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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53화 (54/134)

<53>

“아가씨. 아가씨는 달이에요. 별은 방향을 알려 줄 수는 있어도 밤의 태양이 될 수는 없죠.”

“네?”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들어 당황했는데도 점술가는 빠르게 제 할 말을 쏟아 냈다.

“달은 칠흑 같은 어둠이 있기에 그 빛이 고결한 거예요. 대낮에 뜨는 달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니까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요?”

“밤하늘이 당신을 빛나게 해 줄 거예요. 진흙 속에 피는 꽃처럼, 아가씨는 어둠 속에서 비로소 피어나게 될 거예요.”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그녀의 말이 갑작스럽긴 해도 이해 못 할 비유는 아니었다.

“내가 달이라면 나는 낮에 뜬 달이 되고 싶어요. 쓸모없어도 좋으니 태양 아래 살고 싶거든요.”

어둠 따위는 필요 없다. 삶에 부닥치는 고난 같은 건 되도록 맞고 싶지 않다.

귀족이 아니어도 좋고 부유하지 않아도 좋으니, 내 기억을 의심하고 출신에 불안해하지 않기를… 배신당하고 버림받은 기억에 몸부림치며 아파하지 않아도 되기를…….

“잘 찾으면 그 역할을 하길 원하는 사람이 있을 테니 다른 사람을 찾아봐요.”

그렇게 대꾸하고는 에이든 경보다 먼저 쪽문 속으로 들어갔다.

어둠이 나를 삼켰다. 나를 언제 봤다고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겪은 고통이 어둠 속에서 피어나기 위한 과정이라고?

꽃피기 위해 이단심문소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때 따뜻한 온기가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감싸 안았다. 에이든 경이었다.

“화날 만해도 허튼소리에 일일이 분노하진 마. 선생님 속만 쓰려.”

그가 부드럽게 내 등을 쓸어 주었다. 다정한 속삭임에 분노가 잦아들었다.

가족과 친구에게 버림받아 넝마가 된 나를 받아 준 이가 에이든 경이었다.

오직 이 남자뿐이었다. 그만이 나를 바랐고 그만이 나를 필요로 했다.

그가 곁에 자리하는 것만으로 모든 게 다 괜찮아졌다.

그가 있기에 괜찮다는 위로도 있었고 따뜻한 체온도 느껴졌다.

“미안. 내가 괜히 점을 보자고 해서는.”

“아니에요. 에이든 경의 얼빠진 얼굴을 구경하는 것도 꽤 재밌었거든요.”

장난삼아 툭 던진 말이었는데 에이든 경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단순한 호기심이었어. 그래, 호, 호기심!”

“호기심이라기엔 아주 열중하던걸요.”

“그건…….”

그가 변명하는 찰나 문이 나왔다. 노크를 하자 안에서 문이 열리며 빛이 쏟아졌다.

드디어 정보 길드에 들어온 것이다.

“어서 옵쇼. 커피? 아니면 차?”

에이든 경이 내 어깨를 감싸며 나를 제 뒤로 밀었다.

“음료는 됐으니 안내나 해.”

“아아,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우린 정보를 사고파는 사람이지 누굴 위협하거나 나쁜 짓은 하지 않아요.”

그리 말한 남자는 차를 끓이겠다며 한쪽에 놓인 개수대로 갔다.

에이든 경과 나는 자리에 앉았다. 정보 길드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밝고 따뜻한 분위기였다.

향긋한 차를 내어 온 남자가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그래서 우리 손님들은 뭐가 궁금해서 여기까지 왔나요?”

“사람을 찾고 싶어요.”

“아하. 아가씨가 손님이셨군! 무슨 사람? 잃어버린 부모? 도망간 남자친구? 아니면 돈 들고 튄 사기꾼?”

“줄리아 핸슨.”

아주 찰나였지만 옆에 있는 에이든 경의 몸이 굳은 듯했다.

하지만 맞은편의 정보 길드 직원에게 시선을 주고 있어서 확실하지는 않다.

“달리아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 살았다고 해요. 그녀에 관한 모든 정보를 알아 와 줘요.”

“모든 것?”

“그녀의 가족관계, 친구, 과거, 현재 등등. 무엇 하나 빠짐없이 모두요. 그리고 그녀의 친구 중에 엠마라고 있을 거예요. 그녀의 재정 상태와 주변 인물에 관한 정보도 필요해요.”

“오케이. 좋아. 이 경우엔 알아볼 것들이 많다 보니 돈이 많이 들 텐데 괜찮겠어?”

그의 말에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휙 던져 주었다.

주머니 안의 돈을 확인한 남자의 입술이 헉하고 벌어졌다.

정보 길드에서 요구하는 금액보다 훨씬 많은 액수였다.

“그건 선급금이고 가져온 정보의 질에 따라 방금 받은 돈만큼 인센티브를 줄 거예요.”

“이 여자가 누군지 물어도 될까?”

정보 길드 측의 물음에 느릿하게 대꾸했다.

“아무래도 제 모친인 것 같아요.”

에스타리온 백작가에 제 딸을 밀어 넣은 뻐꾸기. 내 엄마로 추정되는 인물. 그게 바로 줄리아 핸슨이었다.

* * *

정보 길드를 들른 뒤엔 상담을 받으러 갔다.

“먼저 가셔도 되는데.”

“아냐. 기다릴게. 고작 한 시간인걸.”

에이든 경은 상담이 끝나기를 기다리겠다고 했다.

“셀레나 씨.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그간 바빠서 시간 내는 게 쉽지 않았어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여전히 두통이 있던가요?”

“음… 네. 두통은 여전해요. 사실 아주 작은 기억 하나를 떠올렸어요. 일기장을 확인하다가 알게 된 기억이죠.”

“일기장이요?”

“네. 제게 몇 가지 기억이 없단 걸 알게 되어서 어린 시절의 일기를 들춰 봤거든요.”

차를 홀짝여 입술을 축인 뒤 글로리아 씨에게 천천히 설명했다.

물론 황태자나 아멜리아의 이름은 뺐다.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좋다는 걸 알지만 나오게 될 이름이 절대 가볍지 않다 보니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

“그렇군요. 기억이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감정이 어땠었나요? 어떤 생각이 들었었죠?”

“많이 놀랐죠. 당연히 아주 많이 당황스러웠고…….”

글로리아 씨는 내가 입을 열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주었다.

“…두려웠어요.”

잠시 숨을 들이켠 뒤 빠르게 말을 이었다.

“기억이 없어서 두렵기도 했지만 제가 정말 두려웠던 건 다른 문제였어요. 아주 오래되고도 막연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직감의 영역이었죠.”

“직감의 영역이란 건 어떤 의미일까요?”

당시의 감정을 떠올리자 두려움이 파도처럼 밀려와 어깨가 떨려 왔다.

눈물이 치밀고 숨이 턱하고 막혔다.

“모르겠어요. 사라진 기억 속에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요. 기억이 없어도 영향을 끼칠 만큼 아주 끔찍한 무언가가요. 그래서 기억을 찾고 싶어요.”

“두려움에 전면으로 맞설 용기가 생긴 거군요.”

“예전의 저라면 외면했을 거예요. 그때의 저는 스스로를 지탱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젠 다르다?”

“네. 예전엔 착한 딸, 좋은 약혼녀가 되고 싶었고 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었죠. 하지만 이젠 달라요.”

“어떻게 다른가요?”

“제가 누구의 딸이고, 어떤 사람이건 상관없어요. 어떤 어려움이든 이겨 낼 자신이 있어요. 가장 끔찍한 순간도 버텨 냈으니까요. 그래서 그 소년을 찾고 싶어요.”

“꿈에 나왔다던 그 소년 말인가요?”

“네.”

눈을 감으면 소년의 목소리가 들린다.

도망가라고 소리치지 않을 때 그 소년은 어떤 목소리를 했을까. 그 아이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되었을까.

“그 애가 피를 흘리던 걸 떠올리면 마음이 너무 아파요. 속상해서 슬픔이 밀려올 정도죠.”

“왜 그런 것 같나요?”

“글쎄요. 소년을 좋아했는지도 모르죠.”

무심결에 대답한 나는 다시 차를 홀짝였다. 따뜻한 음료가 들어가자 떨림이 가라앉았다.

“이따가 정신 마법사를 찾아가 보려고 해요.”

“정신 마법사요?”

“제게 기억이 없는 이유가 마법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일기장에 황태자는 마법사를 동행했다고 했다. 그러니 자연히 의심할 수밖에 없다.

“좋은 결과가 있으면 좋겠어요. 셀레나 씨.”

때맞춰 상담 시간이 끝났다. 상담실을 나오자 앉아서 나를 기다리던 에이든 경이 보였다.

나를 발견한 그가 벌떡 일어났다. 에이든 경에게 다가가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직 들를 곳이 더 남았는데 몹시 피로했다. 속내를 고백하는 건 생각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에이든 경은 왜 이렇게 제게 잘해 주나요?”

오늘만 해도 굳이 시간을 내어서 함께 정보 길드에 가 주고 상담이 끝나길 기다렸다.

“그걸 몰라서 물어?”

“…….”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어떤 대답이든 함부로 말을 내뱉었다간 우리 관계가 깨질 수도 있었다.

애초에 이런 질문은 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래도 한 번은 묻고 싶었다. 아니, 그의 마음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리고 몰라서 묻느냐는 말만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전 이제 정신 마법사를 찾아갈 생각이에요.”

“정신 마법사?”

“네. 아주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도 몰라요.”

에이든 경이 인상을 찡그리며 대꾸했다.

“굳이 가야 하는 거야?”

“네. 가야 해요. 기억을 찾을 생각이거든요.”

내 말에 그는 기쁜지 두려운지 모를 아주 오묘한 표정을 했다.

에이든 경은 입을 달싹이다가 나직하게 숨을 삼켰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자 했는지는 몰라도 이 문제에 진지한 건 알 수 있었다.

“같이 가 줄래요?”

“어?”

“저 혼자서도 갈 수 있어요. 하지만 에이든 경이 함께 가 주면 더 좋을 것 같아서요.”

그의 입술이 바보처럼 벌어졌다. 내 가슴도 쿵쾅쿵쾅 방망이질 쳤다. 이어지는 말을 입술에 담는 것만으로도 속절없이 떨려왔다.

“왜, 왜냐면… 제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에요. 에이든 경은.”

가무잡잡한 얼굴이 붉게 물들어갔다.

사랑 고백도 무엇도 아닌 말인데 내 얼굴엔 열이 잔뜩 올랐고, 그는 크게 놀라 숨을 삼켰다.

곧 그가 환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볼에 난 흉터가 짙어졌지만 환한 웃음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정말로 아름다운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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