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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63화 (64/134)

<63>

에이든은 이단심문회 때문에 가만히 있질 못했다.

셀레나가 이단심문소에 들어갈 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가 또 그곳에 갈 것처럼 염려되어 여간 초조한 게 아니었다.

이제 간신히 몸을 회복하고 생기를 되찾았다. 그런데 또 이단이란 오명에 시달리며 고생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새하얘졌다.

“에이든. 집중해요.”

셀레나의 나직한 경고에도 에이든은 더 이상 책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책상에서 몸을 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잘 준비하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요.”

아무렇지 않다는 말투와 의연한 태도가 지금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상황에 임하는지 보여 주었다.

“날 믿어요.”

“당신은 믿어. 신전을 못 믿는 거지.”

에이든은 신전 내부의 정치적인 부분까지는 알지 못 해도 그 본질은 잘 알았다.

그들은 신을 모신답시고 권력을 행사하고 신의 이름으로 사리사욕을 챙기는 부패한 집단이었다.

노예 시절 그가 보고 겪은 신전은 늘 그랬다.

소외받고 병들고 가난한 이들을 챙기기보다는 부유한 이들의 비위를 맞추며 콩고물을 얻어먹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이들이 셀레나의 적이 된다니 그로서는 걱정될 수밖에 없다.

“놈들이 어떤 비열한 짓을 저지를지 몰라. 단순히 이단심문회에서 취조를 받는 거랑은 다를 거란 말이야.”

“어떻게든 잘 넘길 자신 있어요. 단단히 준비하고 있고요.”

셀레나는 자신이 한 말을 증명하려는 듯이 희미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난.”

난 당신이 쉽고 편한 길만 가면 좋겠어.

그러나 자신이 하고픈 말이 셀레나에겐 의미 없는 소리란 걸 알아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셀레나는 그와 달리 무척 똑똑했고 아는 것도 많았다.

강하고 단단한 사람이니 자신이 배신한 걸 알아도 금방 회복하고 잘 살 테다.

언제고 그녀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자 지옥에 처박힌 듯 슬퍼졌다.

셀레나가 마법을 파훼하기 위해 마누엘 사제를 찾는 시간이 늘어감에 따라 그와 이별할 때가 다가왔다.

“무슨 고민 있어요?”

“아니. 아냐. 아무것도.”

“수업은 여기까지만 해요. 당신이 너무 집중을 못해서 안 되겠어요.”

“그래. 그럼.”

수업이 끝났다고 해서 셀레나의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그녀는 서재에 남아서 차곡차곡 할 일을 해 나갔다.

주말 내내 이단심문회에서 발표할 것과 공격으로 들어올 부분에 대해 정리했고 이후 언론에 뿌릴 것들을 추렸다.

에이든은 셀레나의 맞은편에 앉아서 그녀가 하나하나 서류를 확인하고 심문회 준비를 하는 걸 구경했다.

누군가에게는 지루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에이든에겐 셀레나를 구경하는 것만큼 재미난 게 없었다.

집중할 때는 이런 얼굴을 하는구나, 무언가가 잘 안 되면 입술을 비죽 내미는구나…….

그녀의 사소한 반응을 확인을 알아가는 것도 즐거웠고 평소엔 볼 수 없는 표정을 구경하다 보면 괜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에이든. 안 바빠요?”

보다 못한 셀레나가 에이든에게 그만 보란 뉘앙스로 말을 건넸다.

“지금 아주 바쁜데?”

“네?”

“당신을 지켜보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어서.”

셀레나의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어갔다.

생각 없이 툭 내뱉었다가 뒤늦게 그 뜻을 생각한 에이든도 얼굴을 붉혔다.

그는 밀려오는 민망함에 목덜미를 쓸며 멋쩍게 일어났다.

“난… 어… 산책이나 하고 와야겠어. 그럼 열심히 해.”

에이든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셀레나는 허둥지둥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시선이 신경 쓰여서 바쁘지 않냐고 했지만 사실 그와 함께 있으면 복잡한 마음이 정리되어 좋았다.

혼자 있을 때면 조각난 기억이 눈앞에 아른거리곤 했다.

작은아버지였던 루카스가 나온 것도 심란했고, 흩뿌려지던 피가 떠오르면 간담이 서늘해졌다.

“하아.”

그녀를 가장 괴롭히는 건 다름 아닌 소년이었다.

도망치라고 외치는 음성, 아이의 검은 머리. 단서라고는 두 가지밖에 없는데 왜 자꾸 그 소년이 에이든 같은지 모르겠다.

‘당신이 뭔가를 숨기고 있단 건 알아.’

황태자도 시에나도 에이든도. 모두가 저마다 비밀을 감추고 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이 진실을 가려내는 건 기억을 떠올리는 것뿐이다.

셀레나는 마누엘 사제를 만나는 날이 체크된 달력을 확인하며 펜을 내려놓았다.

여러모로 심란한 나날이었다.

* * *

신전에서 마누엘 사제의 위치는 애매하기 그지없었다.

마누엘은 신학대 시절부터 따뜻한 마음씨와 영리한 머리로 인정받았다.

사제서품을 받은 뒤에도 똑같았는데 문제는 신전 측이 바라는 방향과 마누엘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달랐단 거다.

그는 유능한 사제이지만 통제되지 않는 요주의 인물이었고, 신자들의 신임을 받지만 신전의 규율을 함부로 여겨서 동료들의 신경을 건드리곤 했다.

대표적으로 진통 포션을 부모 없는 아이를 위해 쓰게 해달라고 일 년이 넘게 건의를 올린 일이 있다.

진통 포션이 신전의 재정을 해결해 주고 권력을 가져오기에 그 쓰임은 신전에서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어, 고아를 위해 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마누엘은 능력만큼은 확실해 이단심문소의 감별의식 같은 이런저런 일을 떠맡곤 했다.

오늘 이단심문회에 참석 요구를 받은 것도 그 연장이었다.

“레이온 제약의 진통제와 마취제의 이단 행위에 대한 감별?”

참석 요구서를 확인한 마누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통제가 수도에서 돌풍을 일으키기에 이런 날이 올 거라 예상했었다.

“미쳤군. 사제가 열 명이나 참석하다니.”

통상적으로 이단심문회에 참석하는 사제는 네다섯. 열 명이나 동원하는 건 신전 측에서 레이온 제약을 견제한다고 선포하는 거다.

통증으로 고통받던 에릭은 진통제를 복용한 이후 근 몇 년 만에 밤잠을 제대로 청하게 되었다.

그가 볼 땐 셀레나의 진통제는 이단이나 마약이 아니었다.

오히려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신의 자비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모든 걸 떠나,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이들의 고통 앞에서 이단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큰 의미가 있을까?

신전을 향한 회의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곧 인사발령인데…….’

사제들은 이삼 년에 한 번씩 맡은 임무와 구역이 바뀐다.

이번에 마누엘은 다른 동료 사제들과 승진을 다투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승진하지 않고 평사제로 살아가도 불만이 없지만, 문제는 그가 승진하지 못할 경우 완전히 다른 지역으로 발령이 난단 거다.

그렇게 되면 그가 돌보던 아이들과도 멀어지게 된다.

보육원이 공기 좋은 시골에 있단 이유로 아픈 아이들이 많아 함부로 책임자를 바꿔선 안 됐다.

아이들 개개인의 증세와 성향을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와야만 하는데 그게 그렇게 쉽게 이뤄지는 것도 아니었다.

“신이시여.”

마누엘은 보육원의 창고에 따로 만든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아이들을 떠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제발 저희를 굽어살피소서.”

애타게 기도하는 도중, 창고 문이 열리더니 아는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마누엘 사제. 잠시 이야기 좀 해.”

신이 그의 기도에 응답한 것일까. 아니면 응답한 것이길 바라는 그의 기대인 걸까.

마누엘은 에이든의 방문에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일어날 것임을 직감했다.

* * *

셀레나와 함께할 때, 에이든 칼립소는 거칠지만 다정한 사내라 불릴 수 있었다.

그는 셀레나가 힘들어하면 그녀의 고통이 제 고통인 양 괴로워했고, 언제 어디서나 사랑에 빠진 사내의 눈을 한 채 그녀를 보곤 했다.

그런 에이든이기에 마누엘은 오늘 그가 자신을 방문한 것도 셀레나 때문에 온 것이라 직감했다.

“이단심문회 때문에 오셨군요.”

“맞아. 심문회 때 셀레나를 위해 힘을 실어 줬으면 하는데.”

“진통제는 이단 물품이 아닙니다. 그러니 제가 셀레나 씨를 지지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하지만.”

“하지만?”

“저 혼자 지지한다고 한들 큰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건 다른 사제들이 약물을 어떻게 받아들이냐겠지요.”

“약물엔 아무 문제도 없어. 귀가 있다면 설명한 걸 알아듣겠지.”

“중요한 건 약물이 이단이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신전에 이득을 주느냐 아니냐지요.”

에이든이 미간을 찌푸렸다.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린 그는 셀레나와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사탕을 녹인 듯 달콤하던 시선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의 그는 사납고, 거칠고, 날카로웠다.

“심문회에 참석하는 사제가 누군지 알 수 있을까?”

“저로서는 당일에야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심문회 전 청탁이 오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서로간에 알려 주지 않거든요.”

“하지만 마누엘, 당신은 초청받았잖아. 그렇지 않아?”

“어떻게 아신 겁니까?”

“이단심문소에서 일할 만큼 실력으로 인정받는 사제가 몇이나 된다고.”

습관처럼 가슴팍에 팔짱을 낀 에이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팔짱을 끼자 거대한 근육이 도드라져서 그를 야생짐승처럼 보이게끔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맘때쯤이지? 사제 승진 결과 발표 말야.”

“아, 네. 그렇습니다만… 신전 사정을 잘 아시는군요.”

“노예 놈들을 위하는 척이라도 하는 건 신전뿐이라 이래저래 굴러먹으며 알게 된 게 많지. 어때? 승진할 수 있을 것 같아?”

“제 승진 여부가 경에게 중요한가요?”

“아주 중요하지. 일개 평사제가 감싸는 것보다야 승진하거나 승진이 확정된 사제가 편들어주는 게 더 힘 있고 좋잖아?”

짓궂게 웃은 에이든은 성경에 나오는 악마 같았다. 성인을 꾀어 타락케하는 간악한 악마 말이다.

“이번에 승진 기회를 노리는 사제들 이름만 불러.”

“제발.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십시오.”

마누엘이 신전 내 정치에서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건 에이든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가 바라는 건 셀레나를 위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누엘을 승진시키는 거였다.

“주임사제와 평사제는 책임과 의무가 다른 만큼 권리도 어마어마하게 차이 난다지. 잘 생각해 봐, 마누엘. 당신이 주임사제가 되면 당신이 아끼는 그 아이들을 위해서 더 많은 예산을 끌어다 쓸 수 있어.”

“제발…….”

“그렇게 되면 아이들이 먹는 음식의 질도 달라질 테고 입는 옷도 받게 될 교육도 차원이 달라지겠지. 그런 사소한 차이가 아이들의 미래를 뒤바꾸게 될 거야.”

아이들을 거론하는 에이든은 악마적이었다.

어린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질 낮은 재료로 만든 음식만 먹고, 기본도 못 되는 교육에 만족해야 하는 현실이… 마누엘은 눈을 질끈 감고 대답했다.

“존 플래밍코요. 3구역의 사제입니다.”

눈을 감아 에이든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마누엘은 그가 지금 그 누구보다 잔인해 보일 것이라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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