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시에나는 곧 죽을 사람 같은 얼굴을 했다.
설마 내가 그런 말을 꺼낼까 했을 테다. 그녀의 출신을 드러내면 내가 하녀의 딸인 걸 밝혀야만 하니까.
하지만 이단심문소까지 다녀온 마당에 지금의 나는 무서울 게 없다.
“셀레나. 왜 자꾸 이상한 말을 하는 거야. 마틸다 씨가 보면 오해하겠어.”
시에나의 시선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잃을 게 많은 건 시에나 쪽이지 내가 아니다.
“오해? 오해는 에스타리온 백작께서 한 게 오해겠지. 멀쩡한 사람을 이단으로 몰다니…… 마녀사냥을 하는 건 엄중한 죄인 걸 모를 리도 없을 텐데.”
“그건-.”
때맞춰 시온이 시에나를 찾아왔다. 그가 시에나의 어깨를 감싸며 제 뒤로 숨겼다.
“셀레나. 이만 가라.”
“당신에게 명령할 권리 같은 건 없어요. 하지만…….”
사색이 된 시에나와 이 상황을 목도한 여러 명의 귀족 영애들을 보니 이만하면 되었단 판단이 섰다.
시에나가 얼마 전까지 글도 읽지 못 했다는 게 소문이 나며 많은 의문이 따라올 게 뻔하다.
오늘은 이 정도로 되었다. 아직 내 기억이 온전한 것도 아니고 레이온 제약이 완벽히 자리 잡지도 못 했으니까.
“가엾은 시에나. 내가 네 첫 무도회를 방해했구나.”
“…셀레나…….”
몇 달 전 그녀 때문에 사무치게 괴로웠던 건 나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녀가 나 때문에 악에 받쳐 있다.
시에나에게 다가가려 하자 시온이 험악한 얼굴로 거리를 벌렸다. 그래서 들으란 듯 말했다.
“그러게 왜 나를 자극하니.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셀레나. 경고하건데-.”
“우린 이만 가는 게 좋겠어.”
시온의 말을 끊은 건 에이든이었다.
“황궁 근처 레스토랑에서 식사나 하고 가자. 기대했던 거에 비해 음식이 별로라서.”
“저 혼자 돌아갈게요. 좀 더 있어요.”
“아냐. 만날 사람은 다 만난데다 생각보다 재미가 없어.”
“…좋아요. 그럼 마틸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한 번 봐요.”
가볍게 인사를 한 뒤 무도회장을 빠져나왔다.
시에나를 비롯해 여러 사람의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지만 모른 척했다.
마차로 가는 길, 에이든에게 물었다.
“이렇게 가도 정말 괜찮겠어요?”
오늘 이 자리는 에이든을 위한 자리였다.
그가 귀족 사회에 섞여들고 얼굴을 익히라고 온 거였는데 괜히 내가 망친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온 지 한 시간밖에 안 됐는데 돌아간다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냥 자리가 편치 않아서 그래.”
“네? 누가 뭐라고 하던가요?”
“그런 건 아니고… 내가 있을 자리는 아닌 것 같아.”
“그럼 당신이 있을 곳은 어딘가요?”
“노예살이하던 채석장. 이런 곳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 표정을 확인한 에이든이 눈을 굴렸다.
“그냥 소속이 없어진 것 같아. 완전한 귀족도 아니고 그렇다고 노예도 아닌… 부유하는 배가 됐다는 걸 이곳에 와서 더 확실히 깨달은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긴 노예살이로 에이든이 스스로를 미천하다 여기는 게 싫었다.
그는 정말로 소중한 사람이었다. 세상에 버림받아 혼자가 된 내게 유일하게 손 내밀어 준 이가 에이든이다.
사실 귀족이니 노예니 하는 것들은 상관없다. 그가 스스로를 평가절하하는 게 화가 난다.
“왜 그런 말을 해요?”
성난 음성에 그가 놀라는 게 보였지만 개의치 않고 쏘아붙였다.
“자리가 편치 않을 수도 있죠. 당신이 있을 자리가 필요하면 내가 만들어 줄 테니 채석장이 더 잘 어울리니 하는 바보 같은 소리는 마요.”
“셀레…나?”
“내 옆에 있어요. 내가 당신 소속이 되어 줄 테니까 그런 말은 그만해요!”
꽥 소리를 내지른 나는 씩씩거리며 앞서갔다.
그는 내 뒤에 멍하니 멈춰 서 있다가 후닥닥 뛰어왔다.
“…방금 한 말, 무슨 뜻이야?”
“몰라요.”
얼굴에 열이 올랐다. 가슴이 콩닥콩닥 거리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묵묵히 앞만 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마차가 보였다.
“무슨 뜻이냐니까. 셀레나, 그게 어떤 의미인지 나만 이해 못 한 거야? 아니, 아니. 내가 이해한 그게 맞는 거야?”
휙 몸을 돌리자 어떤 때보다 크게 놀란 에이든이 보였다.
그는 내 눈치를 살피는 동시에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인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
에이든이 내게 무언가 숨기는 게 있음을 안다.
백 프로 확신한다기보다는 어렴풋이 그런 게 있겠거니 하는 정도다.
별것 아닌 거라면 좋겠지만 만에 하나 아주 충격적인 진실일 경우, 이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질문할수록 그에게 선을 그어야 한다는 결론이 났다.
그런데도 거리를 벌리긴커녕 나답지 않게 버럭 화를 내는 건 그만큼 그에게 품은 애정이 깊단 걸 테다.
하지만 내 일만도 벅차서 미래에 벌어질지도 모르는 불안까지 포용하기가 힘들다.
“난 레이온 제약을 아주 크게 성공시킬 생각이에요.”
“알아.”
“그 성공을 통해서 에스타리온 백작에 복수할 거예요.”
“그것도 잘 알아.”
“그래서 당장 당신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에이든은 실망한 얼굴이 아니었다.
속이 쓰려 보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기쁘단 듯 환하게 미소 지었다.
얼굴의 흉터가 선명해져서 험악해 보여야 하는데도 그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소년 같았다.
“그거면 돼. 그냥 당신 옆에만 있게 해 줘.”
“…좋아요.”
쑥스러운 듯 번져가는 붉은빛을 보자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을 했다는 실감이 났다.
앞으로 내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도 딱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믿고 싶었다.
* * *
“어쩌면 좋아요. 제가 해명해도 믿지 않을 거예요. 사람들은 듣고 싶은 것만 들으니까요.”
집에 돌아온 시에나는 곧 죽을 사람처럼 펑펑 울었다.
무도회는 성황리에 끝났지만, 시에나의 데뷔는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었다.
시온에게서 소식을 전해 들은 에스타리온 백작은 셀레나가 저지른 짓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만 울거라. 네가 우니 마음이 찢어지는구나.”
“아버지… 전 두려워요. 모두가 저를 천한 하녀로 볼 거예요. 저를 시골로 보내 주세요. 그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살고 싶어요.”
시에나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자 에스타리온 백작은 숨이 끊어질 듯 괴로워했다.
납치범을 어미로 알고 갖은 고생을 하며 자란 것도 가엾은데, 납치범의 친딸에게 이런 모욕까지 당하다니… 그는 이 사실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기다려라. 그 아이는 조만간 네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사과하게 될 게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에스타리온 백작은 외출 준비를 했다.
‘레이온 제약이라고 했던가…….’
서류를 받으러 온 셀레나와 황궁에서 마주친 뒤 사업을 주시하고 있었다.
거기다 셀레나가 만든 진통제라는 약물은 빠르게 입소문이 퍼져서 수도 전역에 화제였다.
오늘은 신문에도 실릴 정도였고 귀족 사회에도 알음알음 소식이 전해지는 중이었다.
“아버지. 어디 가십니까?”
막 문을 열고 들어온 시온이 나갈 채비를 하는 백작을 보고 물었다.
“신전에 셀레나를 이단으로 고발하러 간다. 그 약에 대해선 너도 들었을 테지?”
“네? 약이요?”
“수도에 퍼지는 진통제라는 약 말이다. 그게 셀레나의 것이다. 몰랐더냐?”
대충 대꾸한 에스타리온 백작은 시온을 지나쳤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시온이 얼른 제 아버지를 쫓았다.
“아버지. 잠시만요. 황실에선 그 약을 보급하는데 앞서서 신전을 견제할 생각입니다. 진통제가 정말로 셀레나가 만든 거라면 섣불리 행동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이 저렇게 당하고 왔는데 손익을 따지고 있단 말이냐. 또다시 이단심문소에 들어가고 싶다니 내 손으로 넣어줄 수밖에.”
시온은 제 아버지를 말리고 싶었다.
그 또한 셀레나가 괘씸했지만 시에나와는 별개의 일이었다.
개인적인 문제를 정치로 가지고 오면 일이 더 복잡해질 게 뻔했다.
하지만 지금 아버지는 말린다고 말려질 것 같지 않았다.
‘어차피 약물이 이단 물품인지 아닌지는 확실히 하고 가야 하니까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낫겠어.’
황실 차원에서 패로 이용하려면 이단 감별을 통과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나저나 수도를 떠들썩하게 만든 레이온 제약이 셀레나의 것이라니.
그는 셀레나가 그날 그토록 건방지게 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오라버니?”
“아. 시에나구나. 좀 괜찮아?”
“흑. 네. 이제 좀 괜찮아요.”
시에나가 퉁퉁 부은 눈을 닦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려고 다가간 시온은 살짝 드러난 점을 보게 되었다.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머리카락 때문에 제대로 보이진 않았다.
‘문신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작게 고개를 내저으며 상념을 지웠지만 칼립소 공작이 한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증언이 끝나고 한참 뒤에 돈이 오갔을 수도 있어.’
셀레나와 어울리는 만큼 질 나쁜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 말도 분명 자신을 뒤흔들기 위함이리라.
시온은 애써 제 안의 의심을 짓밟으며 시에나의 등을 쓸어 주었다.
* * *
“으으윽.”
고통을 이기지 못해 볼 안을 꽉 깨물었다. 왈칵. 비릿한 피 냄새가 퍼졌다.
옆에 앉은 에이든이 내 손을 붙잡아 주었다. 그는 나보다 더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을 했다.
정말로 내가 황태자에게 기억을 지워 달라고 한 거였다면, 대체 어떤 기억이라서 이런 끔찍한 선택을 한 걸까.
비명을 내지르며 얼음 위를 내달려도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테다.
‘내 이름은 이네트야. 하지만 사실 진짜 이름은 따로 있어.’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법 파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도 그 음성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건 바로 나였다. 어린 시절의 내 말투, 내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너는? 너는 이름이 뭐야?’
눈앞에 무언가가 아른거렸다. 하지만 지저분한 유리창으로 가로막은 듯 지독하게 흐릿했다.
깡마른 몸, 검은 머리. 그게 내가 확인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냥 처먹으란 말이야! 왜? 귀한 집에서 귀하게 자라 넌 이런 것도 못 먹는 거냐?’
여인이 신경질을 퍼부었다. 그녀가 내게 들이민 건 새우였다.
미친 듯 떨리는 게 내 몸인지 어린 시절의 나인지 분간가지 않았다.
어린 나는 그녀의 날카로운 음성이 두려웠다.
위협적인 분위기에 숨이 막혔지만 울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야 했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녀로부터. 그리고 신성력으로부터.
“그만. 여기까지만 해요!”
나는 비명을 내지르며 마누엘 사제의 손을 쳐냈다.
신성력이 쑥 빠져나가며 고통이 사라지자 감정이 북받쳤다.
십 년은 넘은 일이건만 당장 어제 일처럼 생생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제대로 본 것도 없는데…….
“괜찮아. 괜찮아… 내가 도와줄게. 다 괜찮을 거야.”
에이든이 나를 품에 안은 채 느릿하게 등을 쓸어 주었다.
그의 존재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에이든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한참을 흐느꼈다.
“에이든. 무서워요. 내 기억이 너무 무서워요.”
황태자의 말이 사실이라는 직감적인 확신이 들었다. 왜냐면…….
“피를 봤어요. 바닥에 흥건하게 난 피를.”
신성력이 끊어지기 직전 비현실적으로 붉고 진득하던 피가 펼쳐졌다.
나는 범죄 현장에 있었다. 그것도 아주 끔찍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