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내가 기억을 지워 달라고 했다니… 믿을 수 없다.
애초에 황태자의 말을 온전히 신뢰해서도 안 된다.
그는 교묘한 남자였다. 단어 하나로 장난을 친 걸 수도 있다.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황태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온전히 기억을 찾고 싶다면 도와줄 수 있어.”
“기억력 마법을 건 마법사가 누군가요?”
“그는 올해 초, 노환으로 죽었다. 하지만 마법을 파훼해 줄 적당한 신관을 알아봐 줄 수는 있지.”
“그런 거라면 이쪽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어요.”
“…복수해. 셀레나.”
영문을 모르는 내게 그가 다시금 강조했다.
“복수하도록 해. 에스타리온 백작가든, 어디든. 그게 무엇이든 도와줄 테니.”
“당신에게 이득이 있나 보군요.”
“내게 이득이 없어도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전약혼녀니까.”
전약혼녀를 운운하는 태도가 가증스러웠다.
나를 정말로 약혼녀로 생각했다면 이단심문소에서 그런 조롱은 못 한다.
황태자가 얼마나 비열하고 잔인한지 깨닫게 되자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 입가에 매달린 비릿한 미소에 황태자는 조금 당황해 보였다.
“전약혼녀요? 우리 사이는 약혼 관계로 묶인 것 이외엔 아무것도 없었어요. 제대로 된 예의도, 그 무엇도요.”
이번엔 그의 눈꺼풀이 경련한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모르겠다.
나를 그렇게 조롱해 놓고 좋은 말이라도 나올 줄 알았던 걸까.
“전하께 한 가지 경고하죠. 다시는 에이든을 두고 그따위로 말하지 마요.”
“…에이든이라고? 꼭 그를 연인처럼 부르는군.”
“안 될 것도 없죠.”
황태자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그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나를 찌를 듯 응시했다.
“내 기억에 대해 어디까지 알아요?”
“모든 것.”
“잘도 모른 척하고 지냈군요.”
“그를 좋아하나?”
“그게 왜 궁금한 건가요? 꼭 질투하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내 물음에 황태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는… 나는…….”
혼란스러워하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다시는. 다시는 에이든을 두고 그렇게 말하지 마요. 그리고 이것도 꼭 알아둬요. 내 복수 대상에 당신도 있단 걸.”
그 말을 끝으로 황태자를 내버려 둔 채 발코니를 빠져나왔다.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건 내 알 바 아니었다.
멀리 구석에서 시온과 에이든이 대화를 나누는 게 보였다.
에이든이 이쪽을 보자 그에게 잠시 자리를 비키겠다고 눈짓을 했다.
나는 잠시 시간이 난 김에 시에나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도 알고 싶었고, 박람회에서의 일을 너무 가볍게 돌려준 듯해 그녀를 조금 골려 줘야겠단 판단이 들어서다.
예상대로 그녀는 귀족 아가씨들 사이에 있었다.
오늘 이 무도회가 내 생애 최고로 짜릿한 파티가 되리라는 확신이 드는 순간이었다.
* * *
“그래서 제게 셀레나에 대한 말을 꺼냈던 겁니까?”
시온은 오늘 이 자리에 아버지가 함께하지 않은 걸 아주 다행이라 여겨졌다.
아버지가 이곳에 있었으면 체면을 차릴 새도 없이 셀레나를 질질 끌고 가 패대기를 쳤을 거다.
시온이 애써 이성을 유지하는 건 그가 백작에 비해 이성적이라서가 아니라 부모가 아닌 형제라서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 주십쇼.”
“셀레나를 이단심문소에 버린 걸로 가족관계는 끝난 것 같은데, 대답할 이유 있나?”
“칼립소 공작. 당신을 위해 말하건데, 저런 여자애와는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저런 여자애?”
에이든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그는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당신은 이런 취급을 당했겠구나. 가족이라 여겼던 사람들이 이렇게 돌변한 걸 보고도 이겨 냈구나.
새삼 그녀의 처지를 깨닫게 되자 가슴이 턱하고 막혀 왔다.
에이든은 손이 떨려오는 걸 꾹 눌러 참았다.
언제고 이 연극이 막을 내리면 자신은 처참하게 버림받게 될 테다.
멍청한 에스타리온의 무지를 고쳐 주지 않았고 시에나의 진실을 알면서도 눈감았으니까.
‘나 같은 놈한테 미래가 어디 있어.’
보잘것없는 인생이었다. 셀레나와 함께해 순간순간이 꿈을 꾼 것처럼 행복한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지금도 그렇다. 한 번도 미래를 꿈꾸는 삶을 살아 본 적이 없어서 찰나의 행복을 택했다.
그래서 침묵했고, 침묵이 너무도 달콤해 후에 어떤 고통이 찾아올지 깊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눈먼 장님이었고 오늘의 행복에 모든 걸 건 부나방이었다.
“교활한데다 거짓말쟁이기까지 합니다. 그 애가 당신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한지는 몰라도 순순히 신뢰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셀레나가 교활했다면 순순히 이단심문소에 끌려가진 않았겠지. 거짓말쟁이라면 거짓말 이후 뒷수습도 완벽히 했을 테고.”
에이든은 시온의 악담을 무시하기 위해 애썼다. 그녀의 억울함을 못 본 척하려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시온의 악의 가득한 얼굴을 보자 차마 셀레나의 슬픔을 못 본 척할 수가 없었다.
모든 걸 다 털어놓지는 못 해도, 지금이라도 조금이나마 힌트를 준다면… 그러면 제 죄를 조금이나마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증언한 여자가 돈이 필요하진 않은지는 확인해 봤나? 어디선가 돈이 오간 증거가 나올 수도 있을 텐데.”
“지금 시에나를 모함하는 겁니까? 그런 거라면 당신은 셀레나에게 속은 겁니다. 우린 그 여자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했어요. 조금의 금전 관계도 없었습니다.”
“그 여자의 주변은? 증언이 끝나고 한참 뒤에 돈이 오갔을 수도 있어.”
“그건…….”
“그 정도 확인도 안 한 채 자식으로 받아들였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귀족가는 뭐가 좀 다를 줄 알았는데.”
“뭐라고요?”
“민간에서는 손톱만 한 점은 아주 조그만 인두로 지져서 없애기도 하지.”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는 있는 겁니까?”
에이든은 시온의 경고에도 제 할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점은 문신을 통해서도 충분히 만들 수 있지. 시온. 당신은 귀족가에서 태어나 편히 자라 모르는 모양이지만.”
“…….”
“저 밑바닥은 너무도 춥고 고통스러워서 그곳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양심이든 무엇이든 다 내버릴 수 있는 법이야. 순진함에 후회하는 날이 오진 않았으면 좋겠네.”
시니컬하게 말을 마무리한 그는 멀리서 시온과 자신을 훔쳐보는 시에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경계 어린 눈빛을 보아하니 어지간히도 불안한 모양이다.
마침 셀레나가 시에나에게 다가가는 게 보였다. 에이든은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리며 말했다.
“용서를 구걸할 그 날, 내 옆엔 당신이 있겠군.”
* * *
내가 파문당한 사실은 알려졌을 테지만 왜 파문당했는지 아는 사람은 아멜리아밖에 없을 거다.
에스타리온 백작가에서는 하녀로 자란 시에나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쉬쉬했을 테고, 아멜리아는 백작가와의 관계를 위해서 입을 다물었을 게 뻔하다.
그러니 다들 시에나와 내 행보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시에나.”
내 부름에 시에나가 떨떠름한 표정을 했다.
낯빛이 묘하게 흑색이었지만 환한 조명 때문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들었다.
“셀레나…….”
나직이 내 이름을 부른 시에나는 표정을 관리했다.
옆에서 함께 대화하던 다른 귀족 영애들이 인사를 건넸다.
“셀레나. 오랜만이에요.”
“마틸다. 잘 지냈어요?”
“얼굴이 많이 좋아졌어요.”
“그런가요? 오히려 안 좋아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표정이 생기 있어진걸요.”
그렇게 말한 마틸다가 은근히 시에나를 확인했다. 마틸다가 내게 물었다.
“어떻게 지냈어요?”
에스타리온 백작가에서 파문당한 뒤 무얼하며 지냈으며 에이든과 함께 온 배경이 궁금한 걸 테다.
물론 그녀가 궁금한 건 그뿐만이 아닐 게 뻔하다.
파문당한 이유, 그 이후 에스타리온과의 관계 등 수 많은 것들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테다.
“바빴어요. 새 이름으로 새 삶을 시작하는 건 상상 이상으로 정신이 없더라고요.”
“어머. 결혼 준비를 하는 건가요?”
“아뇨. 결혼은 아니고… 개인적으로 큰 사업을 준비하고 있거든요.”
“나중에 어떤 건지 자세히 알려 줘요.”
마틸다가 센스 좋게 나와 시에나가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었다.
나는 시에나와 시선을 맞췄다. 얼굴이 좋아 보였다. 역겹도록.
“잘 지냈어?”
늘 시에나에게 말을 높였지만 더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내가 말을 낮추자 시에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노려보았다.
“…네가 여기 올 줄은 몰랐어. 아버지께서 아시면 분노하실 거야.”
“정말 이상한 말이네. 내가 내 발로 어딜 가든 백작님이 상관하실 바는 아니지. 더 이상 그분의 딸도, 그 무엇도 아닌데.”
주변에서 헙하고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무도회에 참석하기 전 대외적으로 어떻게 행동할지 고민했었다.
시에나를 피하는 법도 있고 그녀와 잘 지내는 척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내 감정에 충실하고 싶었고 내가 느낀 감정을 고스란히 돌려주길 바란다.
“셀레나. 어떻게 그런 말을…….”
“내게 못 할 말을 한 건 백작님이시지. 집에서 키운 개도 그렇게 대하진 않을 거야.”
내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할 줄 몰랐던지 시에나가 주변의 눈치를 봤다.
그녀로서는 아직 사교계 입지랄 게 없는 때에 추문에 휩싸이고 싶지 않을 테다.
‘당신이 바라는 대로 흘러가게 두지 않을 거야.’
나를 바닥에 처박고 싶었다면 이단심문소를 나오던 그날 그렇게 지나갈 게 아니었다.
이단심문소에서 매 순간을 버티며, 교묘한 이간질에 괴로워하던 순진하던 마음을 지워나갔다.
“셀레나… 그런데 너 집에서 쫓겨나더니 동거라도 하는 거야?”
시에나의 수야 뻔했다. 교묘하게 내가 남자 문제로 집을 나가 에이든과 동거를 한다고 퍼트리고 싶은 걸 테다.
하지만 그녀의 얕은수에 넘어갈 생각 따윈 없다.
“꼭 내가 그러길 바라는 사람처럼 들리네. 아무리 우리가 사이좋은 자매는 아니라지만 말은 가려서 해야지. 안 그래?”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난 그냥 네가 걱정돼서…….”
걱정이 돼? 그 가증스러운 단어 선택에 헛웃음이 터졌다.
그러자 시에나가 눈썹을 축 떨어트리더니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녀가 내게만 들릴 만큼 아주 작게 속삭였다.
“또 무릎 꿇고 싶은 거니? 적당히 하고 네가 있을 곳으로 꺼져.”
시에나는 내게서 몸을 뗐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겁을 먹었다고 생각했는지 아주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멀지 않은 곳에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던 마틸다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틸다. 그거 알아요?”
“뭐를요?”
“이단심문소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다는 건, 그들이 죄인이라 평생 감옥에 갇히게 되어서가 아니었어요. 너무 힘들어서 죽을 수밖에 없어서였죠.”
“네? 무슨 말을…….”
“내가 에스타리온 백작가에서 파문당한 이유요. 백작님이 저를 이단심문소에 넣었거든요. 무고로 판명이 났지만, 그렇게 괴로운 곳에서 버텼는데 어떻게 부모 자식간의 인연을 이어나가겠어요. 안 그래요?”
마틸다를 비롯해 주변에 있던 이들이 헉하고 숨을 삼켰다.
설마 내가 내 입으로 이단심문소에서의 일을 말할 줄 몰랐던지 시에나도 적잖게 당황한 얼굴이었다.
오늘 무도회가 끝나고 나면 이 소식이 사교계에 빠르게 퍼질 테다.
“백작님은 제가 흑마법을 사용했다고 우기지만 철저한 조사 끝에 사제분들께 이단 행위를 한 적이 없단 확인을 받았죠. 그런데도 사과 한 번 않는 게…….”
나는 시에나를 보며 말을 끝마쳤다.
“얼마 전까지 글도 모르던 시에나에게 좋은 교육이 될 것 같진 않은데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