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오랜만입니다.”
고개를 까딱인 황태자는 마시던 차를 마저 홀짝거렸다.
은근한 무시에 얼굴이 홧홧해질 법도 하지만 시에나는 개의치 않았다.
이 정도 대접은 하녀 시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에스타리온 백작은 달랐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시에나에게 다정히 말했다.
“잠시 자리를 비켜 주려무나. 전하께 따로 드릴 이야기가 있단 게 이제야 떠오르는구나.”
“네. 그럼 얘기들 나누세요.”
시에나가 떠나자 에스타리온 백작이 황태자에게 경고했다.
“아무리 전하라 하셔도 제 딸아이를 이렇게 대우할 권리는 없습니다. 예의를 지키지 않는 분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를 주고 싶진 않군요.”
“내게 필요한 건 약혼녀가 아니라서 백작의 선언이 나쁘진 않은데.”
에스타리온은 다른 귀족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성물의 수호자이기에 신전과도 밀접한 관계였고 제국의 건국을 함께한 건국 영웅의 직계가문이라 제국 내에서 그 의미가 남달랐다.
그들은 대귀족 중의 대귀족이라 제아무리 황권이 강해도 황실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대체 무얼 믿고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진실을 안다는 건 아주 큰 권력을 쥔 거라.”
“예?”
“아무것도. 그보다 이단심문회를 연다고 들었는데.”
뜻을 알 수 없는 시선이 에스타리온 백작에게 닿았다.
백작은 얼마 전 신전 측에 이단심문회를 열어 달라고 간청했다.
워낙 신전과의 관계가 긴밀한데다 레이온 제약의 팽창 속도가 가팔라 신전에서 견제를 들어갈 때가 되었으니 이단심문회는 반드시 열릴 테다.
“예. 진통제인지 뭔지 하는 약을 보니 도저히 지켜볼 수가 없어서 직접 신전에 연락을 했습니다.”
“심문회를 조금 미룰 수는 없는가?”
이단심문회가 열리는 걸 막을 수 없다면 레이온 제약이 조금이라도 더 성장하도록 시간을 벌어야 했다.
혜성처럼 나타난 진통제의 존재에 백성들은 크게 환호했고, 백성들의 지지가 더해질수록 신전이 레이온 제약에 가하는 압박도 줄어들 테다.
황태자의 물음에 에스타리온 백작이 인상을 썼다. 레이온 제약은 셀레나가 운영하는 제약 회사였다.
“사기꾼이 만든 약을 백성들에게 먹이실 셈입니까?”
“작은아버지께서 그 효능을 직접 확인하셨다. 지난번 어깨 수술을 받을 때 레이온 제약에서 나온 마취제를 함께 사용했는데 아주 성공적이었지.”
“황실에 사기를 쳤으니 죄를 엄격히 다스려야겠군요.”
“회복 과정에도 진통제를 통해 큰 효과를 보셨는데 그를 두고 사기꾼이라고 하는 건 백작답지 않게 경솔한 발언인 듯하군.”
“문제가 되기에 앞서서 분명히 말씀드리건데 셀레나는 더 이상 제 딸아이도, 에스타리온의 사람도 아닙니다. 그 아이는 완벽한 남이니 제 가족과 가문에는 아무런 피해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셀레나의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거지?”
“모르셨습니까? 그 약을 생산한 레이온 제약이 셀레나의 것입니다.”
“뭐?”
늘 침착하던 황태자이지만 백작이 말한 정도는 적잖게 충격적이라 평온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레이온 제약은 신전을 견제하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할 만큼 아주 중요한 존재였다.
수도는 지금 가난한 이들이 살 수 있는 진통 약물의 등장에 환호 중이었다.
마약처럼 중독성이 있지도 않았고 진통 포션처럼 값이 비싸지도 않았다.
그런데 효과는 마약이나 진통 포션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았다.
그런 레이온 제약이 셀레나의 것이란 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직접 행정부에 서류를 제출하러 왔더군요.”
인상을 쓴 황태자는 대꾸도 않고 생각에 잠겼다. 툭. 툭.
그는 의자에 팔걸이를 손끝으로 두들기다가 일어나 말했다.
“그 약은 진짜였다.”
“속으신 겁니다.”
“아니. 백작의 얄궂은 감정이 진실을 보는 눈을 가린 거겠지. 레이온 제약이 앞으로 정계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모르진 않을 거라 생각되니 심사숙고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걸 추천하지.”
“제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오늘 오후면 이단심문회 날짜와 출석요구서도 나올 테고요. 그나저나 시에나가 오래 기다릴 듯하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에스타리온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황태자도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시에나와는 궁내를 돌며 따로 대화해 봐야겠군.”
* * *
백작은 황태자가 시에나에게 제대로 대접해 주려고 그런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황태자가 시에나를 밖에서 보려고 한 건 그녀가 황궁 응접실을 사용할 만큼 중요한 이가 아니라서다.
황태자는 가치가 없는 이들에게는 가차 없었다.
물론 그녀가 평범한 제 백성이었다면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고 대우해 줬겠지만 시에나는 사기꾼에 불과했다.
시에나는 황태자의 속도 모르고 그가 제게 관심을 보인다고 결론 내려 특유의 발랄한 미소와 함께 대화를 이어나갔다.
“오라버니는 전하께서 진중하고 생각이 깊은 분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런가? 시온은 그대가 착하고 밝은 여인이라더군.”
“오라버니께서 저를 그렇게 말하셨어요?”
“그래. 그랬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대는…….”
시에나를 바라보는 황태자의 눈이 짙어졌다.
그는 담벼락에 핀 꽃이 예쁘다고 지나가듯 말하는 사람처럼 태연하게 말을 내뱉었다.
“더러운 사기꾼으로밖에 안 보이는군.”
“…예? 저, 전하. 왜 그런 말을…….”
흔들리는 시선, 하얗게 질린 얼굴, 와중에 굴러가는 머리. 황태자에겐 모든 게 빤히 보였다.
“그대가 가짜인 것을 안다.”
“그게 무슨… 어떤 의미인가요?”
당혹스러움을 표현하려는지 목소리를 떨긴 했지만 정작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다.
황태자는 빤히 보이는 속에 픽 웃음을 터트렸다.
“착각을 한 이는 에스타리온 백작이겠지. 내가 모를 줄 알았나?”
“전하. 혹시… 셀레나와 저를 착각하신 것 아닌가요? 전하께서 집안일을 어떻게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진짜가 맞아요.”
“연기를 하려면 좀 더 정교히 하는 게 좋겠군. 나였다면 끝까지 시치미를 뗐을 거다.”
“…….”
대체 어떻게 아는 거지? 모든 건 완벽했다. 설마 에이든인 걸까? 그 애가 나를 알아보고 황태자에게 모든 걸 고발한 거라면 말이 된다.
시에나의 속내를 읽은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백작가에서 그런 일이 발생했는데 황실이 조사도 않고 있었을까. 스스로 에스타리온 백작가를 나갈 기회를 주마.”
황태자는 괜한 소리를 해서 에스타리온 백작과 대립하고 싶지 않았다. 집안일에 관여하는 건 더더욱 싫었다.
무엇보다 일을 키웠다가는 신전 측이 그가 진실을 알고 있단 사실을 눈치챌 가능성이 높다.
그저 조용히, 집안 내의 작은 소란으로 마무리되어 아무 일 없었단 듯 정리되길 바랐다.
“사기꾼에게 두 번의 기회를 줄 생각은 없으니 알아서 처신하는 게 좋을 거다.”
싸늘하게 경고한 황태자는 그길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혼자 남은 시에나는 완전히 얼어붙어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꼼짝할 수 없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시에나는 겁에 질려 손톱을 씹었다.
‘황태자에게 증거가 있진 않겠지?’
무언가 방법이 필요했다. 설사 모든 진실이 탄로 나더라도 지금처럼 살 수 있는 방법이.
* * *
미친 듯 수련했음에도 복잡한 머리는 정리되지 않았다.
오히려 마누엘 사제를 만나고 온 뒤 갑갑해진 가슴이 더더욱 무거워졌다.
“후우.”
오늘 들어 한숨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내내 책을 붙들고 씨름하던 에이든은 결국 들고 있던 서적을 한쪽으로 치웠다.
글자가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아 오늘은 공부하기 글른 듯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확인했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저택 내부를 산책하는 셀레나가 보였다.
그녀는 점심 식사를 한 뒤엔 저택 하녀들과 가벼운 산책을 하며 수다를 떨곤 했다.
“셀레나…….”
그녀를 보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제껏 셀레나의 옆을 지키며 마음이 안 좋긴 했지만 마누엘 사제를 만난 뒤엔 그 정도가 남달랐다.
어차피 뒷생각은 하지 않고 침묵했다.
자신이 셀레나를 위해 나서서 증언해 주면 모든 게 해결되리라는 걸 알지만, 그녀와 함께할 수 있단 게 시리도록 기뻐서 그랬다.
사실 에이든이 백작가에서 소동이 일어나는 걸 깨닫고 셀레나를 찾았을 때, 그녀는 이미 이단심문소에 있었다.
그때 그가 할 수 있었던 건 막 심문소에서 나온 셀레나를 황태자보다 먼저 데리고 가는 거였다.
그리고 지금 해야 하는 건 셀레나가 기억을 찾은 뒤 자신을 벌하길 기다리는 것이다.
셀레나가 기억을 찾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녀를 방해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당신이 그 고생을 했는데…….’
고개를 돌리던 셀레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멀긴 하지만 충분히 서로의 눈길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였다.
에이든은 그녀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전에도 지금도, 셀레나를 보고 있으면 가슴 속에서 뜨끈한 감각이 차올랐다.
그러다 셀레나의 눈이 붓꽃처럼 부드러이 접히고 하얀 이가 드러나도록 환히 웃으면 심장이 찌르르거린다.
뱃속은 간질간질거리고 가슴이 터질 듯 벅차올랐다. 저 미소를 위해서라면 못 할 게 없다는 맹목적인 자신감도 생겨나곤 한다.
‘이러니 기억을 찾는 걸 어떻게 막겠어.’
잘못은 자신이 했으니 기억을 찾은 뒤 그녀가 배신감에 너무 힘들어하지만 않으면 좋겠다.
죄책감과 그리움이란 지옥에 살아도 좋다. 셀레나는 꿋꿋이 앞을 향해 나아가고 제 삶을 되찾길 바란다.
자신을 잊는 것도, 배은망덕한 노예 놈이라 욕해도 좋다. 용서받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으므로.
셀레나가 우편집배원에게 서류 봉투를 받는 게 보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바로 서류를 뜯어보았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프레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작님. 급히 들으셔야 할 게 있습니다.”
“뭔데 그래?”
프레드는 꽤 심각한 얼굴을 한 상태였다.
“큰일 났습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듯했는데… 어쩌면 좋습니까?”
“무슨 일이야?”
집사로 일한 뒤 프레드는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달랐다.
그는 초조한 듯 마른세수를 한 뒤 심각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신전에서 레이온 제약을 두고 이단심문회를 열기로 했답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이단심문회?”
험한 소리를 한 에이든의 고개가 당장 밖에 있는 셀레나에게로 돌아갔다.
심문회 개최 소식을 아는지 모르는지 셀레나는 평소와 같은 얼굴로 하녀들과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신전 측에서 레이온 제약의 싹을 밟기로 결심한 듯합니다. 준비할 시간도 없이 일주일 뒤 바로 이단심문회를 연다고 합니다.”
“미친 새끼들…….”
욕을 내뱉은 에이든은 질끈 눈을 감았다. 산 넘어 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