉인시켰다.”
백작은 멍한 얼굴로 황태자가 한 말을 곱씹었다. 그러다가 모든 것을 부정하듯 고개를 내저었다.
“이상한 말을 하시는군요. 저는 믿을 수 없습니다.”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한 게 아니야. 백작이 알아야 하는 건 셀레나가 그대의 딸이었단 거지.”
“아뇨. 그 애가 제 딸이었다면 전하께서 이제껏 사실을 밝히지 않은 이유는 뭐랍니까!”
백작은 불안과 공포를 분노로 소화해 냈다.
물론 그는 황태자의 주장을 믿지 않았다. 믿을 수도 없고 믿어서도 안 되는 말이다.
하지만 황태자는 가벼운 이가 아니었다. 이유 없는 말은 삼가는 사람인 걸 잘 알아 백작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제 새끼조차 못 알아볼 줄은 몰랐으니까.”
“필립소!”
에스타리온 백작이 벼락같은 노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황태자가 짧게 한숨을 쉬며 증거를 내세웠다.
“셀레나가 알려 준 기억 속엔 자네의 동생을 그리 만든 범인이 있었지. 그녀는 그날 그 현장 속에 있었고 저 때문에 사람이 죽어가는 걸 외면하고 도망쳤다고 했네. 그녀가 기억을 받아들이지 못한 건 그 때문이었지.”
“…루카스가요?”
백작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셀레나가 납치되고 함께 딸아이를 찾던 어느 날, 루카스는 죽기 직전의 빈사 상태가 되어 돌아왔다. 이유도 범인도 모른다.
자식은 사라지고 의지하던 동생은 죽음의 경계에 놓여 가문에서 영원히 ‘봉인’하라 전해지던 성물을 이용하기까지 했다.
“모두 헛소리입니다. 사기꾼이 지어낸 거짓말에 일일이 반응할 필요 없습니다! 이번 일은 정식으로 황실에-.”
“셀레나가 다섯 살 되던 해에 단둘이 성물을 보관하던 밀실에 들어가서 크루커스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었지. 그러자 그녀는 어째서 죽어가는 모친에겐 쓰지 않았냐 물었고 자네는 이리 대답했네.”
“…….”
백작은 완전히 허옇게 질렸다. 누군가 목을 조르기라도 하듯 졸도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평생 지켜 주겠노라 맹세하였는데 나는 에스타리온이란 이름에 짓눌려 죽음이 네게서 어머니를 앗아가는 걸 눈 뜨고 지켜보았구나. 나는 평생 그날을 후회한단다.”
“그, 그걸 어떻게…….”
“기억을 찾은 셀레나가 그때 이야기를 꺼내며 내게 고백하더군.”
황태자는 탈진하다 못 해 텅 비어 버린 눈을 한 셀레나를 떠올렸다.
‘내게 크루커스가 있었다면 나는 그 아이를 지킬 수 있었을까요?’
긴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주 잠깐 함께했던 소년의 죽음에 괴로워했다.
그는 그것이 쓸데없이 순진하고 필요 이상으로 순수하다 여겼다.
“시에나는 납치 공범자의 딸이자 백작의 동생인 루카스의 사생아였지. 셀레나가 들은 대화에 따르면 제 내연녀가 공범자인 건 모르는 듯했네. 딸아이를 보러 왔다가 우연히 셀레나를 보게 되었고 그 때문에 살해미수를 당한 거였지.”
“…….”
“시에나가 아는 것들은 셀레나의 옆에서 많은 것들을 주워들었기 때문일 테지.”
“…지금까지 말한 것들에 한 치의 거짓도 없다고 맹세하실 수 있습니까.”
“오, 맹세뿐일까.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 보게.”
황태자는 명백히 조롱을 퍼부은 거였지만 백작은 분노할 여유도 없었다.
그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휘청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멀쩡한 딸아이를 내쫓고 이단심문소에 집어넣었다.
갖은 모욕을 퍼부었고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하려고 이단심문회까지 열었다.
제가 얼마나 한심한 아비였으면 과거의 기억에 괴로워하면서도 아비를 찾긴커녕 기억을 지우길 택했을까.
백작은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이게 꿈이었으면 했다.
어떻게… 어떻게 제 자식을 못 알아봐서 이 사달을 냈단 말인가.
“나, 나는 대체… 대체 무슨 짓을…….”
제 손으로 애지중지 키운 딸아이를 이단심문소에 보냈다. 백작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이건 있어서 안 되는 일이었다.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을 제 손으로 저질렀다.
“백작. 지금 자네가 할 일은 그리 우는 게 아니라 셀레나에게 어떻게 용서를 빌지 고민하는 것이야.”
“…제가 어떻게 감히 용서를 빈답니까… 제가 어떻게… 끄흐으윽.”
제 아이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백작은 하늘이 무너진 듯 슬피 울었다. 염치가 있다면 용서란 단어를 입에 올릴 수 없다.
“용서하지 말게.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 낸 백작의 원수를.”
샐레나도 백작도 고통스러워할수록 납치 배후를 향해 칼날을 들이밀 테다.
그러니 그는 그들의 복수심을 이용하기만 하면 된다.
황태자는 떠오르는 미소를 지우며 백작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