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손끝에 흐르는 몇 방울의 피는 그러려니 싶어도 바닥에 고이기 시작할 만큼 많은 피가 흐르는 건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비릿한 냄새가 머리를 마비시키고, 현장에는 끔찍한 긴장감과 참담함이 흐른다.
순간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불안이 척추를 타고 벌레처럼 기어 다닌다.
“분명 피였어요…….”
땀범벅이 된 손바닥을 치마에 비비자 옷자락이 축축하게 물들었다.
식은땀이 나는 동시에 공포에 압도되어 지나치게 춥게 여겨졌다.
“피라고? 누구의 피?”
에이든은 나보다 더 심각한 얼굴이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두 손 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기억해 내면, 나는 공황 상태에 빠질 테다. 그런 확신이 든다.
“누구 피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리고… 뭔가를 봤어요.”
마음을 굳게 먹고, 빠르게 스쳐지나가던 기억을 꺼내 곱씹어 보았다.
“제가 말했어요. ‘내 이름은 이네트야. 하지만 사실 진짜 이름은 따로 있어’라고.”
옆에 있던 에이든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언제고 시에나가 나를 이네트라 부른 적이 있다. 그렇다는 건 그 시절의 나를 안다는 의미다.
“그리고 어떤 여자가 새우를 들이밀며 말했어요. ‘그냥 처먹으란 말이야! 왜? 귀한 집에서 귀하게 자라 넌 이런 것도 못 먹는 거냐?’ 전 새우를 못 먹어요. 그녀가 내 엄마였다면 그 사실을 모를 수가 없잖아요.”
에이든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는 재판을 앞둔 죄인처럼 힘겨워 보였다.
쉽사리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인 건지 그는 한참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물었다.
“기억… 계속 찾을 거야?”
“네. 무조건 찾을 거예요. 여기까지 온 이상 돌이킬 수 없어요. 그러고 싶지도 않고요.”
“좋아. 그 여정에 내가 함께할 수 있단 게 영광이야.”
그리 말한 그는 슬프게, 시리도록 슬프게 미소 지으며 내 머리에 제 이마를 기대었다.
에이든이 낮게 한숨을 삼켰다. 그가 무엇을 숨기는지 몰라도 내겐 이야기해 주면 좋겠다.
‘은근히 자기 이야기를 안 해.’
나는 이 남자에게 모든 걸 다 털어놓았는데, 그는 그즈음 힘들었다고만 말하지 구체적인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다.
그게 못내 서운한데 내게 속에 든 걸 말해 달라 억지를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무슨 생각 해요?”
“아냐. 아무것도.”
거짓말.
그러나 그도 나도 많이 지친 터라 속에 든 말을 꾹 삼킬 밖이다.
* * *
아침 식사 전, 시온은 하인에게 보고를 받고 있었다.
“따로 금전 거래가 오간 정황은 없었습니다.”
에이든과 마주했던 시온은 그날 이후 미묘한 혼란에 시달렸다.
그는 여동생에 대한 의심을 거두기 위해 하인을 시켰고, 셀레나가 줄리아의 딸이라고 증언한 이에게선 의심스런 행보가 보이지 않았다.
‘시에나가 그럴 리가 없지.’
시에나는 분명 그의 동생이었다. 사기꾼에게 인생을 빼앗긴 가엾은 여동생.
시온은 에이든의 말에 마음이 흔들린 스스로가 한심해 헛웃음을 지었다.
그 남자가 뭐라고 무고한 누이를 의심하다니.
“그래. 알겠으니 가 보도록 해.”
하인을 내보낸 시온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식당을 향해 내려갔다. 막 복도를 돌려던 때였다.
“얘. 시에나 아가씨 앞에선 조심하도록 해. 그분에게 함부로 대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당하는 수가 있어.”
시온은 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본능적으로 저들이 하는 대화를 들어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당하다니?”
“그분, 성격이 보통이 아니시잖아.”
시에나의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고?
험하게 자라 조금 드센 면이 없잖아 있겠지만 저런 소리를 들을 만큼은 아니다.
‘하녀들이 잘못한 거겠지.’
일에 대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입방아를 찧는 것이라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셀레나 아가씨가 밉다고 계단에서 몸도 던지는 분이시니 우리는 오죽하겠어?”
순간 시온은 제 귀를 의심했다. 시에나는 셀레나가 자신을 밀었다고 했었다.
그때 가련하게 떨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는데, 저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모습은 다 연기가 된다.
“계단에서 몸을 던졌다고? 지난번에 셀레나 아가씨가 밀었던 그 사건을 말하는 거야?”
“넌 별채에서 일했기 때문에 못 들었나 보네. 그날 시에나 아가씨가 셀레나 아가씨에게 엄청 소리쳤잖아. 셀레나 아가씨는 죄인이 되어서 벌벌 떨었고. 그러다가 슬쩍 넘어졌는데…….”
말을 하던 하녀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때 로지가 그 광경을 목격했었거든. 시에나 아가씨는 로지가 목격자인 걸 알고는 그 어린애를 협박해서 입 다물게 했잖아.”
“그럼 셀레나 아가씨가 나간 뒤에 로지가 일을 그만둔 게 그것 때문이었어?”
“시에나 아가씨가 걜 오죽 괴롭혔니? 다 제 발이 저려서 그런 거야. 아 참, 그러고 보니 빨래할 시간이네. 얼른 가자. 오늘 이불 빨래 밀렸다고 했어.”
시온은 하녀들이 복도 끝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시에나가 스스로 몸을 던지고 셀레나에게 누명을 씌웠다. 그리고 하녀들을 괴롭힌다.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인생을 빼앗겼는데 그 정도 분노도 쏟아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방식이 잘못되긴 했지만 셀레나가 시에나의 삶을 빼앗은 건 더 끔찍한 일이었다.
시온은 자신이 들은 것을 기억 저편으로 억지로 밀어 넣으려 애쓰며 식당에 들어갔다.
시에나와 아버지인 에스타리온 백작은 이미 자리에 착석한 뒤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서 앉도록 해라.”
“좋은 아침이야. 시에나.”
시온은 시에나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준 뒤 식사를 시작했다.
식기를 들고 보니 뒤늦게 오늘 아침 메뉴가 보였다. 재료가 새우였다.
‘하녀의 딸은 새우 알레르기가 있다고 했어. 그리고 셀레나는 새우를 못 먹었지.’
시에나의 접시에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심 제발 시에나가 새우를 먹어 치웠길 바랐다.
하지만 시에나의 접시엔 새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막 식사를 시작한 거라 아직 못 먹은 걸 수도 있어.’
시온은 태연한 척 식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신경은 시에나의 접시에 쏠려 있었다.
그는 쭉 시에나를 주시했다. 그녀가 무엇을 즐겨 먹는지, 새우를 건드리진 않는지 등.
“…버니?”
“시온.”
시에나가 포크를 휘저을 때마다 가슴이 오그라들고 기대와 실망이 반복되었다.
시에나는 야채나 조개, 다른 고기는 잘 먹으면서 새우는 정말 손도 대지 않았다.
왜 먹지 않는 거지? 입맛에 맞지 않는 걸까?
생각에 빠져 그가 시에나와 에스타리온 백작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자 시에나가 다시 그를 불렀다.
“오라버니!”
“아, 으응. 그래. 시에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세요?”
“아. 아냐. 아무것도.”
속 시원하게 왜 새우를 안 먹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아침 식사 자리가 소란스러워질 것 같았다.
아버지는 셀레나와 연관 지어 생각해 괜한 질문을 한다며 역성을 낼 게 뻔했다.
무엇보다 시에나가 어떤 대답을 몰라 막연한 두려움이 들었다.
대답에 따라 시에나를 의심하고 내쫓은 셀레나에게 복잡한 감정이 들 수도 있다.
“그보다 오늘이지? 아버지를 따라 황궁에 구경 가는 날 말이야.”
“네! 얼마나 기대되는지 몰라요!”
“전하와 따로 담소 시간도 갖게 됐다니 잘됐네. 황태자 전하를 너무 어려워할 필요 없으니까 당당하게 있다가 와.”
“걱정 마세요!”
“아버지. 전 오늘 몸이 안 좋아서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몸이 많이 안 좋으냐?”
“그냥 가벼운 몸살인 것 같으니 너무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들어가서 푹 쉬어라.”
자리에서 일어난 시온은 마지막으로 시에나의 접시를 확인한 뒤 제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조용히 하인을 불러서 명령했다. 증언을 했던 여자의 주변까지 샅샅이 살펴보도록.
* * *
황궁으로 출발하기 전, 시에나는 소리 없이 제 작은아버지, 그러니까 그녀의 친부가 되는 루카스의 방을 방문했다.
잠든 듯 누워 있는 루카스를 볼 때면 여러 감정이 교차하곤 했다.
그가 제게 줄 수 있었던 것들과 주지 않았던 것들. 그리고 결국 자신이 쟁취해 낸 것들이 떠오르면 늘 그랬듯 루카스에게 속삭이게 되었다.
“당신이 얼른 죽어 버리면 좋겠어요.”
아무도 진실을 알 수 없도록. 그러니 루카스는 살아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다.
방을 빠져나온 시에나는 곧장 마차로 갔다. 에스타리온 백작은 그녀를 몹시 아꼈다.
철석같이 그녀가 제 친딸이라 믿었기에 잃어버린 세월을 보상해 주려고 안간힘을 썼다.
“전하는 너무 걱정하지 마라. 제아무리 황태자라 한들 에스타리온의 여식을 함부로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네. 아버지만 믿을게요.”
시에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제 딸자식도 못 알아보는 주제에 자식이랍시고 안절부절못하는 그 모습이 참 우스워서다.
황궁은 다시 봐도 정말 멋졌다. 이곳이 제집이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자 꿈을 꾸듯 마음이 들떴다.
‘셀레나. 잘 봐. 에스타리온이란 이름은 이렇게 이용하는 거야.’
어떻게든 황태자비가 되어서 가장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갈 거다.
좋은 신분을 가지고도 쓰지 못한 셀레나와 그녀는 달랐다.
‘나도 에스타리온의 딸이야. 이곳에 올 자격 있어.’
단지 신분을 인정받지 못한 것뿐. 그녀에게도 에스타리온의 피가 흘렀다.
시에나는 당당하게 어깨를 편 채 에스타리온 백작을 따라갔다.
“전하께서 저와 셀레나를 비교하실까 봐 두려워요.”
“그런 걱정은 하지 마라. 그 애와 달리 너는 진짜 에스타리온이다. 더군다나 너는 크루커스가 그렇게나 반응한 진짜 중의 진짜 아니냐.”
“그렇네요. 아버지 말씀대로 당당할게요.”
“그래. 넌 아무 염려 마라. 시에나.”
크루커스가 그렇게나 반응한 걸 보면 자신은 선택받은 에스타리온임이 분명하다. 셀레나 따위는 비교도 못 할 진짜 에스타리온.
시에나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는 것과 동시에 백작이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황태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명화 속 지혜로운 현자처럼 우아한 외모에 넋이 나갈 것 같았다.
언제 보아도 지독히 매혹적인 남자였다.
시에나는 탐욕이 들끓는 걸 느끼며 인사를 올렸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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