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저 여자가 왜 여기 있을까. 아니, 왜 저 여자의 옆에 에이든 칼립소가 있는 걸까.
에이든이 셀레나에게 접근한 건 알았지만 함께 무도회까지 참석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아는 셀레나는 파문된 이상 부끄러워서라도 이런 곳에 못 올 사람이었다.
“왜 그러느냐. 필립.”
“아닙니다.”
황태자는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둘이 어떤 사이인지 차차 알아내면 될 터.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지만 황제의 연설이 이어지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신경이 곤두서고 정신이 산란해졌다. 자꾸 둘에게 시선이 갔다.
에이든과 셀레나 사이엔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어도 특유의 기류 때문에 모를 수가 없었다.
그가 두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무도회가 시작되었다.
“셀레나가 파문당한 이유가 에이든 칼립소에게 있나 봐요.”
“노예 출신과 연인이 되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는 거죠.”
음악이 시작되고 춤이 시작되며 자연히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황태자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렸다.
노예 출신과 연인이 되었다? 그럴 리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전하. 오랜만입니다.”
시온이 제 누이를 데리고 인사를 하러 왔다.
“이쪽은 제 누이인 시에나입니다. 시에나. 전하시다. 인사를 올리렴.”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황태자는 시에나가 인사를 올리는 걸 무감한 시선으로 확인했다.
언뜻 보기엔 셀레나와 쌍둥이처럼 닮았지만 자세히 보면 또 달랐다.
분위기도 딴판이었고 목소리도 시에나 쪽이 더 허스키했다.
무엇보다 눈빛이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이쪽은 뱀이로군.’
셀레나와 달리 시에나는 교활함이 돋보이는 여자였다.
돌아가는 상황을 잘 아는 터라 황태자는 시에나를 향한 혐오를 숨기기가 힘들었다.
‘에스타리온 백작 가와 척을 져선 안 된다.’
신전과의 권력 전쟁이 코앞인 지금, 신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에스타리온 백작가의 지지가 아주 중요했다.
그러니 시에나가 가증스러워도 적당히 응대해 줄 필요가 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시온, 그간 어떻게 지냈나? 지난번 부상은 다 회복했고?”
“예. 덕분입니다. 그나저나 레이온 제약에는 접촉했습니까?”
“사무실은 있지만 사장의 행방은 묘연하더군. 일부러 피하는 것 같아.”
“그렇군요. 아무래도 자체적으로 회사를 성장시키길 바라는 모양입니다.”
“그래. 그런 듯해.”
“아. 춤이 시작되는군요.”
시온이 넌지시 운을 띄웠다. 시에나와 함께 춤을 추지 않겠냐는 뜻이었다.
황제의 건강이 많이 안 좋아졌기 때문에 약혼과 결혼 모두 다소 이르게 진행될 예정이었다.
시에나와 황태자는 거리를 좁히며 서로에게 호감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황태자는 건조한 어조로 시에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함께하시겠습니까?”
“아… 좋아요.”
시에나가 발그레하게 얼굴을 붉히며 그의 손에 제 손을 얹었다.
환한 미소가 활기차 보여 셀레나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풍겼다.
셀레나는 지독히 차분하고 유약한 여자였다.
‘그러니 제 자리를 빼앗긴 거겠지.’
시니컬한 감상을 내린 황태자는 시에나와 함께 무도회장 가운데로 갔다.
꿈을 꾸듯 몽롱해진 시에나를 보자 황태자는 점점 불쾌감이 더해지는 걸 느꼈다.
누군가가 그를 이용하려고 하려는 것도, 권력의 목표가 되는 상황도 자주 있는 일이다.
하지만 시에나라는 여자의 욕망을 채우는 데 이용되는 건 조금, 아니, 꽤 많이 불편했다.
그녀가 얼마나 교활하고 사악한지 알기 때문이리라.
“전하께선 취미가 어떻게 되세요?”
“독서나 사냥을 좋아합니다.”
“시온 오라버니도 사냥을 좋아하던데 전하께서도 그러시군요! 책은 어떤 장르를 읽으세요?”
“철학이나 역사를 즐겨 읽습니다만.”
“아… 철학이요. 대단하시네요!”
황태자는 시에나의 것과 같은 시선을 수없이 받아왔다. 그건 열망과 동경이었다.
셀레나도 그러했다. 그녀는 자신을 동경했고 그것을 애정이라 착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시에나와 같은 열망은 보이지 않았었다.
셀레나는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알았고 부나 명예, 권력 같은 것엔 별반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시에나는 달랐다. 애초에 그녀가 에스타리온 백작 가에 나타난 것부터가 욕망이 뒤섞인 것이니.
“전 철학 책은 아직 읽어 본 게 없어요. 괜찮은 서적이 있으면 추천해 주실 수 있을까요?”
“<고대철학논증>이라고, 에스타리온 백작가의 서재에 있을 겁니다. 셀레나가 제게서 빌려가 아직 돌려주지 않은 서적이니까요.”
“아… 셀레나의 일은…….”
시에나가 조심스레 입술을 깨물며 눈치를 보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숱하게 사람을 만나 본 황태자는 그것이 계산적인 행위인 게 훤히 보였다.
황태자가 대꾸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시에나의 뒤로 함께 춤을 추는 에이든과 셀레나가 보였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진 건 한순간이었다.
“…전하?”
황태자는 시에나의 부름에 답할 수가 없었다.
에이든의 손이 셀레나의 등에 닿아 있고, 셀레나가 에이든을 보며 환하게 미소 짓는 걸 보자 속에서부터 분노가 치민 탓이다.
그건 그조차 전혀 예상치 못 한 감정이었다. 감히 이런 감정을 느낄 거라 생각지도 못 했는데…….
‘대체 왜…….’
그는 제 감정이 혼란스러웠다.
셀레나에게 설렘을 느낀 적도 없고 마음을 내어줬다고 생각한 적은 더더욱 없었다.
그녀가 어떻게 지내고 누구와 춤을 추건 신경 쓸 일이 못 된다.
그래. 다 그녀에게 부채감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전하?”
“실례했군요. 철학보다는 우선 다른 책을 읽으며 교양을 쌓는 게 우선이 아닐까 합니다.”
황태자의 조언에 시에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를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 취급을 해서다. 때맞춰 음악이 끝나고 다른 음악이 시작되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그는 시에나에게 딱 최소한의 예의만 지킨 채 자리를 떠났다.
혼자 남은 시에나는 수치심을 감추려고 안간힘을 써야 했다.
하지만 황태자가 막 춤을 끝낸 셀레나에게 가는 걸 확인하자, 가슴 속에서 꾹꾹 눌러 온 열등감이 터지는 걸 느꼈다.
* * *
“셀레나.”
에이든 경. 아니, 에이든이 내 이름을 입에 담는 게 좋았다.
낮고 울림 좋은 목소리가 셀레나라고 부를 때면 가슴 저 밑바닥부터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추는 거 맞는 거지?”
“네. 맞아요.”
무도회라는 낯선 이벤트에 시큰둥한 태도인 것과 달리, 에이든은 춤을 추는 내내 안절부절못했다.
충분히 완벽하게 하고 있는데도 실수하진 않을까 걱정했고, 맞잡은 손은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꼼지락거리길 반복했다.
“긴장 풀어요. 잘하고 있어요.”
“어떻게 긴장을 안 해.”
입으로는 툴툴거렸지만 그는 지금 누구보다 즐거워 보였다.
평소보다 들뜬 목소리가 이를 증명해 주었다.
“무도회가 즐거운 것 같아 보여 다행이에요.”
“무도회 때문에 이런 것 같아 보여?”
“네? 그럼…….”
깨달음과 함께 볼에 열감이 느껴졌다.
그러다 우리 둘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환한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굳이 서로의 마음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상대가 어떤 마음인지는 알고 있다.
춤이 끝나고 음료를 마시러 중앙 홀을 벗어났다.
“셀레나.”
기다렸다는 듯 황태자가 나타났다.
평소 보이던 차분한 분위기는 어디 가고 그는 어딘가 흥분한 상태였다.
“잠시 이야기 좀 하지.”
“아뇨. 셀레나는 저와 다음 곡을 추러 가 봐야 합니다.”
“…셀레나?”
황태자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가 험악하게 에이든을 노려보았다.
에이든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비뚜름하게 웃어 보였다.
황태자가 한숨을 삼키더니 이야기했다.
“당신이 아무 생각 없이 여기 왔으리라 생각되지 않는데 말이야.”
“…좋아요. 에이든. 잠시만 기다려 줘요.”
“그래. 다녀와.”
황태자는 앞장서서 발코니로 갔고, 내가 그를 뒤따르기 전 에이든이 살짝 속삭였다.
“부숴버리고 와.”
진담 섞인 농담에 긴장이 풀리며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 미소를 확인한 에이든은 만족스런 얼굴을 했다.
달칵.
발코니 문이 닫히자 황태자가 나를 뒤돌아봤다.
우리 둘만 남자 숨길 수 없는 적의가 피어올랐다.
“먼저 하실 말씀 하세요.”
“…에이든 칼립소와 함께 있는 이유가 뭐지?”
복수나 조롱조의 말을 꺼낼 줄 알았는데 생각지 못한 주제가 나왔다.
“그게 왜 궁금하신가요.”
“…….”
그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스스로도 답을 몰라 혼란스러운 듯했다.
답지 않게 대답을 망설이는 모습에 그냥 내가 하고픈 말부터 하기로 했다.
“뭘 알고 계신가요?”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예요. 혼자 무얼 그리도 알고 계시냔 말이었어요. 제가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에요.”
내 말에 여태 어딘가 멍하던 황태자의 눈에 빛이 들어왔다.
그는 평소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필립소로 돌아왔다.
“뭘 얼마나 알아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대화하기가 편하겠군. 무엇을 원하지?”
“무엇을 원하냐고요? 하! 전하께선 그 말을 하기 전에 사과부터 하셨어야 해요! 기억력 수정 마법을 모르진 않을 텐데요.”
“하아…….”
그가 피로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반응에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실상 아무것도 기억하는 건 없단 말인가?”
“뭐…라고요?”
“셀레나 에스타리온. 아니, 이젠 그냥 셀레나로군. 협상을 하기 전엔 제대로 된 패를 가지고 왔어야지.”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등 뒤, 문틈으로 음악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과 대조적으로 이곳엔 서늘한 분위기만 맴돌았다.
“복수할 텐가?”
“또 그 말씀이시군요. 전하께 말씀드릴 이유는 없어요.”
“복수를 한답시고 고작 한다는 게 에이든에게 빌붙어 사는 거라니.”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전하께선 그럴 말 할 자격 없으니까.”
언성이 높아지자 황태자는 충격을 받은 듯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놈과 함께하더니 닮아가기라도 한 건가? 그와 어떤 사이인 거지?”
점점 더 이상한 말만 한다. 내가 알던 황태자가 아닌 것 같았다.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표정이나 찡그린 눈매, 성난 분위기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건 내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의 기색은 무시한 채 내 할 말을 하기로 했다.
“제 기억을 왜 지웠는지 변명이라도 해 보세요.”
“그대가 약해서였다.”
“뭐라고요?”
그는 신경질이 차다 못 해 당장 신경이 끊어질 사람처럼 피로해 보였다.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토해 내듯 말했다.
“제 기억을 감당할 만큼 강하지 못 할 만큼 약해 빠져서였지.”
“거짓말하지 마요.”
“거짓을 이야기하려면 좀 더 질 나쁜 일을 꾸며서 거짓말을 했겠지.”
“…내가 그랬을 리 없어요.”
“아니. 그대가 그랬다. 기억을 지워 달라고.”
황태자가 서늘한 말투로 쐐기를 박았다.
“기억으로부터 도망친 건 그대였어. 나는 그대를 도왔을 뿐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