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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56화 (57/134)

<56>

“안 됩니다.”

마누엘 사제가 망설임 없이 안 된다고 말하자 나와 에이든 경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관님께서 거절하신 거면 저 또한 못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시도해 보실 수는 있잖아요.”

“하지만 그만큼 위험한 작업이 되겠죠. 무엇보다 사제 개인이 신전의 뜻을 저버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대신관이 거절했으니 그보다 아래 계급의 사제인 자신은 나설 수 없다는 의미였다.

“정식으로 공표한 게 아니라 대신관님의 개인적인 의견이었을 뿐이에요. 다시 한번 생각해 주세요.”

이단심문소 때문에 내게 미안해서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만한데 마누엘 신관은 대쪽 같았다.

그를 설득하기 위해 다른 제안이라도 해 보려는 찰나 노크 소리가 들렸다.

“사제님. 주노인데요, 에릭이 또 발작을 일으켰어요!”

어느 소년의 목소리에 마누엘 사제가 사색이 되어 벌떡 일어났다.

“가 봐야 할 것 같군요. 조심히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마누엘 사제는 우리를 남겨둔 채 헐레벌떡 어디론가 뛰어갔다.

일이 진척되는 듯하면서 제자리를 돌고, 뭔가 달라질 것 같으면서 잘 풀리지 않는 상황 때문에 가슴이 갑갑해져 왔다.

‘이렇게 미적댈 수는 없어.’

이성적으로 해결하고 대화로 설득하려는 것도 여기까지다.

얼른 기억을 찾고 싶었고 이 갑갑함을 해소하고 싶다.

마누엘 사제의 죄책감을 자극하든 협박을 하든,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문제를 해결해야겠다.

그래서 마누엘 사제를 쫓아갔다. 복도의 어느 열린 문틈으로 마누엘 사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제-.”

그를 부르려다가 안에서 들리는 아이의 음성에 말이 막혔다.

“너무 아파요. 마누엘 사제님. 저 너무 아파요.”

여덟아홉 살밖에 안 된 것 같은데 한 문장, 한 문장 고통이 꾹꾹 담겨 있었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라. 신성력을 불어넣어 주마. 그러면…….”

주노라는 소년이 그에게 물었다.

“에릭에게 진통 포션을 쓸 수는 없나요?”

“…….”

마누엘 사제는 쉽게 대답하지 못 했다.

진통 포션은 신전이 황실과 귀족을 휘두르는 무기였다.

그런 걸 보육원 아이에게 쓰면 비싼 값을 치르는 권력가에게서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진통 포션이 마누엘 사제 혼자서 만들 수 있는 약물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진통 포션은 한 사람이 뽑아내기엔 지나치게 많은 신성력을 필요로 했고 만드는 공정도 까다로웠다.

그러니 그는 여태 아이가 고통에 시달리는 걸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을 테다.

“진통제는 이틀 동안 줄을 섰지만 못 샀잖아요. 진통 포션이라도 있으면 에릭이 저렇게 고통받을 필요는 없는데…….”

마누엘 사제의 어깨가 힘없이 처졌다.

아이의 고통을 이용하려는 내가 천하의 파렴치한이 된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마누엘 사제가 뒤돌아 나를 확인했다. 그에게 다시금 말했다.

“진통 포션은 몰라도 진통제는 제가 얼마든지 드릴 수 있어요.”

“수도에서 돌풍을 일으키는 약입니다. 없어서 못 구하는데 셀레나 씨가 어떻게 구한답니까.”

“제가 만든 약이니까요. 레이온 제약이 제 거예요.”

“예? 그, 그게 정말입니까?”

“네. 확인해 보세요.”

믿을 수 없단 얼굴을 한 마누엘 사제에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내 명함을 확인한 그는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아이의 치료비도 지원해 줄 수 있어요.”

에스타리온 백작가를 나올 때까지만 해도 수중에 은화 하나도 제대로 없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진통제는 헤레이스가 수요에 맞춰 공장을 가동하는 게 힘들다고 할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중이었다.

초기 연구비가 빠르게 회수되었고 나나 헤레이스를 비롯해 다른 연구원들에게 돌아가는 금액도 적지 않았다.

“조건은 말하지 않아도 아실 거라 생각해요.”

“전…….”

마누엘 사제는 통증에 신음하는 에릭을 확인했다.

그는 눈을 질끈 감더니 결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좋습니다. 다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면 하는군요.”

“당연하죠. 참. 우선은 아이에겐 이것부터 먹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언제 거래처를 만날지 몰라서 언젠가부터 가방에 여유분의 약을 들고 다니게 되었다.

가방이 무거워져서 어깨가 아프긴 했지만 레이온 제약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감수할 만했다. 기회란 그렇게 값싼 게 아니니까.

“진통제 원액이라 소량만 먹이면 될 거예요.”

마누엘 사제는 내 지시에 따라 조그만 티스푼에 약을 덜어 아이에게 먹였다.

식은땀이 가득한 에릭을 보자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그런 내 속을 읽기라도 한 듯 에이든 경이 다가와 내 어깨를 잡아 주었다.

손을 잡을 만큼 스킨십에 능글맞은 사람이 아니라 어깨를 툭 쓸어 주는 정도지만 충분히 위로가 되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에릭의 얼굴에 고통이 가시기 시작했다.

신음이 줄어들고 식은땀이 멎자 마누엘 사제의 얼굴에 희망이 스며들었다.

“사무실로 가시죠.”

이제 마법 파훼를 시도해 볼 때였다.

* * *

“이단심문소에서 일한다는 건 마법을 접할 일이 많다는 걸 의미합니다. 즉. 누구보다 마법에 예민하다는 뜻이죠.”

내 머리에 손을 얹은 마누엘 사제가 말을 이었다.

“셀레나 씨에게 걸린 마법은 워낙 정교한데다 여러 번에 걸쳐서 쌓여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성력을 한두 번 내리쬔다고 파훼되진 않을 겁니다.”

“각오하고 있어요.”

“그리고 많이 고통스러울 겁니다. 이단심문소에서 겪어 보셨으니 아시겠죠.”

마른침을 삼켰다. 가슴이 콱 조여 와서 엄마를 찾는 아이처럼 더듬더듬 손을 뻗어 에이든 경의 손을 찾았다.

손끝에 그의 온기가 느껴지니 한결 견딜 만했다.

“준비됐어요. 시작해 주세요.”

곧 그가 신성력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척추를 타고 신경이 끊어지는 고통이 찾아들었다.

“으윽.”

내가 내뱉은 신음에 화들짝 놀란 에이든 경이 내 손을 꽉 쥐었다.

옆에서 그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에 주입되는 신성력이 점점 더 많아졌다. 그 밀도도 높아져 고통 때문에 죽을 맛이었다.

이단심문소에서의 내 비명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에이든 경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긴 싫어 입술이 찢어지도록 꽉 깨물었다.

그럼에도 통증은 거세어지기만 해서 눈물이 주룩주룩 터져 나왔다.

‘못 견디겠어.’

다른 곳도 아니고 기억을 두고 마법을 건 황태자가 밉다 못 해 증오스러웠다.

몸이 바르르 떨렸다. 살려 달라고, 여기까지만 해 달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마누엘 사제는 멈추지 않았다. 그만하자 애원하고 싶은 걸 죽어라 참았다.

그러다 더는 못 견디겠다 싶을 무렵, 신성력이 거두어졌다.

“헉. 허억.”

미친 듯이 숨을 토해 냈지만 인지되지 않았다. 온몸이 발작하듯 바들바들 떨렸다.

몸에 힘이 풀리며 옆으로 픽 고꾸라졌다. 그런 나를 에이든 경이 받아 안았다.

“선생님! 셀레나! 셀레나!”

하얗게 질린 에이든 경의 얼굴이 보였다.

다급한 목소리와 놀란 눈빛이 그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설명해 주었다.

그의 얼굴을 보니 괜찮다는 말보다는 안도와 위로에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되질 않아 너무 서러웠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에이든 경이 나를 감싸 안으며 찬찬히 등을 쓸어 주었다.

누군가 내게 괜찮다고 말해 주는 게, 고통에 신음하는 내게 곁을 내어주는 사람이 있단 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한참을 그의 곁에서 오열했다. 감정이 가라앉고 눈물이 마르자 조금씩 제정신이 들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단 생각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자, 잠시만요.”

후닥닥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거울을 보니 눈물 콧물 범벅에 눈은 퉁퉁 부어 흉하기 짝이 없었다.

얼른 찬물에 얼굴을 씻었다. 어서 부기가 가라앉으면 좋겠다. 아니, 꼴사납게 운 걸 에이든 경이 잊어 주면 좋겠다.

“그런데 대체…….”

한 번의 신성력으로는 마법에 영향을 못 끼칠 테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황태자는 왜 기억력 수정 마법을 건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가 왜? 내가 그에 대해 무얼 안다고. 반대로 그는 나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납득되지 않는 상황을 뒤로 한 채 화장실을 나오자 입구엔 에이든 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 안색을 꼼꼼히 살피는 그에게 흐릿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요.”

“선생님의 괜찮다는 말은 그리 신뢰가 안 가. 가자. 마누엘 사제에겐 내가 인사해 뒀어.”

예의를 차리기 위해선 마누엘 사제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게 맞지만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그냥 마차로 갔다.

몸이 물에 젖은 것처럼 무거웠다. 마차 소파에 축 늘어져 있자 에이든 경이 염려스런 시선을 했다.

“참. 윌을 보고 왔어야 했는데.”

“친구들이랑 옆 동네에 염소 구경하러 가서 없대.”

“잘 지내나 봐요. 다행이에요.”

“그런데 선생님. 명함 말이야. 나는 왜 안 줘?”

“네? 명함이요? 제가 에이든 경에게 안 줬던가요?”

그는 배신감에 찬 얼굴로 입을 쩍 벌렸다.

“방금 전까진 명함이 있는 줄도 몰랐어! 나도 갖고 싶으니 한 장 줘.”

“어… 죄송해요.”

얼른 명함을 꺼내 그에게 한 장 쥐여주었다.

특별할 것 없는 명함이라 그리 볼 것도 없는데 에이든 경은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그의 입꼬리에 아주 미세한 미소가 내걸린 것도 같았다.

“레이온 제약이라니 멋지네. 그 고생을 하고 이렇게 빨리 일어난 게 신기해.”

“저 혼자였다면 못 했을 거예요.”

그러고 보면 에이든 경이 정말 많이 도와줬다.

내가 필요했다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정성을 다하진 못 할 테다.

그래서 늘 궁금했다. 이 사람은 내게 무얼 숨기고 있는 걸까.

‘물어보기 무서워.’

그에게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에이든 경에게만큼은…….

“참. 황실에 파트너가 있으면 함께 참석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어.”

“파트너요?”

“무도회에 같이 가 줄 수 있을까?”

“제가…요?”

“그런 자리가 처음이라 선생님이라도 옆에 있으면 한결 나을 것 같아서.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황태자에게 접근할 필요가 있어 보이기도 하고. 싫으면 굳이 안 가도 돼.”

에이든 경의 말대로 한 번쯤은 황태자를 만나 보는 게 좋았다.

기억력 마법을 걸 만큼 실력 있는 마법사는 흔치 않은데다, 정황상 마법사를 이용해 내 기억을 지운 사람은 황태자임이 분명하다.

“제가 동행하는 게 경에게 폐가 되진 않을까 염려돼요. 전 파문된 신분이잖아요.”

“노예 출신이 그런 걸 신경 쓸 것 같아? 그런 건 중요하지도 않고 가치 있지도 않아.”

“그럼 에이든 경에게는 뭐가 중요한가요?”

새까만 눈이 나를 응시했다. 그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지만 무엇을 말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살풋 웃음이 새어나왔다.

“고마워요. 에이든 경.”

내 대답에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무도회장에서는 편하게 에이든이라 불러야 할 거야. 물론 나도 선생님이라 부르지 않을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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