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64화 (65/134)

<64>

“좋아요. 파비안. 처음부터 다시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도록 해요.”

이단심문회가 이틀 남자 파비안과 함께 심문회 준비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제출할 서류도 완벽하게 만들어 놓았고 그곳에서 어떤 주제를 어떤 뉘앙스로 말할지도 연습했다.

“안 떨리세요? 전 벌써부터 걱정되고 떨려서 밤에 잠이 안 와요.”

“겁먹지 마요. 어차피 한 번은 넘어야 할 산이에요.”

파비안과 달리 이단심문소에서 밑바닥을 경험해봐서 심문회가 무섭지 않았다.

내겐 더 잃을 것도 없었고 두려울 것도 없다. 그리고 난 내 약을 믿는다.

“파비안.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따뜻한 우유를 마시며 긴장을 풀어요.”

“그래도 될까요?”

“이만하면 더 연습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염려 마요.”

“셀레나 씨만 믿어요.”

파비안은 자기 전에 다시 한번 서류를 확인해 보겠다며 짐을 싸 들고 퇴근했다.

나는 심문회 이외의 다른 일을 처리하기 위해 한 시간만 더 있다가 퇴근하기로 했다.

그때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달칵. 문소리가 들렸다.

“파비안. 또 집 열쇠를 두고 간 거예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에 고개를 들자 파비안이 아닌 황태자가 보였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나 내가 레이온 제약의 소유주인 걸 숨길 수 있으리라 생각진 않았다.

“오랜만이군.”

“어쩐 일이세요?”

황태자는 허락받지도 않고 내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손님에게는 차를 내주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그를 위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여기 온 목적이 뭔가요?”

“내가 왜 왔는지 모르진 않을 것 같은데.”

“이쪽은 전하와 달리 상대가 간절히 필요하지 않아요.”

황태자의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내 발언에 자존심이 상할 테다.

“요점만 말해 줬으면 좋겠는데요.”

“이틀 뒤 이단심문회라고 들었다. 심문회가 끝나고 나면 나와 협력하는 조건으로 심문회를 무사히 치를 수 있도록 도와주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도와주실 수 있나요?”

“제아무리 황실이 신전 측과 대립한다고 해도 황실은 황실이다. 그 정도 압박이야 가할 수 있는 법이지.”

“신전은 이번 일을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황실의 압박보단 향후 레이온 제약이 가져올 파장이 더 두려울 테니까요.”

말장난에 혹할 만큼 내가 순진해 보였다면 그는 나를 아직도 잘 모르는 거다.

“레이온 제약을 위해서라도 황실이 아닌 우리가 가진 결백을 완벽히 증명하는 게 좋겠다는 확신이 드는군요.”

“셀레나.”

그가 경고하듯 나직한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나는 그에게 맞서듯 단단한 어조로 답했다.

“네. 전하.”

“그대가 변한 건 에이든 칼립소의 영향인 건가?”

“무슨 대답을 바라시기에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모든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고받아요.”

“그대가 에이든 칼립소와 함께 산다는 걸 들었다. 백작가에서 내쳐졌다고 막살기라도 작정한 건 아니겠지?”

매번 이런 식으로 신경을 들쑤시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그가 황태자가 아니었다면 에이든이 화가 날 때면 저도 모르게 내뱉는 욕지거리를 그대로 들려주었을 테다.

“이제 와 저한테 왜 관심을 보이시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경영인으로서 협력하지 않으니 옛정이라도 들먹이려고 그러시나요? 아니면 설마 제가 아직도 전하를 좋아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가 답할 시간을 주지 않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저는 전하께서 이단심문소에서 제게 보인 모욕을 잊지 않았어요.”

이가 빠득빠득 갈렸다.

그때 느낀 치욕과 실망, 슬픔과 좌절은 그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다.

사랑은 배반당했고 기대는 실망이 되었다.

내가 가진 달콤한 감정은 죄 쓰레기통에 처박혀 절망만이 남았다.

가족이라 믿었던 이들의 배신만큼 사랑하고 존경했던 이의 외면이 고통스러웠다.

“그러니 감히 말씀드려요. 허튼수작이라면 집어치우세요.”

“입도 험해졌군.”

“이런 부분은 분명 에이든의 영향을 받은 거겠죠.”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황태자가 저렇게 불쾌함을 노골적으로 보이는 일은 잘 없었다.

그 순간, 불현듯 깨달음이 찾아왔다.

“…미련이 있으시군요.”

“…뭐?”

황태자가 바보처럼 되물었다. 얼빠진 모습이 꽤 웃겼다.

“제게, 미련이 있으신 것 같은데. 아닌가요?”

스스로도 제 마음을 몰랐던지 그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정말 한심하고 이상한 사내다. 버릴 땐 언제고 이제 와 미련이라니. 그것도 스스로 자각도 못했다.

“나는…….”

황태자의 시선이 크게 흔들렸다. 어지간히 혼란스러운지 어울리지 않게 말을 더듬더니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쩔 줄 모르는 기색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크루커스를 제게 주면 전하와 손을 잡는 걸 생각해 볼게요.”

내 도발에 그의 볼이 움찔거렸다.

“크루커스를?”

“네. 크루커스를요. 그 성물에 흥미가 있어서요.”

크루커스에 대해 자세히 연구해 보고 싶긴 하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사실 황태자를 골리기 위해 그냥 던져 본 말에 가까웠다.

에스타리온 백작가에서 그것을 내어줄 리도 없거니와 내게 크루커스가 있어도 특별히 할 수 있는 건 없다.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나는 얄궂은 미소를 지으며 평정이 깨진 황태자를 감상했다.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내겐 아쉬울 게 없는 일이라 나는 상황을 즐기기만 하면 되었다.

* * *

시온은 시종이 주고 간 보고서를 확인했다.

로잘린이 에스타리온 백작가에서 증언하고 한 달 뒤, 그녀의 아들이 익명의 후원자에게 후원을 받아서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우연이야. 우연.’

스스로에게 타이밍이 절묘해서 벌어진 우연이라고 되뇌었지만 마음이 편해지진 않았다.

사실 시에나가 동생이 맞다는 증거는 차고 넘쳤다.

목 뒷덜미의 점과 당사자가 아니면 모르는 것들을 술술 읊은 추억 등 그녀는 분명 에스타리온의 하나뿐인 딸이었다.

그럼에도 자꾸 마음 한편이 불안한 건…….

‘대체 왜 이러는 건지 나도 모르겠군.’

시온은 머리를 흔들며 상념을 지우려 애썼다.

마침 창밖으로 시에나가 보였다. 시에나는 하녀들과 하하호호 웃으며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시에나는 성격이 좋아서 고용인들과 잘 지냈다. 예법도 악착같이 익혔고 교양 공부도 꾸준히 하는 중이었다.

‘저런 애가 하녀를 괴롭혀서 내쫓고 계단에서 일부러 굴렀다니.’

다 헛소문일 거다. 그녀를 시기 질투한 이들의 못난 입방정.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지만 한 번 숨이 불어 넣어진 의심은 쉽사리 꺼지질 않았다.

무어라 콕 집어 이게 문제다 라고 할 수는 없지만 신발 속 오래 알갱이처럼 자잘자잘하게 신경을 건드는 게 있었다.

왜 새우를 먹지 않았을까. 로잘린의 아들을 후원한 익명의 후원자는 누구일까.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확인해 보는 거야.”

이것을 끝으로 시에나를 의심하는 건 그만두자고 마음먹은 시온은 곧장 주방으로 갔다.

그는 식료품 창고에서 새우를 꺼내 직접 손질을 시작했다.

“도, 도련님. 이런 건 저희가 하는 일인데…….”

“시에나에게 직접 요리를 해 주고 싶어 그러는 거니 신경 쓰지 말고 일들 해.”

찬물에 손을 담그며 새우 껍질을 까고,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른 뒤 버터를 넣어 가벼운 요리를 하는 내내 머리가 복잡했다.

시에나가 요리를 맛있게 먹으며 이런 것도 만들 줄 아냐고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상상을 하기도 했고, 지금 자신을 의심하냐며 화를 내며 음식을 씹어 삼켜 제 무고함을 증명하는 장면을 떠올리기도 했다.

어떤 쪽이 되었건 시온은 시에나를 믿고 싶었다.

만에 하나, 그럴 리 없을 테지만 정말 만에 하나 그녀가 제 동생이 아니라면…….

‘그런 건 있어선 안 돼.’

셀레나도, 시에나도 친동생이 아니라면 진짜 동생은…….

최악의 경우는 셀레나가 친동생이란 거다. 하지만 그건 현실성 없는 일이다. 애초에 기억도 없는 사기꾼인 것을.

뚝딱뚝딱 요리를 해낸 시온은 하녀를 시켜서 시에나를 불러오도록 했다.

“오라버니. 무슨 일이에요? 와, 맛있는 냄새!”

식당으로 건너온 시에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시온은 그녀를 반갑게 맞이하며 설명했다.

“기사단의 친구들이 요리를 가르쳐 주더라고. 너한테 꼭 해 주고 싶어서 생각난 김에 해 봤어. 슬슬 출출할 때니 같이 먹자.”

“그렇잖아도 뭔가 먹고 싶었는데 잘됐네요!”

발랄하게 대답하며 다가온 시에나는 요리를 보고는 흠칫하고 얼굴을 굳혔다.

그녀는 빠르게 곤란함을 지우곤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시온은 그 변화를 예리하게 인지했다.

“새우 요리네요…….”

“응. 요리를 가르쳐 준 녀석이 남부에 내려가서 새우 요리를 배워 왔더라고. 얼른 앉아.”

시온은 시에나에게 의자를 빼 주었다. 그의 눈짓에 시에나는 억지로 자리에 착석했다.

그는 맞은편에 앉으며 시에나에게 포크를 건네주었다.

“새우 손질도 내가 다 했어.”

“그래요? 오라버니가 요리도 할 줄 안단 건 몰랐어요.”

“그러고 보니 넌 새우 좋아해?”

“사실 그리 안 좋아해요. 알다시피 새우는 서민들에게 아주 흔한 음식이잖아요. 오히려 하층민들만 먹는 바다의 벌레라며 천대하던 거라 음…….”

시에나는 시온의 눈치를 힐끗 보는 척하며 뜸을 들였다.

그러다 힘겹게 털어 내듯 이야기를 꺼냈다.

“온갖 무시를 당하며 지내던 하녀 시절이 떠올라서 조금 거북해요… 죄송해요.”

시온은 가슴이 요동쳐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시에나를 향한 안쓰러움과 이것이 교묘한 거짓말 같다는 의심이 공존했다.

이런 순간에도 시에나를 온전히 믿지 못하는 스스로가 쓰레기 같았지만 그는 시에나에게 확신을 갖고 싶었다.

“미안. 내가 괜히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한 것 같네.”

“괜찮아요. 그럼…….”

시에나가 조심스레 포크를 내려놓으며 상황을 무마하려고 했다. 이에 시온이 못 본 척 부드럽게 제안했다.

“그래도 조금만 먹어 봐. 널 위해 준비한 거잖아.”

맛만 보는 수준이라도 좋다. 먹고 의심을 덜어내 주길 바랐다.

하녀의 딸은 새우 알레르기가 있었다.

셀레나는 새우를 먹지 못 했지만 맛만 보는 수준에서는 알레르기 증상이 있진 않았다.

정확히 말해 셀레나의 경우는 새우 자체를 향한 거부감이 지독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 마음이 불안한 건 그것 때문이었다.

셀레나가 새우를 못 먹는 게 실은 알레르기가 아님을 알아서.

아버지는 몰라도 그는 그 사실을 알았다. 납치당한 뒤 돌아온 셀레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게 시온, 그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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