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이것으로 레이온 제약의 약물이 이단이 아님을 인정하는 바입니다.”
가장 나이가 많던 백발 사제, 수도의 교구장이 심문회 결과를 확인해 주었다.
해냈다는 생각에 뿌듯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고생하셨습니다. 레이온 양.”
백발 사제가 내게 와서 인사를 건넸다. 악수를 한 그가 작게 말했다.
“마누엘 사제가 ‘이것이 이단이라면 백성들에게 진통 포션을 보급하지 못 하는 우리는 죄인입니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나니 셀레나 양에게 정말 부끄럽습니다.”
“아니에요. 우릴 위해 고생하시는 걸 잘 아는걸요.”
“진통제로 인해 많은 변화가 일어날 거란 것, 잘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네. 각오하고 있어요.”
“부디 신의 축복이 셀레나 양에게 함께하기를…….”
축복을 빌어 준 그는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빠져나갔다.
사제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난 뒤에도 마지막까지 남은 건 마누엘 사제였다. 그가 내게 다가와서 축하 인사를 건넸다.
“축하합니다. 셀레나 씨.”
“덕분이에요. 마누엘 사제님. 오늘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도와드리긴요. 오늘 저는 한 게 없습니다. 모두 셀레나 씨가 준비를 완벽하게 한 덕분입니다.”
그때 뒤에서 에이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셀레나. 당신이 이긴 것 맞지?”
그가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밖으로 나오는 사제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신전 측의 허가를 받은 것 같던데 사실이야?”
“네. 잘 풀렸어요.”
“그래? 잘됐다! 그간 고생 많았어. 한 고비 넘겼네.”
“칼립소 공작님께서 많이 신경 쓰셨습니다. 얼마나 신경을 쓰셨냐면-.”
“마누엘 사제에게 잘 좀 봐 달라고 며칠 졸랐어.”
에이든이 마누엘 사제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마누엘 사제는 에이든을 올려다보다가 곧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한 만큼 좋은 결과가 나와서 다행이야.”
“고마워요. 에이든. 참, 마누엘 사제님. 가시기 전에 기억력 파훼를 한 번 더 시도해 주실 수 있을까요?”
“기분 좋은 날인데 푹 쉬지 않고요?”
“네. 하루빨리 기억을 되찾고 싶어서요.”
신전에 오기 전 받았던 보고엔 믿기 힘든 잔혹한 사실이 담겨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살인이었다. 사기, 납치도 아닌 살인.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에이든이 불안한 얼굴을 했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시선이 신경 쓰였다.
때때로 그는 제 속에 든 것을 내보이곤 했다.
완벽하게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내가 모르는 에이든 칼립소만의 비밀이었다.
당신에겐 어떤 비밀이 있는 걸까. 어째서 슬픈 아이 같은 얼굴을 하는 걸까.
그를 위로해 주고 싶은데 내게 어떤 것도 털어놓지 않아서 아는 체조차 못 한다.
“…괜찮아요.”
나는 슬쩍 에이든의 손을 잡아 주었다. 손끝이 차가운 게 느껴졌다.
마누엘 사제가 정돈된 의자를 꺼내자 그곳에 앉았다.
그의 손이 정수리에 얹어지기 전, 깊은숨을 삼켰다. 그리고.
“흣.”
익숙해지지 않는 통증이 밀려왔다. 어째서인지 평소보다 더 아픈 듯했다. 특히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으윽.”
신성력이 머리를 헤집었다. 머리가 반으로 쪼개지고 뇌가 쪼그라드는 느낌이다.
에이든이 두 손으로 덜덜 떨리는 내 손을 붙잡았다.
커다란 손을 마지막 동아줄처럼 붙들었다.
‘…내 이름은…….’
‘엄마? 나는 엄마 없는데…….’
‘도망쳐!’
어린 내 목소리와 소년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메아리쳤다. 뿌연 안개 너머로 어떤 장면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머릿속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허억!”
숨을 들이켜는 것과 동시에 눈이 번쩍 뜨였다.
에이든이 하얗게 질려서 내 어깨를 잡고 소리쳤다.
“…레나? 셀레나? 마누엘! 대체 왜 이러는-.”
시야도 소리도 모두 아득하기만 했다.
미친 듯이 몸이 떨리는 와중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입을 뻐끔뻐끔거리기만 했다.
허공에서 손이 허우적댔다. 내가 매만지려는 건 분명 에이든의 얼굴인데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힌 터라 몸이 내 몸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에이든…….’
소리 없는 부름은 입 속에서 흩어졌다. 그것을 끝으로 내 의식은 묻혀 있던 기억 너머로 사라졌다.
Chapter 6. 진실의 무게
열 살은 스스로는 많이 컸다고 자부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면 한참 어린 나이였다.
나는 목소리도 모르는 어머니를 그리워했고, 시온은 내가 글을 배우기 전 어머니께서 남긴 편지를 읽어 주곤 했다.
‘사랑하는 내 아가. 너를 햇빛보다 더 사랑한단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일곱 살 무렵엔 홀로 어머니가 남긴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이미 외우다시피 한 문장이지만 어머니의 필체와 편지지 한쪽에 난 잉크 자국을 확인하는 게 좋았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했던 건 ‘사랑하는 내 아가’라는 문장을 손끝으로 더듬어 보는 거였다.
사랑하는 내 아가.
나는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한 나쁜 딸이 아니라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고 싶어 했던 딸이었다.
그것이 그 시절 내 마음속 뿌리였다. 하지만 납치 사건은 그러한 내 뿌리를 철저하게 짓밟았다.
“흐으윽. 흑.”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싶었지만 낯선 아저씨들의 비위를 거슬렀다간 큰일이 날 거란 직감에 그럴 수가 없었다.
허름한 마차는 창문이 헝겊으로 막혀 있어서 그들이 나를 어디로 끌고 가는지 알 수 없었다.
남자들에게 맞아서 기절한 유모가 생각났다.
유모는 괜찮을까. 저 사람들이 나한테도 손찌검을 할까.
겁이 나서 속으로 아버지와 오빠를 부르고 또 불렀다.
덜컹. 덜컹.
마차는 거친 길을 오가는지 계속해서 덜컹거렸다.
나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선 혼자 울음을 삼켰다.
한참 뒤 마차가 멈추었다. 손등에 화려한 문신이 새겨진 남자가 나를 덜렁 들어서 밖으로 나왔다.
그곳은 내가 태어나 자란 에스타리온 저택도, 저택이 있는 수도 인근도 아니었다.
작고 지저분하다 못해 마구간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허름한 집이었다.
“줄리아! 줄리아!”
남자의 외침에 안에서 끼이익하는 문소리가 들리더니 여자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순한 인상의 금발 여자였다.
“여기, 이 애야!”
“얘라고?”
여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이쪽을 확인한 그녀가 눈에 띄게 흠칫거렸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무언가 아주 잘못되어 간다는, 본능적인 두려움 같은 게 척추를 타고 흘렀다.
“이봐, 줄리아. 왜 그래?”
“…너 대체 누굴 데려온 거야?”
“뭐?”
줄리아의 얼굴은 희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인상을 쓴 와중에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잠깐 맡아만 달라며! 얜 잠깐 맡아 줄 사이즈가 아니잖아!”
“그래 봐야 시에나보단 어려서 손은 덜 갈 거야.”
“아니, 아니. 나이를 말하는 게 아니야. 이 애, 에스타리온 백작가의 계집애 아냐?”
그 물음에 나를 데려온 남자, 케빈이 낮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걸 어떻게 아는 거야.”
“빌어먹을! 내가 못 알아볼 줄 알았어? 괜히 이 애를 맡아 줬다가 나한테 불똥이 튀면 어쩌려고 그래! 난 못 해. 데리고 가!”
줄리아는 뒷걸음질을 치며 제집 너머로 쑥 들어갔다.
문을 닫으려고 하자 케빈이 재빨리 손잡이를 붙잡아 그녀를 저지했다.
“마차도 몇 번이나 갈아타고 와서 잘 따돌렸으니 잠시만 맡아 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난 좀 잘 사는 상인 집 딸인 줄 알았지 상대가 백작가인 줄 알았으면-.”
케빈이 줄리아의 말을 끊고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휙 내던졌다.
줄리아는 반사적으로 허공에서 그것을 잡아챘다.
내용물을 확인하자 그녀의 눈에 안광이 번뜩였다.
“오늘 선급금이 들어왔어. 때가 지나면 선급금의 두 배를 더 지급해 주겠대.”
“두 배?”
“그래. 두 배. 정확히 그 돈의 두 배를 더 받을 수 있는 거야. 어때? 이제 좀 이 계집애를 맡을 생각이 들어?”
“오, 젠장! 넌 정말 쓰레기야.”
줄리아는 주머니 속 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주머니를 어렵사리 품에 집어넣었다.
그녀가 홱 하고 내 팔을 잡아 제 쪽으로 거칠게 끌었다.
팔이 떨어져 나갈 것같이 아팠다. 나는 눈물범벅이 되어선 끅끅 울음을 삼켰다.
“근데 케빈. 대체 이번 의뢰인이 누군데 백작가를 건드는 거야?”
“나도 몰라. 우린 그냥 시킨 대로 할 뿐이야. 우리가 알아야 할 건 받아야 할 돈이지 놈들이 누구인지 따위는 아니야.”
“그래, 그렇긴 하네.”
“당분간 백작가를 유인하며 도주 생활을 해야 해서 며칠 내로 제프가 그 노예 놈을 데리고 올 거야. 당분간만 좀 맡아 줘.”
“시에나 하나를 건사하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애새끼를 둘이나 건사해야 하다니.”
“대충 허드렛일을 시키면서 부려 먹어. 성질머리가 더럽긴 한데 똑똑해서 이것저것 시키기엔 좋아. 빨래든 땔감 모으기든 아무거나 시켜도 돼. 도망만 안 가게 해.”
“이런 산골에서 도망가 봐야 손바닥 안이지.”
“그럼 부탁 좀 한다. 얘, 잘 좀 돌봐 줘. 상품인데 흠집 나면 우리만 손해야.”
“알아서 볼 테니 넌 잡히지나 마. 알겠어?”
“흥. 내가 누군데.”
케빈은 옆에서 조용히 울고 있는 나를 확인했다.
나는 그의 눈길이 무서워서 어깨를 떨었다.
신전에 다녀오던 길에 갑자기 난입해서 유모를 쓰러트리고 나를 납치한 이가 케빈이었다.
“너, 네 유모처럼 되기 싫으면 아줌마 말 잘 듣고 있어야 한다?”
살살 웃으며 섬뜩한 말을 내뱉은 케빈은 그 길로 사라졌다.
공포심이 씨앗처럼 흩뿌려졌고 줄리아는 멀어져가는 마차를 보곤 쾅 하고 문을 닫았다.
“염병할 놈. 돈이나 안 주면 거절이라도 하지… 야, 너!”
나는 갑작스런 부름에 화들짝 놀랐다. 줄리아가 인상을 찡그린 채 한참 내 얼굴을 뜯어봤다.
“넌 오늘부터 셀레나가 아니라 이네트야. 나는 네 엄마고. 그러니까 나한텐 엄마라고 부르는 거야. 알겠어?”
“…끄으윽.”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아버지와 시온이 보고 싶었다.
이건 대체 어떻게 된 일인 걸까. 언제쯤 집에 갈 수 있을까. 유모는 괜찮은 걸까.
“대답 안 해? 알겠어, 모르겠어?”
“…끄으응. 아버지이…….”
콧물이 주르륵 흘렀다. 너무 울어서 눈과 머리가 아팠다. 줄리아가 짜증스레 윽박질렀다.
“울지 마! 너, 내가 뭐라고 했어. 오늘부터 네 이름이 뭐라고?”
“이, 이네트요.”
“그래. 그럼 난 뭐야?”
“…….”
“날 뭐라고 부르랬어?”
“…….”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 어머니는 오래전 돌아가셨다.
나를 햇빛보다 더 사랑한다는 어머니를 두고 다른 여자에게 엄마라고 불러야 하는 상황이 이해가지 않았다.
내가 입을 다물자 줄리아가 손을 들어 머리를 쥐어박았다.
“엄마라고 부르랬잖아! 엄마!”
괜히 이상하게 불렀다가 의심을 사면 어쩔 거야. 그녀가 씩씩대며 다시 물었다.
“날 뭐라고 부르랬어?”
“…어, 엄마…요.”
“그래. 오늘부터 난 네 엄마야! 알겠어?”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마음에도 앞으로의 생활이 녹록찮을 거란 직감이 들었다.
그렇게 납치 생활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