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70화 (71/134)

<70>

에이든은 누군가 제 손을 붙잡은 게 어색한 눈치였다.

그 증거로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눈에 띄게 어색한 숨을 내쉬었다.

에이든이 나와 손을 잡는 걸 내켜 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나는 그렇게나마 누군가의 온기를 붙들고 싶었다.

“엄마아! 이네트 일어났어!”

홱 문이 열리더니 시에나가 나타났다.

그녀가 소리를 꽥 지르자 에이든이 내 손을 떨쳐 냈다.

곧 줄리아가 나타나서 내 상태를 확인했다.

줄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혀를 쯧쯧 찼다.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놀란 줄 아니?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에휴. 말을 말자.”

마침 에이든이 묽은 수프를 떠 왔다.

그러자 줄리아는 에이든에게 뒷정리까지 하라고 명령한 뒤 제 방으로 돌아갔다.

시에나가 내 옆에 앉아서 땀투성이가 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야, 에이든. 잘 봐. 나랑 이네트랑 똑같이 생겼지?”

“닮긴 했어.”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닮았지?”

시에나가 내 옆에 바짝 붙었다.

내가 수프를 마시려고 고개를 숙이자 내 머리통을 붙잡아 억지로 끌어올렸다.

“내가 이네트인지, 이네트가 나인지 분간이 안 가지? 그지?”

“너희가 닮긴 했어도 똑같이 생기진 않았어.”

“무슨 소리야! 우린 쌍둥이처럼 똑같아.”

에이든의 눈이 가늘어졌다. 시에나가 내 고개를 휙휙 돌리며 내 얼굴을 여러 각도에서 확인했다.

“우리 엄마 말이, 몇 년만 시간이 지나면 내가 이네트인 척을 해도 못 알아볼 거래. 그 정도로 똑 닮았다고 했어.”

“시에나. 나 배고파…….”

“잠시만 있어 봐.”

“야. 너 나가. 배고프다잖아.”

에이든이 나서서 시에나를 침대에서 끌어냈다.

그러자 시에나가 성질을 내며 에이든을 밀쳤다.

“노예 주제에 누구 몸에 손대는 거야! 매질이라도 당하고 싶은 거야?”

그 말에 에이든은 입을 꾹 다물고는 시에나를 노려보았다.

아직 한참 어린 나이인데도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시에나는 조금 겁에 질린 눈치였다.

그녀는 턱을 든 채 에이든과 눈싸움을 하다가 줄리아의 방으로 건너갔다.

“애미나 그 딸년이나 둘 다 망할 년이야.”

“나, 나쁜 말이야.”

“무슨 상관이야. 어서 수프나 마셔.”

누가 에이든을 열한 살 소년으로 볼까.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에 아홉 살 인생의 때가 묻어 있었다.

우리는 신분, 성별, 성격까지 모든 면에서 달랐지만 줄리아라는 공공의 적으로 빠르게 친해졌다.

“기사라고? 진짜 검을 쓴단 말이야?”

“응. 시온도 아버지를 따라 검을 배우고 있어.”

“와!”

매사에 시큰둥한 에이든이 탄성을 내뱉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멋지다! 검을 다룰 줄 알면 케빈 같은 자식들을 죄 무릎 꿇릴 수 있겠지?”

“아버지는 검은 공격하라고 있는 게 아니라고 했어. 지키기 위해서 드는 게 검이래.”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검을 쓰고 싶다고 한 거야. 그보다 검이라니 정말 멋지다. 넌 안 배웠어?”

“시온이 배우지 난 안 배워.”

“그럼 넌 뭘 배우는데?”

“난… 그냥 책을 읽어. 에이든은 책 읽는 거 좋아해?”

“글도 읽을 줄 모르는데 책은 무슨 책이야.”

에이든이 얼굴을 붉혔다. 주변을 둘러보자 줄리아가 다 쓰고 땔감으로 쓰려고 모아 둔 종이가 보였다.

테이블 위에 굴러다니는 깃펜과 잉크를 찾아와서 종이의 자투리 공간에 이름을 썼다.

“내 이름은 이렇게 써.”

혹시 줄리아가 보고 화를 낼까 봐 얼른 내 이름을 지웠다.

그녀는 내 이름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곤 했다.

“이건 에이든이야.”

에. 이. 든.

잉크를 듬뿍 묻혀서 한 자 한 자 눌러썼다.

에이든은 눈빛만으로 종이를 꿰뚫을 듯 지켜봤다.

나는 에이든의 손에 깃펜을 쥐여주었다.

그리곤 에이든의 손 위에 내 손을 감싸서 다시 이름을 썼다.

“여기까지가 에이, 여기서부터 드은. 합쳐서 에이든.”

에이든은 혼자서 몇 번이고 제 이름을 반복해서 썼다.

그러다가 줄리아의 방에서 기척이 들리자 아예 종이에서 이름을 쓴 부분을 찢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에이든. 바닥 청소는 다 해 놨겠지?”

“눈이 있으면 확인해 봐.”

“건방진 놈.”

줄리아는 에이든의 뒤통수를 한 대 때려 주고는 부엌으로 가서 식사 준비를 했다.

“엄마아! 나 좀 봐! 나 예쁘지? 공주님 같지?”

“어. 그건…….”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온 시에나는 납치될 때 내가 입고 있던 옷을 걸친 상태였다.

“야, 에이든. 잘 봐. 이걸 입으니까 내가 이네트 같지 않아?”

“모르겠는데?”

“똑바로 보란 말야!”

“그 옷이 너랑 더럽게 안 어울리는 건 알겠어.”

“뭐어? 노예 놈이 뭐라는 거야!”

시에나가 꽥꽥 소리를 내지르며 에이든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다가 제 발에 걸려 바닥에 쿵하고 넘어졌는데, 넘어지는 순간 옷이 벽에 난 못에 걸리며 쭉 찢어졌다.

“내 옷…….”

“짜증 나. 너 때문에 찢어졌잖아!”

시에나가 에이든에게 슬리퍼를 던졌다.

찢어진 치마를 보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당황한 에이든이 내게 다가왔다.

“괘, 괜찮아?”

“…….”

입을 열면 집에 가고 싶다는 울음이 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꾹 다물고 버텼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와서 식사들 해.”

내가 미쳤지. 애를 셋이나 건사하다니.

줄리아는 궁시렁거리며 먼저 식사를 시작했다.

시에나는 씩씩거리며 빵을 뜯었다. 에이든은 접시에 얹어진 반쯤 상한 새우를 뜯었고 나는…….

“왜 안 먹어?”

“못 먹겠어요…….”

새우라면 지긋지긋했다. 오늘 아침에도, 어제도, 그저께도… 매일 매일이 새우였다.

거기다 반쯤 상한 걸 먹다 보니 항상 배가 아팠고 가끔은 두통도 왔다.

“엄마. 저도 시에나처럼 빵을 주면 안 돼요?”

빵이 안 되면 시든 양배추 조각이라도 먹고 싶었다.

하지만 줄리아는 도끼눈을 뜨더니 꽥 소리를 내질렀다.

“처먹어! 주는 대로 먹으란 말이야! 왜? 넌 귀한 몸이라 이런 것도 못 먹어? 그래?”

“아, 아니에요… 먹고 나면 배가 아파서…….”

“하! 입만 열면 거짓말이지? 아주 그냥 배가 불렀네! 백작가에서 널 너무 오냐오냐 키웠어! 먹기 싫으면 먹지 마!”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내 몫의 새우를 쓰레기통에 쑤셔 넣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오들오들 떨었다.

열이 크게 난 뒤 줄리아는 에이든이나 시에나와 달리 내게는 손찌검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노한 어른이 주는 공포스런 분위기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훌쩍거리며 시에나의 방으로 들어와 숨을 죽였다. 곧 식사를 마친 시에나가 돌아왔다.

“이네트. 나 심심해. 너희 집 이야기를 해 줘.”

시에나는 우리 가족들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했다.

어린아이의 눈에도 시에나가 귀족들의 생활을 얼마나 선망하는지 보일 정도였다.

“…침대 밑에서 괴물이 나올 것 같아서 무섭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침대 밑에 야광석을 놔두고 갔어. 침대 밑이 밝게 빛나면 괴물이 들어오지 못할 거라면서.”

시에나는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다.

나는 시에나에게 정말 많은 이야기를 꺼냈다.

어머니가 남긴 편지,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검술 대련을 하다가 벌어질 뻔한 사고, 아버지가 읽어 주던 동화책…….

집에서의 일을 말할 때면 가족들 품으로 돌아간 것 같아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야기가 끝나자 시에나가 못마땅한 얼굴로 내 얼굴을 살펴봤다.

“이렇게 똑같은데 나도 에스타리온 백작가 사람이 아닐까?”

“어, 어어?”

“이상하잖아. 같은 얼굴을 하고선 넌 귀족인데 나는 평민이라니. 사실은 우리가 뒤바껴서 자란 건지도 몰라. 시온이 내 오빠고 우리 엄마가 네 엄마인 거지.”

“아, 아냐! 난 우리 아버지 딸이야!”

“누가 뭐래?”

“그런데 그 옷… 이제 벗어 주면 안 돼? 내 거잖아.”

“네 거라고? 아냐, 우리 집에 있으니 이건 내 거야!”

그렇게 외친 시에나는 내가 옷을 뺏으려 들까 봐 걱정한 건지 놀러 나가겠다며 쪼르르 집을 뛰쳐나갔다.

마침 아랫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부엌엔 작은 도박판이 만들어졌다.

줄리아가 카드 게임으로 도박을 할 때는 나와 에이든이 집 밖에 나올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였다.

“이리 와 봐.”

에이든이 집 뒤편에서 내게 빵 하나를 내밀었다.

“얼른 먹어. 그 여자가 알면 난리 날 거야.”

“네가 혼날 거야.”

“됐어. 하루 이틀 있는 일도 아니고.”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에이든이 건넨 빵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에스타리온 백작가에서는 하인들이나 먹는 딱딱한 빵이었지만 내겐 천국에서 먹는 맛처럼 환상적이었다.

우리는 뒤뜰에 나란히 앉아서 나뭇가지로 흙바닥을 긁으며 시간을 때웠다.

에이든은 바닥에 제 이름을 썼다.

에이든.

에이든은 제 이름을 쓸 줄 아는 걸 꽤 자랑스러워했다.

“아버지가 빨리 나를 찾아 주면 좋겠어. 그럼 너랑 같이 우리 집에 가서 행복하게 살 텐데.”

“나도 가는 거야?”

“응. 넌 내 친구잖아.”

새까만 눈이 나를 응시했다. 에이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눈길이 뜨겁단 것만은 확실했다.

“난 노예야.”

“네가 노예라도 우리는 좋은 친구야. 그리고 아버지가 널 노예 신분에서 구해 줄 거야.”

그렇게 말하며 에이든의 손을 붙들었다.

제 손을 파고드는 손이 낯선지 그가 맞잡은 손바닥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넌 내가 노예인 게 아무렇지도 않아?”

“노예인 게 어때서. 나랑 친구 하기 싫어?”

“아니, 그건 아닌데…….”

후우. 에이든이 내뱉은 건 그 나이답지 않은 한숨이었다.

“아무도 노예랑 친구 같은 거 안 해. 같은 노예면 모를까.”

“…이상한 일이야. 난 네가 좋은데…….”

“뭐, 뭐어?”

에이든의 얼굴이 발갛게 익었다. 나뭇가지로 마른 풀뿌리를 툭툭 긁으며 대답했다.

“여기 와서 유일하게 좋은 게 에이든을 만난 거야.”

“…….”

입을 다문 에이든은 목덜미까지 새빨개지더니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에이든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에이든, 울어?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울긴 누가 울어! 그냥, 그냥…….”

고개를 든 에이든은 눈물을 글썽거리는 중이었다.

나는 장난삼아 에이든이 쥐고 있는 나뭇가지를 툭툭 쳤다.

“우리 집에 가서 같이 살자. 너는 시온이랑 같이 검을 배우고 나는 새우 대신 찐호박을 먹을 거야.”

“그렇게 되면 좋겠어.”

“매일 같이 노는 거야. 함께 정원에서 무당벌레도 구경하고 시온이랑 셋이서 숨바꼭질도 하자. 그럼 매일 행복하겠다. 그지?”

나와 에이든은 서로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함께 미소 짓는 그 순간, 우리는 상대에게 깊은 유대를 느꼈다.

가장 끔찍한 지옥에서 만난 단 하나의 온기. 그게 바로 에이든이었다.

그건 에이든이라고 다르지 않았을 거다. 험한 노예살이 중 만난 최초의 친구가 나였으니까.

에이든이 목숨 걸고 나를 구한 건, 그만큼 십일 년간의 삶이 외로웠단 증거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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