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66화 (67/134)

<66>

반달 모양의 회의실 테이블에 앉은 사제들을 빙 둘러보았다.

수도의 내로라하는 사제들은 다 모인 듯했다.

나 하나를 짓밟겠다고 열 명이나 되는 사제들이 모여 면접 보듯 둘러싼 꼴이라니.

“안녕하세요. 레이온 제약의 대표, 셀레나 레이온입니다.”

앉는데 허락이 필요하진 않아 의자를 빼서 바로 앉았다. 어깨를 펴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저들이 나를 압박하려 한다고 해서 기가 죽을 필요는 없다.

마누엘 사제가 복잡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러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슥 눈길을 돌리곤 옆에 있던 사제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게 힘을 싣어주기로 했으니 나를 외면한 게 아니라 괜한 구설에 오를까 봐 모른 척한 걸 테다.

“셀레나 에스타리온 양 아닙니까?”

“과거에 그런 이름이긴 했지만 지금은 레이온입니다. 에스타리온 백작가와는 인연이 다했지요.”

“크흠. 그렇군요.”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자 마침 심문회 시작 시간이 되었다.

사제들이 심문회를 주도하게 될까 봐 얼른 서류를 한 부씩 돌렸다.

“레이온 제약의 진통제는 전에 없던 약물이죠. 생전 처음 보게 되는 약이라 사제분들의 혼란과 염려를 백번 이해해요. 독실한 신자분들도 혹시나 하는 걱정에 진통제 사용을 꺼리는 경우가 많아 공식적으로 해명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심문회가 열리게 되어 영광이에요.”

“영광이라고요?”

“네. 이렇게 뛰어난 사제분들과 약물에 관한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는 잘 없으니까요. 저 또한 한 명의 신자로서 교회법에 위배되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기에 이 자리에서 여러분의 확실한 인정을 받고 싶습니다.”

과하지 않을 만큼 사제들을 존경하는 태도를 보이며 스스로를 낮추었다.

내가 신실한 신자임을 어필해서 신전의 앞길을 막는 존재가 아니란 것도 드러냈다.

“이단심문소에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그것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언젠가 한 번은 나올 질문이라 일찌감치 해명할 기회가 생겨 기쁘기까지 했다.

“누명이었어요. 에스타리온 백작가 내부의 일이라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 하는 점 양해 부탁드려요. 제 무고함은 저기 계신 마누엘 사제님께서 확인해 주실 수 있답니다.”

내 말에 사제들의 시선이 마누엘 사제에게 닿았다.

그는 갑작스런 주목에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당시 기록서를 확인하면 아시겠지만 셀레나 자매님은 무고합니다.”

가장 중간에 앉은 흰 머리가 희끗한 사제가 서류를 뒤적이며 물었다.

“이단 신고 후 상대가 무고할 경우 마녀사냥을 하려고 한 죄를 묻는 게 일반적인 경우인데 백작가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군요. 왜 그런 건가요?”

“이단심문소는 아주 춥고 힘든 곳이었습니다. 가족이었던 백작가의 사람들을 원망했고 제게 억울한 경험을 하게 한 신을 미워했죠. 신앙이 부족해서 그곳을 나온 지금도 모든 걸 사랑으로 감싸지는 못합니다.”

숨을 들이켠 뒤 고백을 이어나갔다.

오늘 심문회에 오기 전 각오한 게 있다면, 어떤 질문을 맞게 되든 진솔하게 행동하자 였다.

사제들은 사람을 만나는 게 일이었다. 신분도, 성별도, 직업도 다른, 아주 다양한 조건의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이들이라 거짓말에 민감했다.

그런 만큼 어설픈 거짓말을 해서 괜한 의심을 사느니 힘들더라도 속에 든 걸 솔직하게 꺼내서 진정성을 보이기로 했다.

하지만 이다음 말 만큼은 거짓을 속삭여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을 고소 고발하지 않고 조용히 묻어 둔 건, 신전에서 받은 교리인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제 마지막 의지였습니다.”

사랑. 사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복수하기 위함이었다.

어설프게 고소했다간 나만 된통 당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내 얼굴에 증오가 퍼져 나가지 않도록 안간힘을 써야 했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짓기보다는 최대한 담담한 얼굴을 유지했다.

“그랬군요. 그랬어.”

백발 사제는 만족스레 웃어 보였다.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심문회가 시작되었다.

안경을 쓴 깐깐한 인상의 사제가 내가 준 서류를 넘기며 물었다.

“레이온 제약에서 판매하는 약물이 두 가지인 걸로 압니다. 하나는 진통제. 다른 하나는 마취제란 거군요. 진통제는 이미 발생한 통증을 경감시키고 마취제는 이후 발생할 통증을 차단하는 약이고요.”

“네. 맞습니다.”

“약물의 성분이…….”

그가 안경 너머로 나를 확인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단 성분으로 규정해 놓은 성분은 전혀 없습니다. 마약도, 흑마법의 주된 재료도 쓰이지 않았죠. 레이온 제약의 약물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어떻게 마약이나 진통 포션과 같은 효과를 내는 거죠? 여기에 흑마법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증명할 수 있습니까?”

“지난 몇 달간 레이온 제약에서 판매된 약물은 진통제가 3만 5천 개, 마취제가 2천 개입니다. 이렇게 많은 약물에 일일이 마법을 거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죠.”

“생활에 밀접한 재료들로 신종 마약을 만든 게 아니라고 뒷받침할 수 있습니까?”

안경 쓴 사제의 말투가 꽤나 날카로웠다.

나는 기죽지 않고 설명해 나갔다.

“네. 가능합니다. 진통제는 통증을 완전 차단하는 게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통증을 경감시키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까요. 자료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진통제에는 중독성과 의존성이 없습니다. 저는…….”

사제들 한 명 한 명의 시선을 맞추며 설명을 쭉 이어나갔다.

대답이 끝나면 물을 마실 새도 없이 새로운 질문이 파고들었고, 그 질문을 해결하고 나면 또 다른 질문이 돌아왔다.

워낙 준비를 단단히 해서 그런지 사제들의 공격이 어렵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그들은 약물에 대해 빠르게 납득해 나갔고, 몇몇은 진통제가 진통 포션의 자리를 위협할 거라 생각하는지 점점 예민한 기색을 보였다.

“신전의 허가 없이 이러한 물질을 제조 판매하는 자체가 이단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까?”

얼굴이 동글동글하고 살이 찐 사제가 물었다. 꽤 날이 선 말투였다.

신성 제국에서 교회는 정치와 생활전반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저 말은 행정부의 허가 이전에 교회의 허가를 받지 않은 건 이단으로서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 아니냐는 의미였다.

‘대답을 잘해야 해.’

자칫 잘못하면 지금껏 잘 이끌어가던 심문회 분위기가 완전히 뒤집힐 수도 있다.

신전 측에 먼저 말을 했다간 약물이 나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는 걸 드러내면 안 된다.

그 사실을 감추며 레이온 제약이 신전에 충성하는 존재임을 밝히는 동시에 합리적인 이유를 대야만 한다.

입 안이 말랐다. 나는 대답을 기다리는 사제들을 한 명 한 명 확인했다.

“저는 어려서부터 잦은 두통에 시달렸습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두통으로 인한 어지러움에 토악질을 하고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고통받았죠. 그래서 약물의 연구 및 지원을 시작했습니다.”

“그게 지금 내 질문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거죠?”

“진통제를 만들어 고통에서 해방되고 나자 저와 같이 아픔에 신음하는 이들이 보이더군요. 그래서 낮은 가격에 약물을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숨을 들이마심으로써 설명을 한 템포 쉬어갔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강조하기 위해 음성을 조금 낮춰서 방점을 찍었다.

“고통받는 이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교회의 가르침이었습니다. 해서 이것이 따로 허가 및 인증을 받아야 하는 것이라 생각지 못했습니다. 저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한 것이었으니까요.”

“오…….”

백발 사제가 탄성을 내질렀다. 그는 크게 감동했는지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사제분들께서 무엇을 염려하는지 압니다. 약물이 이렇게 퍼져 나가기 전 미리 인준받지 못 한 것은 제 불찰입니다. 이점에 대해 정말 부끄럽게 생각 중입니다.”

대답이 끝나자 사제들이 큼, 흠하고 헛기침을 했다.

내 답변에 딴지를 걸면 그는 사제 실격이 되기 때문이다.

사제들의 분위기가 훈훈한 걸 떠나서 레이온 제약의 약물을 허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때 어떤 사제 한 명이 말을 꺼냈다.

“마누엘 사제. 그대는 궁금한 게 없습니까? 아까부터 조용히 입을 다물고 계시더군요.”

“아, 저는…….”

마누엘 사제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한참 뜸을 들이더니 말을 꺼냈다.

“아시다시피 이단심문소에서 셀레나 씨를 심문했던 게 저입니다. 그러다 보니 셀레나 씨에게 개인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군요.”

“무엇인가요?”

“보통의 사람들은 이단심문소에 억울하게 다녀오면 신전 측에 커다란 적대감을 키우곤 합니다. 믿음을 저버리고 정말로 이단에 빠져 버리는 경우가 많죠. 셀레나 씨가 그곳에서 한 고생이 평범치 않은 걸로 아는데, 심문소에서 나온 뒤 빠르게 일어나 병들고 아픈 자들을 돕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경위가 궁금하군요.”

마누엘 사제는 저렇게 물음으로서 혹시나 내게 의문을 갖고 있을지 모르는 다른 사제들을 마지막으로 납득시키고자 하려는 거다.

다른 사제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주시했다.

마누엘 사제가 나를 돕기 위해 그랬단 건 알지만 조금 원망스러웠다.

질문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또다시 가슴 졸이며 거짓말을 해야 해서다.

“실제로 처음 이단심문소를 나왔을 때 세상이 밉고 원망스러웠죠. 제 안에 타오르는 건 분명 복수심이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하려는 말은 절반의 거짓과 절반의 진심이다.

그리고 이 순간,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에이든이다.

말과 행동이 거칠지만 내 앞에선 숙맥이 되고, 웃을 때면 거친 흉터가 드러나면서 은근히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에이든.

그를 떠올리자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맴돌았다. 가슴이 벅차오르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제 곁을 지켜 준 사람이 있어서 괜찮았습니다. 그 사람이 준 사랑 덕분에 제 삶을 분노에 밀어 넣기보다는, 행복한 감정으로 가득 채우자고 마음먹게 되었죠. 그래서 괜찮습니다.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미움도 원망도 아무런 의미가 못 되니까요.”

마누엘 사제가 졌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것 참. 교구장으로서 저는 전적으로 레이온 제약을 인준하는데 한 표 던지겠습니다.”

교구장? 평사제가 아니라 교구장이라니. 언제 승진을 한 거지?

안경을 쓴 사제가 내게 특유의 예리한 말투로 말했다.

“우선 우리끼리 이야기를 해 보는 게 좋을 듯하군요. 밖에서 조금만 기다려 주겠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회의실을 나오기 전, 잠시 뒤돌아 사제들을 확인했다.

그들끼리 이야기하겠다고 했지만 내가 이겼다는 확신이 섰다.

나는 시선이 마주친 마누엘 사제에게 작게 고갯짓으로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신선한 공기가 폐부 가득 들어오자 묘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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