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황실 무도회가 막을 올리는 날이었다.
시에나는 지난 몇 달간 오늘만을 기다렸다.
화려한 샹들리에, 귀한 신분의 사람들, 맛있는 음식, 춤과 음악이 어우러진 홀. 그 모든 게 시에나가 기대하던 것들이었다.
그리고 에스타리온 백작은 그녀에게 실수 없이 잘 처신하라 몇 번이고 주의를 주었다.
이번 무도회를 통해 수도 귀족 사회에 얼굴을 알린 뒤, 차차 단계를 거쳐 황태자와 약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내가 황태자비가 된다니!’
한평생 천하게 자란 몸이었다. 하녀로 일하며 궂은일을 하는 바람에 손톱에 때가 사라질 새가 없었다. 그런 자신이 이 나라에서 가장 귀한 여자가 될 거란다.
‘어머니. 당신 말이 맞았어요.’
어머니가 제 목에 점을 만들겠다며 잉크와 바늘을 가져왔을 땐 그녀를 이해하지 못 했다.
하지만 그게 이렇게 쓰여서 자신을 어엿한 귀족 아가씨로 만들어 줄 줄이야!
목을 타고 흐르는 전율에 손끝이 저릿해질 지경이었다.
“황태자 전하는 어떤 분이세요?”
황궁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시에나는 황태자의 측근인 시온에게 물었다.
에스타리온 백작 가에 온 지 몇 달이 지났지만 아직 황태자의 그림자조차 본 적이 없었다.
“으음.”
“많이 무서운 분이신가요?”
“차갑고 엄격한 분이시지. 하지만 겁먹지 마. 넌 에스타리온이야. 제아무리 전하라 하셔도 너를 함부로 대할 수 없으니 주눅들 필요 없어.”
“걱정 말아요. 전하와 천천히 얼굴을 익히다 보면 곧 좋은 사이가 되어 있을 거예요.”
방긋 웃음을 지은 시에나를 보며 시온은 복잡한 마음에 휩싸였다.
황태자가 얼마나 까다로운 사람인지 말하지 않은 건, 시에나가 황태자가 선호하는 유형이 아니라서다.
사실 시온은 황태자가 선호하는 사람이 있기나 한지 의문이었다.
오랫동안 봐 왔지만 제대로 곁을 주는 법이 없었고 속을 보이는 법은 더더욱 없었다.
“참. 이번 무도회에 칼립소 공작님도 오실까요?”
시에나는 긴장을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느라 안간힘을 썼다.
지난번 에이든의 등장은 그녀에게 아주 큰 충격이었다.
그가 돌아간 뒤 사흘 밤낮을 앓아눕기까지 했다.
“칼립소 공작? 초대장이 갔다고는 들었는데 올지는 모르겠어. 얼마 전에야 문맹에서 벗어났는데 예법은 또 얼마나 알까. 망신당할지도 모르니 안 올 것 같기도 해.”
“그럴까요?”
시온의 말에도 불구하고 불안은 사라지질 않았다.
시온은 시에나의 표정이 어두운 게 자신이 한 말 때문이라 생각해 얼른 그녀에게 사과했다.
“네가 망신당할 거란 뜻은 아니었어. 넌 글도 유창하게 읽고 예법 교육도 완벽하게 받았잖아.”
“아… 괜찮아요. 전 자신 있어요.”
다른 귀족들만큼 상식이 풍부하진 않지만 기본적인 것들은 죽어라 공부했다.
그녀는 약한 몸 때문에 긴 시간 시골에서 요양해 온 비운의 백작 아가씨를 연기할 자신이 있었다.
어느새 마차가 도착했다. 무도회로 환하게 밝혀진 황궁은 상상했던 이상으로 멋들어졌다.
설렘으로 심장이 요동첬다. 시에나는 시온의 에스코트를 받아 무도회장으로 입장했다.
“에스타리온 공자와 영애께서 드십니다!”
잘 차려입은 시종들과 천장의 반짝이는 조명, 제게 향한 시선이 황홀했다.
눈앞에 펼쳐진 호화로운 세계가 앞으로 자신이 몸담을 곳이었다.
“쌍둥이라더니 셀레나와 꼭 닮았어요.”
“대체 셀레나는 왜 파문되었을까요?”
“저 아가씨가 황태자 전하와 약혼하게 되겠죠?”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빳빳이 든 시에나는 우아해 보이기 위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뱃속부터 희열이 착착 차올랐다. 하지만 그러한 감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에이든 칼립소 공작님 드십니다!”
에이든의 등장은 그녀의 들뜬 기분을 진탕에 처박는 것과 같았다.
* * *
일주일간 무도회 준비와 일을 병행하느라 얼마나 바빴는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무도회 당일이 되자 반쯤은 자포자기한 채 드레스를 입게 되었다.
“급하게 맞춘 것치고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정말 잘 어울려요!”
눈이 휘둥그레진 에바가 외쳤다.
액세서리라고 할 만한 것도 없이 밋밋한 차림이었지만, 참석에 의의를 두는 터라 그리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어쩐지 셀레나 씨가 귀족 같은 느낌이 강하긴 했어요. 말투도 행동거지도 늘 완벽했거든요.”
칭찬인지 감상인지 모를 말에 괜히 쑥스러워져서 마지막으로 머리에 빗질을 한 뒤 방을 나왔다.
먼저 준비를 끝낸 에이든 경은 복도에 기대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사 프레드 씨가 에이든 경의 차림을 봐 줬는지 내가 더 확인해 줄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
가슴팍엔 팔짱을, 고개는 구두코를 보던 그가 내 등장에 화들짝 놀랬다.
벌어진 입술이 에이든 경답지 않게 멍해 보였다. 그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 했다.
얼굴이 붉어지더니 그는 열이 오른 얼굴을 가리려고 손으로 입가를 감쌌다.
“괜찮…아요?”
“어, 어… 그게…….”
에이든 경의 얼굴이 점점 더 빨개져갔다. 그가 어울리지 않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화장한 거 처음 봐.”
“이상해요?”
“아니. 되게… 음…….”
그는 무어라 말을 하려고 입을 뻐끔거리다가 숨을 삼켰다. 그리곤 잘 정돈된 머리를 헤집으며 털어놓았다.
“…예뻐. 정말 예쁘다.”
툭 던지듯 내뱉는 그 말엔 서툰 진심이 담겨 있었다.
쑥스러워서 목덜미까지 붉어졌으면서 검은 눈은 내게 못 박혀 있었다.
어쩔 줄 모르는 풋풋한 태도에 내 가슴이 다 간지러웠다.
그에게 다가가서 느릿하게 손을 올렸다.
“잠시만요.”
팔을 올리자 그가 작게 움찔거렸다.
까치발을 들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자 그가 허리를 푹 숙여 높이를 맞춰 주었다.
사르륵사르륵. 결 좋은 검은 머리가 손가락을 스쳤다.
머리카락이 주는 감촉이 간지러워서 내 가슴도 간질간질거렸다.
우리 사이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고작 머리카락인데, 내 호흡이 낯설어지도록 그가 의식되었다.
그건 에이든 경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내 손가락이 귓가를 스치자 그가 숨을 들이켰다.
허리를 숙이느라 서로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어서 다행이었다.
나도 그도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을 가라앉힌 뒤 그에게서 손을 뗐다.
“이제 됐어요.”
머리가 말끔하게 정리되자 에이든 경이 제대로 보였다.
잘 차려입은 에이든 경은 특유의 야성미에 절제된 분위기가 더해져서 야릇한 분위기를 풍겼다.
위험한 눈빛과 호쾌한 목소리가 더해지자 어떤 여자든 시선을 안 주고는 못 배기겠다 싶을 정도였다.
“다 됐으면 가자. 그리고.”
손을 내민 그가 뒷말을 강조했다.
“오늘 이 순간부터는 선생님이라고 안 부를 거야. 수업은 종료됐으니까.”
새까만 눈에 기묘한 열기로 타올랐다.
그 시선이 오롯이 나를 향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그가 얼른 손을 얹으란 뜻으로 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오만해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사실 그는 아주 숫기 없는 남자였다.
그가 속으로 얼마나 전전긍긍 중일지 보이는 듯해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야?”
에이든 경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나는 작게 고개를 흔들며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그러자 그가 내 손을 옭아매듯 감싸 쥐었다.
“가요. 에이든.”
경어가 아닌 평범한 부름에 그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가자. 이제 당신 원수들과 조우할 시간이야.”
* * *
시에나는 멀리 보이는 셀레나와 에이든의 모습에 숨이 막히다 못 해 토악질이 날 것 같았다.
어떻게 둘이… 저 둘이 어째서 함께하고 있는 건지!
“두, 둘이 왜…….”
시에나의 안색이 목이 졸린 사람처럼 창백해졌다. 셀레나를 확인한 시온이 인상을 썼다.
“낯짝 한 번 두꼅군. 감히 여기까지 오다니.”
실상 시에나는 에이든과 셀레나가 함께 있는 부분에 충격을 받았지만, 시온은 셀레나의 등장에 놀란 것이라 착각했다.
“여기 잠시만 있어라.”
시온은 시에나를 내버려 둔 채 둘에게 다가갔다.
시에나에게 그런 짓을 해 놓고 무도회에 찾아오다니… 분명 시에나의 미래에 훼방을 놓으려 온 것이리라.
그는 아는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누던 셀레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너. 네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셀레나를 잡아먹을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보는 눈만 없었으면 셀레나의 손목을 붙잡아 밖으로 질질 끌어냈을 것이다.
“이 손 치워요.”
셀레나가 부채를 접어 그의 손등을 찰싹 쳐냈다. 시온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에스타리온 백작가의 아가씨이던 시절, 셀레나는 순종적이고 조용한 아이였다.
이제야 본색이 나오는군. 시온이 험악한 얼굴로 물었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냐.”
“그걸 일일이 설명해 줄 이유는 없을 텐데요?”
“뭐라고?”
셀레나는 시온의 얼굴이 흥분으로 발갛게 익어가는 걸 보며 피식, 비웃음을 지었다.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온 건가요?”
모종의 이유로 파문당한 셀레나와 그녀의 절친한 오빠였던 시온의 재회에 무도회장 참석자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시온은 눈길을 신경 써서 바로 앞의 사람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경고했다.
“천한 하녀의 딸이 감히 어딜 오는 거냐.”
에이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나서서 시온을 떼어 내려고 했지만 셀레나가 더 빨랐다.
셀레나는 시온은 처음 보는 서늘한 낯으로 응수했다.
“어디 한 번 폭로해 봐요. 에스타리온 백작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뭐?”
“폭로, 못 하잖아요. 딸이 이단에 빠져서 버리는 건 명예로운 일이지만 아이를 바꿔치기 당한 건 치욕스러우니 평생 비밀로 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요?”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줄은 알고 있는 거냐?”
아이가 바뀌었다는 비밀이 밝혀지면 자연히 시에나가 하녀로 자란 것도 알려진다.
그렇게 되면 황실과의 약혼도 성사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시온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자 셀레나가 보란 듯 비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감히 네가…….”
분노보다는 충격이, 충격보다는 경악이 앞섰다.
“그래. 이게 네 본모습이었겠지. 이런 얼굴을 숨기고 살았다니, 그 어미의 그 딸인 게지.”
“당신이야말로 잘도 그런 얼굴을 숨기고 살았네요. 아주 대단해요.”
셀레나의 눈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이런 사람이 제 오라비였다는 게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그때, 황태자와 황제가 입장한다는 시종의 알림이 들렸다.
“운이 좋구나.”
시온은 입술을 비틀며 시에나에게로 돌아갔다.
“잘했어. 다음엔 더 대차게 박아 버려.”
에이든의 말에 셀레나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장난스레 이야기했지만 그 말이 진심이란 것쯤은 셀레나도 잘 알았다.
때맞춰 무도회장의 중앙에 길이 생기며 황족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귀족들은 허리를 살짝 굽혀 예의를 표했고 오랜 시간 칩거하던 황제가 나타났다.
제 아비의 뒤를 따라 무도회장으로 입장한 황태자 필립소가 황제를 따라 걸어왔다.
그러다 에이든의 옆에 셀레나가 있는 걸 확인한 순간,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