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이단심문소에서 사제의 신성력으로 흑마법 사용 감별을 받은 순간을 똑똑히 기억한다.
당시의 고통은 세포 하나하나에 새겨져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어졌다.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실력을 인정받는 신관을 찾아가는 게 좋을 거예요.”
“반드시 신성력이어야만 하나요? 마법으로는 불가능할까요?”
목소리가 떨려 왔다. 마른침을 삼켰다.
“파훼라는 단어를 썼지만 정확히 말해 신성력은 마법을 녹이는 기능을 해요. 열을 가열하면 기름이 녹 듯이요. 물론 한두 번 노출되는 걸로는 안 됩니다. 지속적으로 꾸준히 신성력에 노출되어야만 하죠.”
“사실 예전에 신성력을 체험한 적이 있어요. 아프고 고통스러웠는데…….”
“신성력이 고통스러웠다고요?”
“그게…….”
이단심문소에 가게 된 걸 말하고 싶진 않았다. 누명을 썼다고 말하는 것도 구질구질했고.
내가 말을 망설이자 브루노 씨가 다른 뜻으로 오해했다.
“이곳에 오기 전 신전에 먼저 들르셨군요. 마법을 감별하기 위해 흘리는 신성력은 통증이 심하다고들 하죠.”
“사제분께선 제게 마법이 걸려 있는 걸 모르는 눈치였어요.”
“신전 측에서 못 알아낸 건 정신 마법이라서 그런 걸 겁니다. 이쪽 분야의 전문가인 저조차 알아내기 힘들었으니까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오늘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해요.”
약속된 대금을 지불한 뒤 브루노 씨의 집을 나왔다.
대문이 닫히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서 몸이 휘청거렸다.
그런 나를 에이든 경이 붙잡아 주었다. 그의 얼굴엔 속상함이 가득했다.
“무리할 필요는 없었잖아. 신전은 준비가 되면 천천히 찾아가도록 하자. 이건 제안이 아니라 통보야. 선생님이 또 무리하면 내가 가만히 안 있을 거야.”
못마땅한 기색으로 나를 붙든 그는 돌아오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착 가라앉은 분위기가 그의 속을 말해 주는 것 같아 신경 쓰였다.
그럼에도 그는 대신 신전을 알아봐 주고 신관의 프로필을 알아 왔다.
그리고 오늘, 나와 함께 신전에 방문하기로 했다.
“정말 괜찮겠어?”
내가 신전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걸 이해하는 터라 그는 내 걱정을 많이 했다.
“잘 모르겠어요. 자신도 없고 많이 무서워요.”
“그럼 다른 날 가자. 그래도 돼.”
“…….”
오늘이 아니어도 된다는 말에 도리어 용기가 솟아났다.
하늘 아래 나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이 생겨서 그런 듯하다.
“고마워요.”
“으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제 가요. 마음의 준비가 됐어요.”
그렇게 어리둥절해하는 에이든 경을 데리고 신전으로 출발했다.
* * *
“기억력 수정 마법에 걸리셨다고요?”
사제는 상당히 얼떨떨한 눈치였다. 이해한다. 살면서 기억력 수정 마법에 걸려 그것을 파훼해 달라고 찾아오는 신자가 몇이나 될까.
“여기, 소견서예요. 1급 정신 마법사 브루노 씨가 작성한 거랍니다.”
소견서를 확인한 사제는 눈을 비빈 뒤 다시 확인하기까지 했다.
“잠시 손목 좀… 아프진 않을 겁니다. 정말로 정신계열 마법에 걸렸다면 그것을 확인해 봐야 하니까요.”
잠시 머뭇거리다가 손목을 내밀었다. 사제는 맥을 짚듯이 손가락을 얹고는 신성력을 흘려보냈다.
정신 마법사의 그것이나 이단심문소에서 느낀 신성력과는 또 다른 감각이었다. 다행히 아주 고통스럽진 않았다.
사제는 한참 동안 신성력으로 내 상태를 확인했다. 시간이 지나자 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져갔다.
“…아!”
탄성을 내지른 그가 손을 거두었다. 머리를 가득 메우던 신성력이 사라지자 기분이 이상했다.
“정말 교묘하게 숨겨진 마법이군요. 이 정도로 예리하게 설계된 마법은 제 선에서는 처리할 수 없습니다.”
“사제님께선 교구에 몇 안 되시는 중급 사제분이시잖아요.”
“잘 훈련된 전문 사제들이나 대사제님 정도는 오셔야 할 듯합니다. 마침 대사제님께서 집무실에 계시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그는 쏜살같이 사라졌고 나와 에이든 경은 음료를 홀짝이며 기다렸다.
“대체 어떤 놈이 그런 마법을 건 걸까?”
“…황태자 같아요.”
“뭐?”
에이든 경의 미간이 잔뜩 보였다. 나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검은 시선이 설명을 요구했다.
“저도 이유는 잘 몰라요. 그와 함께한 자리마다 기억이 지워져서 강력하게 의심되는 것뿐이에요.”
“…….”
가슴팍에 팔짱을 낀 에이든 경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황태자와 전쟁터를 누빈 동료인 만큼 내 대답에 불쾌감을 느꼈을 수도 있겠다.
‘괜한 소리를 한 걸까.’
섣불리 털어놓은 걸 후회할 무렵 사제가 돌아왔다. 작고 땅딸막한 대신관도 동행했다.
“오래 기다리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셀레나 레이온입니다. 만나 뵈어 영광이에요. 대신관님.”
대신관이 내 얼굴을 확인했다. 묘한 시선이었다. 어딘가 집요하고 사람을 떠보는 듯한.
하지만 그는 곧 사람 좋은 얼굴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기억력 수정 마법에 걸리셨다고요. 잠시 확인 가능할까요?”
“아. 네.”
다시 손목을 내밀자 대신관이 내게 손을 얹어 신성력을 흘려보냈다.
“으음…….”
대신관은 중급 사제와 달리 빠르게 확인을 끝냈다. 손을 뗀 그가 쓰읍하고 숨을 삼켰다.
“자매님. 이건 저희가 함부로 건드릴 사안이 아닌 듯합니다.”
“네? 어째서인가요?”
“정신에 걸린 마법을 파훼하는 건 너무 예민한 문제입니다.”
“단순히 신성력만 흘리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러면 좋겠지만, 자칫 잘못했다가 마법이 허물어지는 여파로 다른 기억에 문제가 생기면…….”
말끝을 흐리는 태도에 절박해져서 물었다.
“대신관님께서 안 된다고 하시면 전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 건가요?”
“죄송합니다. 자매님. 저희가 부족한 탓입니다.”
“혹시, 신전에 보수공사를 할 곳은 없나?”
여태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에이든 경이 나섰다. 그의 말은 거액의 기부금을 내겠다는 뜻이었다.
“지난여름에 보수공사를 완료하여 더 이상의 수리는 필요 없을 듯하군요.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지만-.”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자매님.”
대신관은 내 말을 끊고는 단호하게 인사를 건넸다. 이 일에 매달리지 않을 거라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중급 사제는 미안함을 숨기지 못한 채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
대신관의 뜻이 그러한데 그 아래에서 일하는 중급 사제가 우릴 도와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이런 건 예상 못 했는데…….”
다시 정신 마법사를 찾아가 볼까. 아니면 상담 횟수를 더 늘려야 할까. 그도 아니면 다른 마법사를 찾아보는 게 좋을까.
“마법을 건 마법사를 추적하는 건 무리일 거야. 황태자는 일 처리를 허술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다고 기억을 되찾는 걸 포기할 수는 없어요.”
“선생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기억을 찾을 거야. 그렇지?”
“네. 그럴 거예요.”
에이든 경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스쳐 지났다. 그가 왜 그런 표정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신경을 쓸 기력이 없었다.
“마누엘 사제를 찾아가자. 아는 얼굴이니 적어도 이렇게 내쫓아내진 않겠지.”
이단심문소에서 일할 수 있을 만큼 잘 훈련되었고, 대신관의 직접적인 감시 아래에서 해방된 사제가 바로 마누엘 사제였다.
아주 영리한 선택이지만 본능적인 거리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잠시만요. 잠시만… 생각을 좀 더 정리하고요.”
어째서인지 기억을 되찾는 것과 이단심문소에서의 고통을 나란히 두고 저울질하게 되었다.
‘그때처럼 고통스럽진 않을 거야. 그러니 괜찮아.’
머리로는 괜찮을 거란 걸 아는데 감정적으로는 그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냥 겁이 나고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았다.
“숨 쉬어. 숨!”
에이든 경의 목소리가 불안함을 뚫고 전해졌다.
“…아…….”
그제야 에이든 경의 소매를 꼭 붙들고 있는 걸 깨달았다. 언제 붙잡았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원한다면 다른 사제를 알아봐 줄 수도 있어.”
“그… 아니에요. 괘, 괜찮아요. 그가 적임자일 것 같아요.”
“정말 괜찮겠어?”
“…제 옆에 있어 줄 거죠?”
이 사람이 곁에 있으면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겁에 질린 내게 에이든 경이 피식 웃어 보였다.
“당연한 걸 뭘 그렇게 비장하게 물어. 약속할게. 무슨 일이 있어도 선생님 옆에 있을 거야.”
“그럼 됐어요. 마누엘 사제에게 가요.”
무의식의 영역에 자리한 공포는 나 혼자 이겨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내 옆에 있겠노라 약속했다. 그거면 되었다.
이단심문소에서 나를 검사한 사제에게 마법 파훼를 맡기게 되다니… 꽤나 얄궂은 운명이었다.
* * *
대신관은 커튼 사이로 셀레나와 에이든이 마차를 타고 사라지는 걸 확인했다.
“셀레나 에스타리온이라…….”
셀레나는 대신관을 처음 본다고 생각했지만 대신관은 셀레나를 본 적이 있었다.
납치당하고 돌아와 반쯤 넋이 나갔을 때 에스타리온 백작이 대신관에게 셀레나를 보였던 것이다.
어릴 때라 얼굴을 잊었을 법 하지만, 셀레나의 황금빛 눈은 쉽사리 잊을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덕분에 대신관은 한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대체 그 마법은 뭐지?”
기억력 수정 마법이 걸려 있단 말을 못 들었으면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쳤을 만큼 은밀하게 숨겨져 있었다.
대신관은 초조하게 방 이쪽저쪽을 오갔다. 누가, 왜 걸어 두었는지는 몰라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그래서 일부러 마법을 파훼할 수 없다고 거짓말을 해 두었다.
파훼하기 까다로워 그렇지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잘못 건드렸다간 판도라의 상자가 열릴 수도 있다.’
셀레나 에스타리온 납치 사건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성물을 보관 중인 백작가의 여식이자 황태자의 약혼녀가 납치당했다.
그녀의 실종으로 가장 큰 이득을 얻는 건 신전 측이었다.
그간 에스타리온 백작가는 신전과 꽤 긴밀한 사이였고, 그런 가문이 황실과 결합한단 건 필연적으로 신전의 세력 약화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전은 황실과 백작가의 결합을 막기 위한 신전이 몰래 수를 쓴게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었다.
“또 그런 불미스런 사건에 휘말리는 건 안 될 일이야.”
그는 셀레나의 쌍둥이 동생이란 여자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황태자와 약혼해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대신관이 신경 쓰는 건 단 하나였다.
십여 년 전 그 사건이 다시 물 위로 떠오르지 않는 것.
“하지만 상황이 이런데 혼자 무슨 수로 들춰내겠어.”
그는 이 순간이 폭풍이 밀려오기 전 찰나의 고요인 줄도 모르고 태평한 소리를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