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54화 (55/134)

<54>

“셀레나 씨. 오늘은 사무실에 안 나가세요?”

“당분간은 알버트 씨에게 맡기기로 했어요. 베키.”

에이든 경의 무도회가 며칠 안으로 다가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다른 귀족들에겐 많고 많은 무도회 중 하나겠지만 그에게는 귀족 사회에 얼굴을 알리는 일이었다.

거기다가 회사에 출근할 수 없는 이유도 있었다. 며칠 전 온 편지 때문이다.

‘필립소 데 마르티네슨.’

편지의 발신인은 황태자였다.

그것도 내게 보낸 개인적인 편지가 아니라 레이온 제약에 보낸 공식 서신이었다.

‘알버트 씨에게 황태자 측에 진통제와 마취제가 흘러 들어갔다고 전해 듣긴 했지만…….’

제품이 수도 전역에 퍼진 것도 아니고 몇몇 지역에만 소문이 난 정도인데 이렇게 빨리 연락이 올 줄은 몰랐다.

난 레이온 제약이 제법 커진 뒤에나 접촉할 줄 알았다.

‘황실 측에선 레이온 제약을 이용해서 신전을 견제하려고 할 거야.’

진통제 판매를 에스타리온 백작가에 복수하는 데 이용하기로 한 건 그만큼 이 약물에 큰 가치가 있어서다.

오랫동안 신전에 끌려다닌 황실과 귀족들은 내 손을 들어 줄 수밖에 없을 테고 그건 곧 권력이 된다.

약물의 수요가 많은 만큼 부를 거머쥐는 건 당연한 일이다.

명예는 이만한 약물의 개발자로서 당연히 갖게 될 테고, 권력은 그들이 알아서 쥐여줄 테다.

그러면 나는 그 힘을 에스타리온 백작가를 짓밟는 데 사용하면 된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냐.”

레이온 제약이 제대로 자리 잡기도 전에 황실의 입김이 들어가면 황실의 개밖에 안 된다.

무엇보다 필립슨, 그 남자에게 순순히 원하는 걸 쥐여주기 싫었다.

제아무리 정략이었다 한들 약혼녀였던 나를 조롱했던 남자다.

단 한 번도 진심이란 걸 보인 적 없고, 이단심문소에서 내게 보인 태도엔 예의라곤 없었다.

그래서 나 또한 예의를 지키지 않기로 했다. 거절의 편지조차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편지를 쭉쭉 찢어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마침 서재로 들어온 에이든 경이 나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요즘 선생님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는 게 많아.”

“저를요?”

“모험소설에 나오는 마왕 같은 얼굴로 편지를 찢었잖아.”

“제가 그랬나요? 전 그런 적 없는데.”

“와. 이젠 시치미도 떼네.”

에이든 경이 젖은 머리를 툭툭 털며 다가왔다.

그가 맞은편에 자리를 잡자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는 어깨를 움찔거렸고 목덜미가 타올랐다. 모른 척 손을 거두려 하자 그가 말을 꺼냈다.

“선생님은…….”

“네?”

“어떻게 항상 머리가 그래?”

머리가 이상하단 건가? 눈이 휘둥그레지자 그는 제 말이 부족했음을 깨닫고는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부스스한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그리 말한 그가 아주 조심스럽게, 사탕을 먹어 봐도 되냐고 허락을 받는 아이처럼 물었다.

“한 번만 만져 봐도 돼?”

“네. 괜찮아요.”

내 답변에 에이든 경이 느릿하게 손을 들었다.

마디 굵은 긴 손가락이 조심스레 머리카락을 스쳤다. 언뜻 그의 손이 떨리는 것도 같았다.

움직이는 머리카락이 볼을 간지럽혔다.

약간의 곱슬기 섞인 갈색 머리는 아주 흔해서 나는 내 머리카락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뭐가 그리도 신기해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걸까.’

내 머리를 만지는 데 집중한 에이든 경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비장한 얼굴을 하고선, 손바닥도 아닌 손끝으로 톡톡 두들기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싱거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 왜, 왜?”

여간 당황한 게 아닌지 그는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아뇨. 아니에요.”

“방금 웃었잖아. 대체 뭔데 그래… 아냐, 알 것도 같아.”

에이든 경은 민망한 듯 손을 거두려고 했다.

그의 손을 붙잡아 제대로 내 머리를 쓰다듬도록 했다.

커다란 손이 내 손에 이끌려 뻣뻣하게 움직였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래도 괜찮아요.”

“어, 어어… 그, 그렇다니 다행이야.”

토마토처럼 붉어진 뺨을 보자 놀리는 게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뚝뚝 끊어지는 박자로 손을 거둔 그는 방금 전 내 머리를 쓰다듬은 손바닥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아참. 신전에는 언제 갈 거야?”

“아… 이제 곧 출발해야죠.”

신전에 가는 이유는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상담을 마친 뒤 에이든 경과 나는 정신 마법사를 찾아갔다.

정말 어렵게 수소문해서 찾은 그는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문을 열었었다.

“브루노 씨 맞죠?”

“네. 제가 브루노인데 무슨 일이신가요?”

나이가 많아 보였던 정보상과 달리 정신 마법사 브루노 씨는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그가 동그란 안경을 추켜올리며 에이든 경과 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셀레나 레이온이라고 해요.”

“아아! 저번에 편지를 나눴던 그분이군요! 얼른 들어와요!”

내게 마법이 걸려 있는지 정밀 스캔해 주면 10골드를 주기로 했었는데 아무래도 탁월한 제안이었던 것 같다.

그는 다 쓰러져가는 집에 엄청난 양의 책을 놓고 연구 중으로, 누가 봐도 돈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차가 없는데 물이라도 드릴게요.”

그는 이 빠진 컵에 물을 가득 따라 주었고. 에이든 경은 천장 끝까지 쌓여 있는 책을 보곤 혀를 내둘렀다.

“본론부터 말할게요. 어느 시점의 기억이 없는데 그게 마법 때문일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확인하고 싶어요.”

“기억은 외상 후 장애에 의해서도 사라질 수 있어요. 본능적으로 끔찍한 기억을 차단하는 거죠.”

정신 마법사는 사람의 뇌와 기억. 그리고 마법에 관해 아주 긴 설명을 이어나갔다.

“편지로도 설명드렸다시피 마법을 스캔하는 건 어려운 게 아니에요. 물론, 아주 은밀하게 감추어진 마법이라면 찾아내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만요. 중요한 건 다른 마법도 아닌 정신 마법일지도 모른단 거예요.”

“문제가 되는가?”

질문을 한 건 에이든 경이었다. 그가 조심스레 내 손목을 붙잡았다. 붙잡힌 손목에 긴장 상태가 전해졌다.

“보통 기억력 수정 마법은 마법에 걸린 대상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감추어져 있죠.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마법을 찾아내는 데에 있어 고통이 클 거예요.”

“어떤 고통인가요?”

“체력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정신적인 고통도 클 거예요. 정말로 하려거든 각오하는 게 좋을 겁니다.”

“괜찮아요. 전 준비되어 있어요.”

나를 말린 건 에이든 경도 아닌 정신 마법사 브루노 씨였다.

“탐색 마법이 주는 통증을 못 이겨서 기절을 할 수도 있고 사람에 따라 큰 후유증을 남기기도 해요.”

“후유증… 선생님. 꼭 해야 할까? 조금 더 생각해 보는 건 어때?”

“저명한 심리학자나 병원에서 약도 받아 먹어 봤어요. 지금은 심리 상담 중이고요. 마법은 정말 많은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이에요. 브루노 씨. 분명 마법에 걸린 걸 거예요. 꼼꼼하게 확인 부탁드릴게요.”

“심리적 요인에 의해 기억을 부정한 걸 수도 있으니 잘 생각해 봐요. 사실 기억 수정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는 흔치 않아요. 그만한 마법사라면 황궁 마법사거나 아주 높은 귀족일 테니까요.”

정신 마법사는 내가 에스타리온 백작가의 일원이었다는 걸 몰라서 한 말일 테지만 그 말에 나는 확신을 얻었다.

“브루노 씨.”

강경한 말투로 그를 압박하자 정신 마법사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에이든 경의 얼굴이 창백했다.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다고 했어. 다시 생각해 보는 건 어때?”

“설사 후유증이 남더라도 각오한 일인걸요.”

브루노 씨가 마법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에이든 경을 설득했다.

후유증을 안을 수도 있는 건 내 쪽인데 내가 에이든 경을 다독이는 게 조금 이상했다.

하지만 우선은 그를 안심시키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통증을 못 이기는 경우라잖아요. 이겨 낼 수 있어요. 이단… 그곳도 이겨 낸걸요.”

그는 초조한 듯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전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하지만…….”

“준비 다 됐습니다. 셀레나 씨. 지금 시작하면 될 듯한데 괜찮겠어요?”

“아. 네!”

“눈을 감고 편하게 앉아 계세요. 너무 두려워하지 마시고, 천천히 심호흡 하시면서. 들이마시고, 후우. 들이마시고, 후우.”

정신 마법사는 최대한 편안하게 있을 것을 요구했고, 내가 심호흡을 하며 긴장을 풀어나가자 주문을 외웠다.

알아들을 수 없는 고대어가 길게 이어지고 곧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감각이 온몸을 훑었다.

점성이 있는 액체가 혈관을 타고 몸 구석구석을 흐르는 것 같았다.

가슴이 막히는 것 같았는데 막상 숨을 쉬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팔이 저릿한가 싶으면 살갗이 간지럽기도 했고, 머리가 지끈거리는가 하면 머릿속이 멍해졌다.

탐색 마법은 체력을 요구한다기보다는 인내를 필요로 했다.

무척이나 불쾌한데다 신경을 갉작거리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러던 때였다.

툭.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건드려졌다. 귀 안에 머리카락이 들어가 바스락거리는 것처럼 소리인지 감촉인지 모를 무언가가 느껴졌다.

“아…….”

탄성을 내지른 건 정신 마법사 브루노 씨였다.

그가 숨을 헐떡이며 주문을 읊자 점성 강한 그것이 머릿속에 축축하게 차올랐다.

그러다 물병이 깨져서 물이 쏟아지듯이 한순간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허억. 허억. 다 끝났습니다. 셀레나 씨. 이제 눈을 떠도 돼요.”

슬그머니 눈을 뜨자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로 몸을 바들바들 떠는 브루노 씨가 보였다.

“괘, 괜찮습니다. 고위 마법을 오랫동안 사용해서 피로한 것뿐이니…….”

“어떻던가요?”

“셀레나 씨의 말이 맞았어요. 아주 교묘한 마법이었습니다. 거미줄처럼 투명하고 미세해 알아챌래야 알아채기가 힘든 거였죠. 누가 그런 마법을 걸었는지 몰라도 대단한 마법사임이 틀림없어요.”

그는 떨리는 손으로 물을 마신 뒤 설명을 이어나갔다.

“특정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도록 숨겨 놨더군요.”

“혹시 그 마법이 두통을 일으키기도 하나요? 기억을 떠올리려고 할 때마다 두통이 일어나곤 했어요.”

“기억을 떠올리려는 행위를 막기 위해 걸어 둔 마법은 없었어요. 기억력 마법에 걸린 이상 두통이 없을 수가 없겠죠. 있는 기억을 억지로 막아 둔 거니, 마법에 저항하려다 보면 신체적인 문제가 생기곤 해요.”

“파훼해 줄 수도 있나요?”

“아뇨. 저는 못 합니다.”

브루노 씨가 딱 잘라 말했다.

“셀레나 씨에게 걸린 마법은 너무 섬세해서 마법을 건 당사자가 아닌 이상 파훼하기 힘들어요. 섣불리 파훼했다간 백치가 될 수도 있거든요.”

“다른 마법사들도 그럴까요?”

“어떤 마법사에게 가건 같은 말을 할 거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해요.”

“그게 뭔가요?”

“신성력입니다. 마법은 신성력과 상성이 좋지 않죠. 그러니 신전을 찾아가는 게 좋습니다.”

이번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건 나일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내게 있어 신성력이란 공포의 상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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