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나는 발소리를 죽인 채 창고로 다가갔다.
끼이익. 오래된 집에서 나는 나무판자 소리에 맞춰 심장이 쿵쾅쿵쾅거렸다.
“이 문 좀 열어 봐.”
“아, 안 돼. 엄마가 열지 말라고 했어.”
“문 좀 열어 줘. 너무 갑갑해서 그래.”
“미안…….”
“화장실이 급해서 그래. 잠시만 열어 주면 안 될까? 응? 잠시야. 잠시.”
창고 문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열어 줘선 안 된다와 열어 줘야 한다는 생각이 충돌했다.
그러다가 줄리아의 사나운 목소리가 귓가에 쩌렁쩌렁 울리는 상상이 들자 숨이 막혔다.
나는 재빨리 시에나의 방으로 들어와 이불을 덮어쓴 채 오들오들 떨었다.
소년의 부름은 나를 시험하는 악몽이었다.
나는 얼른 악몽이 끝나길 바라며 숨죽여 울고 또 울었다.
* * *
“배고파! 배고프단 말이야!”
소년은 잔뜩 쉰 목소리로 창고 문을 쾅쾅 발로 찼다.
하룻밤 내내 소년은 사과와 애원, 협박을 반복했다.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다.
시에나는 창고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내게 말했다.
“너 혹시 사탕이란 걸 먹어 봤어?”
“사탕? 응. 먹어 봤어.”
“그건 어떤 맛이야? 사탕은 아주 달콤하다던데 그럼 사루비아 꽃이랑 비슷해?”
“사루비아? 그건 어떤 맛이야?”
쿵쿵 울리는 창고 문에 시선이 자꾸 돌아갔다.
시에나가 그런 내 팔을 찰싹 때려서 제게로 주의를 돌렸다.
“이리 와 봐.”
시에나가 집 앞의 작은 공터로 데려와 붉은 꽃을 따서 내게 건네주었다.
영문을 몰라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자 시에나는 꽃을 쭉 빨아 보였다.
“이러면 꿀이 나와. 한 번도 안 해 봤어?”
“처음 해 봐.”
“그래? 귀족들은 이런 건 안 하는구나?”
시에나는 단박에 제 손에 있던 사루비아 꽃을 바닥에 툭 버렸다.
그리곤 그것을 신발로 짓밟은 뒤 손을 탁탁 털었다.
“흥.”
나도 시에나를 따라 꽃을 바닥에 버리자 그녀가 도끼눈을 뜬 채 나를 노려보았다.
“왜 버려?”
“으응?”
“왜 버리냐니까! 빨아먹어 봐야지!”
“아… 미안해.”
얼른 바닥에서 꽃잎을 주웠다. 뒤를 쭉 빨자 달콤한 맛이 났다.
“달다…….”
“사탕이 다 맛있어 이게 더 맛있어?”
“난 사탕이 더 맛있는 것 같아.”
“그래? 다시 먹어 봐.”
“어, 어어?”
시에나는 내 손에 억지로 사루비아 꽃을 따다 주었다. 꽃잎이 작은 손바닥 가득 쌓였다.
“다시 먹어 보래도. 사탕이 맛있어, 이 꽃이 더 맛있어?”
“어… 다시 먹어 보니까 사루비아가 더 맛있는 것 같아.”
“그지? 이게 더 맛있으니까 아버지가 사탕을 안 사 주는 거야.”
그렇게 웃은 시에나는 길 끝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줄리아를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뛰어갔다.
“엄마! 왜 이제 와!”
줄리아는 제게 매달리는 시에나를 거칠게 밀치고는 소리쳤다.
“****!”
외국어였지만 그 뜻을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혼혈인 유모가 내게 외국어로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쓸모없는 년. 줄리아가 시에나에게 한 말은 그런 뜻이었다.
“망할 년! 낳아 줬음 밥값을 해야 할 것 아냐! 너 같은 건 낳는 게 아니었는데!”
줄리아는 시에나를 사납게 때리고는 그녀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안으로 갔다.
나는 줄리아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얼른 집으로 들어가 방에 숨었다.
곧 시에나가 훌쩍거리며 방으로 왔다.
그녀와 내 눈이 마주쳤다. 시에나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그녀가 내게 소리쳤다.
“****!”
제 어머니에게 들은 말을 내게 그대로 퍼부었다.
시에나는 씩씩거리며 제 침대에 있던 베개로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나가! 여긴 내 방이야! 밥버러지는 꺼져 버려!”
나는 팔로 머리를 감싼 채 시에나의 방에서 쫓겨났다.
쾅! 문이 닫히더니 안에서 달칵하고 문고리를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쯧쯧. 바보 같긴. 저런 게 귀족이라니 믿을 수가 있어야지.”
언제 술을 마신 건지 줄리아는 술 냄새를 풀풀 풍겼다. 식탁 위에는 술병이 가득했다.
그녀가 휘청거리며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친 게 그녀의 비위를 거스른 모양이다.
줄리아가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리곤 팔을 질질 잡아끌어서 창고로 데려갔다.
잠긴 창고 문을 연 줄리아가 그 속에 나를 집어 던졌다.
“꼴도 보기 싫으니 닥치고 조용히 있어!”
달칵. 문이 잠기고 나는 어둠에 놓였다.
숨이 멈출 것 같았다. 팔, 다리 위에 벌레가 기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헉. 허억. 헉. 호흡이 거칠어지고 두려움이 목구멍까지 차올라서 머리가 펑하고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야, 너 괜찮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나를 턱하니 붙잡았다.
낯선 체온이 느껴지자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졌다.
“끄으윽. 끅!”
“왜, 왜 우는 거야.”
“무서워… 흐으윽.”
소리 내어 엉엉 울지 못 하는 건 문밖에 줄리아가 있어서다.
화난 그녀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코를 닦았다.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었다. 매일 나를 업어 주던 오빠, 시온이 그리웠다.
그때 작은 몸이 나를 끌어당겼다. 소년이 팔을 뻗어 내 어깨를 보듬어 안은 것이다.
“우, 울지 마…….”
서툰 위로 속에는 줄리아나 시에나에게서 느껴지는 불편한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온기에 기대어 한참을 숨죽여 울었다. 그것이 그 애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 * *
“나와.”
아침이 되자 줄리아가 문을 열어 주었다.
밤새 울다 지쳐 잠든 나는 비척비척 일어나 창고 밖으로 나왔다.
밝은 곳에서 본 소년은 굉장히 작고 말랐다.
새까만 머리엔 때가 가득했고 얼굴에도 검은 얼룩이 묻어 있었는데 눈 만큼은 햇빛을 정면으로 받은 것처럼 생기 있게 반짝였다.
“배고파. 밥 줘.”
소년은 줄리아에게 아주 당당하게 식사를 요구했다.
줄리아는 헛웃음을 짓더니 안에서 대충 삶은 새우를 한 접시 가득 가져와 내밀었다. 알아서 먹으란 의미였다.
그 애는 자리에 앉아서 그것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인 양 먹어 치웠다.
전날부터 쫄쫄 굶었던 나는 그 옆에 앉아서 조심스레 새우를 뜯어먹었다.
식탁에 앉은 줄리아가 나를 보며 빠득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새끼. 조카는 중요하고 지 새끼는 안 중요하단 거야?”
씩씩거리던 줄리아는 내 뒤통수를 눌렀다.
새우가 쌓인 접시에 얼굴이 처박혔다. 비릿한 냄새가 코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머리를 누르던 힘이 사라진 뒤에도 쉽사리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또각또각. 줄리아의 구둣발 소리가 멀어지자 그제야 얼굴을 들고 훌쩍일 수 있었다.
“끄으윽. 흐윽.”
식사를 포기하곤 화장실로 가서 얼굴을 씻었다.
집을 나갔다간 줄리아가 또 어떤 말을 할지 몰랐다.
사실 모르는 사람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단 생각에 어린 마음에도 정말 비참했다.
씻고 나오자 집에는 소년과 나만 남아 있었다.
“그 여자 딸 아니었어?”
“가짜 딸이야.”
“가짜 딸?”
“내 이름은 이네트야. 하지만 사실 진짜 이름은 따로 있어.”
“진짜 이름이 뭔데?”
“셀레나. 셀레나 에스타리온.”
소년은 인상을 쓴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내 옆에 앉아서 담요를 홱 걷어 제 무릎에 덮었다.
“너는? 너는 이름이 뭐야?”
“에이든.”
“성은 없어?”
“노예가 성이 어딨어.”
에이든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에이든은 유괴범들이 의심을 피하려고 아들인 척 데리고 다니며 허드렛일을 시키는 노예였다.
그들은 에스타리온 백작가의 수사가 생각 이상으로 공격적이자, 수사망에서 피해 시골로 숨어들려고 필요가 없어진 에이든을 줄리아에게 맡겼다.
“그 여자는 좀 미친 것 같아. 제정신이 아냐.”
“…엄마를 두고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어차피 진짜 엄마도 아니라며. 케빈이랑 그 따까리들. 이번엔 그냥 도둑질이 아니라 귀족을 건드렸다고 했어. 그래서 도주한 거고. 그 자식들이 널 납치한 거 맞지?”
“…집에 가고 싶어.”
“미친놈들. 잘못해서 경무청에 발각되면 나까지 뒤질 거야.”
에이든은 초조한지 손바닥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혹시 우리 아버지를 알아?”
“내가 귀족을 어떻게 알아. 대충 지나가는 이야기만 들었어. 너희 아빠가 널 애타게 찾고 있대.”
“아버지가?”
그때 문이 열리더니 시에나가 줄리아의 손을 잡고 돌아왔다.
시에나는 악을 쓰며 엉엉 우는 중이었다.
“흐아아아앙.”
시에나가 뒷덜미를 매만지려고 하자 줄리아가 제 딸의 손을 찰싹 쳐냈다.
“함부로 만지지 마!”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울면서 씩씩거리는 시에나에게 줄리아가 소리쳤다.
“가만있어! 언젠가 나한테 감사하다며 절할 날이 올 거야! 혹시 알아? 네가.”
줄리아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마주친 눈이 붉게 번뜩이는 것 같았다.
“에스타리온으로 인정받게 될지 누가 알아.”
시에나는 머리로 줄리아의 배를 들이받고는 제 방으로 쏙 들어갔다.
줄리아가 머리카락을 붙잡아 내 목덜미를 확인했다.
“똑같이 새겼네. 문제없어.”
그렇게 중얼거린 그녀가 머리끝으로 머리카락을 묶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내 손을 꼭 붙잡은 채 여자들이 머리를 말 때 쓰는 작은 인두를 굽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가만있어 봐.”
“어, 엄마. 놔주세요. 네?”
“가만히 있으래도!”
그녀는 내 등에 올라타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눌렀다.
한 손으로는 뒤통수를, 다른 손으로는 인두를 들었다. 그리곤.
“꺄아아아악!”
그녀는 인두 끄트머리를 피부 위에 살짝 가져다 대었다.
고통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살이 타는 냄새가 났다. 뜨겁고 아팠다.
버둥거리다가 인두에 목 전체가 데일지도 모른단 생각에 나무 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몸을 웅크렸다.
우리 어머니는 나를 햇빛보다 더 사랑한다고 했는데…….
* * *
목이 말랐다. 물, 물.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내자 누군가 입 안에 물을 흘려 주었다.
집에 돌아온 걸까? 목을 축이고 나자 한결 정신이 들었다.
눈을 뜨자 에이든이 보였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이 몰려들었다.
“더 자. 너 사흘 동안 앓아누웠어.”
“집에 가고 싶어.”
“울지 마. 밖에 그 여자가 있어.”
에이든이 내 머리 위 물수건을 교체해 주었다.
나는 시에나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지난 사흘간 그 여자가 얼마나 초조해했는지 너도 봤어야 했는데. 네가 죽는 줄 알고 겁에 질려 쩔쩔매는 꼴이라니.”
에이든은 키득키득 웃으며 내 목덜미에 손을 얹었다.
“열이 많이 내려서 다행이야. 춥지는 않아?”
“아, 으응. 괜찮아.”
“다행이네. 있어 봐. 약이랑 수프를 가져올게.”
“자, 잠시만.”
자리를 떠나려는 에이든의 손을 낚아챘다.
에이든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당황스러운 눈치였지만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잠시만 옆에 있어 줘. 잠시만…….”
에이든의 얼굴이 조금 붉었다. 내게서 열이 옮은 걸까?
그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