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65화 (66/134)

<65>

“한 입만. 조금만 먹어 봐. 손질하고 요리한 정성이 있잖아.”

시에나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지자 시온은 제 손이 잘게 떨려 오는 것 같단 착각이 들었다.

그만큼 그는 지금 떨리고 불안한 상태였다.

“시에나. 부탁할게.”

시온은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그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시에나는 더 이상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럼 조금만 먹어 볼게요.”

시에나가 느릿하게 포크를 쥐었다. 그녀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긴장을 숨기려 애썼지만 무의식중에 보이는 감정을 온전히 감추기란 어려운 일이다.

시온은 시에나의 반응을 확인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푹. 시에나가 포크로 통통한 새우 살을 찔렀다.

포크에 툭하고 꽂힌 새우를 느릿하게, 아주 느릿하게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곤 굳은 표정으로 그것을 입에 넣었다. 시에나는 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그것을 꿀꺽 삼켰다.

어쨌든 먹긴 했다. 안도감이 혈관을 따라 어깨와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맛있어요.”

시에나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시온이 한결 풀어진 얼굴로 대꾸했다.

“맛있다니 다행이야.”

“참. 아멜리아에게 편지를 보내다가 내려왔는데 얼른 마무리하러 가 봐야겠어요.”

“그래. 가 보도록 해.”

시온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에나는 벌떡 일어나 식당을 나갔다.

시에나가 사라지고 나자 시온은 참고 있던 긴장을 내려놓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에나를 의심하다니… 스스로가 한심하고 혐오스러웠다.

시에나가 남기고 간 새우 요리를 보며 헛웃음을 짓던 시온은 뒤늦게 떠오르는 생각에 얼른 시에나를 쫓아나갔다.

수도에서 한참 인기 있는 레스토랑에 예약을 해 놨으니 같이 가자고 제안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웩! 우욱!”

시온이 확인한 것은 먹은 것을 게워 내는 시에나였다.

방에 딸린 화장실에 들어간 시에나는 아까 삼킨 새우를 다 토해 냈고 시온은 벽 너머로 그 소리를 들었다.

“아가씨. 무슨 일이세요?”

“망할. 집에 알레르기 약 있어?”

“어떤 알레르기요?”

“새우 알레르기!”

“아, 네. 셀레나 아가씨 때문에 구비해 둔 약이 있긴 해요.”

“그럼 그것 좀 가져와. 우우욱!”

등을 두드려 주던 하녀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시온을 보고 인사를 하려 했지만 그가 입을 다물란 의미로 손가락을 들자 조용히 지나갔다.

“황태자 때문에 죽을 지경인데 대체 이딴 건 왜 먹이는 거야!”

시에나의 짜증에 찬 음성이 시온을 후벼팠다. 그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못 박힌 듯 서서 그 자리를 지켰다.

믿음이 깨어지고 그 자리엔 거센 의심이 들어왔다. 속이 울렁거렸다.

무언가 잘못되어 갔다. 아주 많이.

* * *

이단심문회 당일 아침이 밝아 왔다.

거울 속 나는 약간 긴장한 듯하지만 겁을 먹어 보이진 않았다.

‘이단심문소에 갔던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에스타리온 백작가에서 그렇게 내쫓기지 않았다면 당시의 내 성격 상 진통제를 만들어도 지금처럼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진 못 했을 거다.

레이온 제약을 만든 것도, 레이온 제약 때문에 어떤 일을 겪게 되어도 의연하게 된 건 모두 그들 덕분이었다.

빗질을 끝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긴장한 에이든이 보였다.

내 발소리에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확인했다.

“다 잘될 거야. 겁먹지 말고 잘하고 와.”

“왜 당신이 겁을 먹어요.”

“겁? 아냐. 난 아무렇지도 않은걸.”

“거짓말.”

나보다 더 긴장한 얼굴인데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 게 귀여웠다.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노라 중얼거리던 에이든이 결국 백기를 들었다.

“맞아. 긴장했어. 당신을 믿지만 이건 정말… 나도 같이 심문회에 참석할까? 비서라고 하면 함께 입장할 수 있을지도 몰라.”

“진정해요. 에이든.”

에이든은 벅벅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끊어질 듯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미치겠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게 끔찍해.”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저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니까요.”

“하지만…….”

불안에 떠는 에이든을 안아 주었다.

하늘 아래 두려워하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사람이 내 일에는 이렇게 예민해지곤 한다.

그는 하나뿐인 내 편이었다. 나를 진심으로 염려하고 걱정하는, 내 사람.

에이든이 벅차도록 애틋해서 그를 꼭 껴안았다.

그러자 에이든이 내 정수리에 턱을 기대며 털어놓았다.

“난 항상 당신 때문에 걱정이야. 찬 바람이 불면 감기에 걸리진 않을까, 날이 따뜻하면 노곤하다며 힘들어하진 않을까…….”

“알아요. 난 에이든이 걱정이 많은 게 걱정인걸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그것만으로도 힘이 돼요.”

가볍게 그의 등을 쓸어준 뒤엔 함께 마차를 타러 갔다.

에이든은 신전 입구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마차가 출발하기 직전 프레드 씨가 와서 무언가를 전해 주었다.

“정보 길드에서 방금 도착한 서류입니다.”

“정보 길드요? 고마워요, 프레드.”

“잘 다녀오십시오. 셀레나 씨.”

프레드의 응원을 받으며 마차가 출발했다. 가는 길에 곧장 서류를 열어 보았다.

“심문회가 끝나고 확인하는 게 아니라 지금 볼 거야?”

“네. 무슨 내용이 있을지 궁금해서요.”

침착하게 서류봉투를 뜯은 나는 한 페이지를 다 읽기도 전, 서류를 내려놓은 채 심호흡을 했다.

“왜 그래?”

“잠시만요.”

충격적인 정보에 잠시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이유 모를 불안이 엄습해 어깨가 떨려 왔다.

“힘들면 나중에 읽어.”

“아뇨. 지금 읽고 들어갈래요. 안 그러면 심문회 내내 신경 쓰일 것 같아요.”

나는 다시 서류에 집중해 나갔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거였다.

에스타리온 백작의 딸이 납치를 당한 때에 내 친모라는 줄리아의 집에선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남자의 시체는 들판에 버려졌는데, 마을의 경관이 살인사건을 알아차렸을 때엔 이미 들개들의 밥이 되어 뼛조각 하나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이따금 줄리아의 집에 들르던 사람으로, 줄리아는 그 남자의 정부였다고 한다.

정확한 신분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평소 입고 다니던 옷과 이따금 줄리아에게 많은 양의 돈을 던져준 걸 보아 부유한 집안의 사내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줄리아는 그 돈을 도박에 죄 탕진했고 사내가 죽은 뒤엔 제 딸아이와 함께 도망쳐서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렇게 수사는 허무하게 종결되었다.

‘말도 안 돼.’

내가 살인범의 딸일지도 모른다. 아니, 아니다. 내가 누구의 딸인지는 아직 그 무엇으로도 확언할 수 없는 일이다.

서류를 다시 봉투에 집어넣었다. 복잡한 에이든의 시선에도 그에게 이 사실을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아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심문회가 끝나고 나면 마누엘 사제를 만난 김에 마법 파훼를 도와 달라고 해야겠어요.”

“오늘은 쉬는 게 좋지 않을까?”

“다른 날 그를 만나러 가는 게 더 일인걸요.”

“그래. 그렇다니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서류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창밖을 보니 멀리 신전이 보였다.

“이단심문회에서 어떤 질문이 들어오건 그들에게 인정받을 자신 있어요.”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 만든 약물이다. 누가 뭐래도 당당할 수밖에 없다.

마차가 멈췄다. 긴장이 내려앉은 신전이 보였다.

심문회에서 내가 이기게 되면 레이온 제약은 그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완벽한 약물로 인정받게 될 테다.

그렇기에 나는 설렘 반 긴장 반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될 때다.

* * *

크루커스는 에스타리온의 보배였다.

상식적으로 가문의 성물을 뺏어서 셀레나에게 건네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그 누구보다 셀레나가 필요했다.

레이온 제약은 황실이 신전을 견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였다.

그렇다고 해서 에스타리온 백작가를 등한시해도 되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다.

‘셀레나는 복수를 택했고 곧 기억을 되찾겠지.’

황태자는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그가 이제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건, 이 모든 폭풍의 중심에 있는 셀레나를 배려해서였다.

셀레나는 기억을 감당하지 못했고 그런 그녀를 억지로 복수니 진실이니 하는 파란 속으로 밀어 넣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그 모든 걸 감당할 자신이 있어 보였다. 많이 강해졌고 의연해졌다.

‘백작 가와 셀레나가 손을 잡기란 힘들어 보이지만 에스타리온이 레이온 제약에 적대적인 건 안 될 일이니…….’

에스타리온 백작은 셀레나를 끔찍하게 증오했다.

그녀 때문에 친딸의 인생이 망가졌다고 철석같이 믿기 때문이다.

가정사에 끼어들고 싶진 않았지만 황태자는 마음이 급했다.

아버지인 황제의 건강이 급격히 안 좋아져서 일 년을 넘기기 힘들 거란 진단을 받았다.

하루빨리 승계 작업을 마무리해야 하고 황위에 오른 뒤 신전과의 권력다툼을 대비해야만 했다.

언제까지나 셀레나가 알아서 모든 걸 해결하도록 두고 볼 수도 없을뿐더러 지금 그녀는 이단심문회를 치르고 있다.

곧 심문회의 결과가 나올 텐데, 그녀가 승리하건 패배하건 백작은 진실을 알아야만 할 듯하다.

“결론이 났군.”

자리에서 일어난 황태자는 백작을 찾으러 행정부로 갔다.

황태자가 나타나자 행정부 직원들이 일어나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백작. 잠시 이야기 좀 하지.”

“전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시간을 내줄 수 있는가?”

“예. 한 시간 정도는 가능합니다.”

“그래. 잘됐군.”

황태자는 행정부 장관실의 문을 찰칵하고 잠궜다.

누군가 엿들어선 안 되기에 만전을 기한 것이다.

“자네에게 말할 게 있네.”

“무엇입니까?”

“믿기 힘든 이야기가 될 테니 잠시간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말해 두고 싶군.”

“믿기 힘든 일이라면 이미 많이 겪었으니 그냥 말해 주십시오.”

“그래. 그렇다면야…….”

황태자는 본론을 꺼내기 전 에스타리온 백작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의 시선에 백작은 어색한 듯 인상을 구겼다.

“왜 그러십니까?”

“항상 궁금했는데, 셀레나는 누굴 닮은 건가?”

“그 아이는…….”

제 핏줄이 아니라고 말하려던 백작은 함부로 약점을 보여선 안 되는 황태자임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대외적으로 셀레나와 시에나는 그의 딸로 알려져 있었다.

“셀레나는 제 할머니를 닮은 겁니다.”

“아. 자네의 모친을 닮았던 거였군. 그 금색 눈도 말이지.”

“바로 윗윗대에 비슷한 얼굴을 한 분이 계시긴 하지만 금색 눈만큼은 아주 먼 조상에게서 내려온 겁니다. 당시 성인으로 추앙받았던 건국 영웅, 초대 에스타리온 백작님을 닮으신 거지요.”

“그랬군. 그런 거라면 셀레나가 누굴 닮았는지 잘 안다는 건데, 어째서 그 애가 자네의 딸임을 믿지 못 하고 내친 거지?”

황태자가 백작가 내부의 일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던 터라 백작은 당혹감을 숨기기 위해 최대한 침착한 척을 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하! 레이온 제약의 이단심문회가 끝났다고 합니다!”

장관실 밖에서 헐레벌떡 뛰어온 황태자의 시종, 피터슨이 소리쳤다.

그의 말에 황태자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심문회가 시작한 지 한 시간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빨리 끝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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