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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조우
소년의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 음성만은 분명히 떠오른다.
소년은 내게 도망치라 말했다. 그는 지독한 피를 흘렸고 나는 겁에 질렸다.
붉은 피가, 사람에게서 흐를 수 있는 가장 붉은 것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러나 그보다 더 붉은 것은 소년이 보이는 처절한 음성. 그리고 그의 절박함이었다.
‘도망가!’
소년은 몇 번이고 소리쳤다. 도망가. 얼른 도망가.
무엇으로부터? 우리를 집어삼킬 것들로부터.
두려움이 차곡차곡 차올라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나는 몸을 돌렸다.
그 뒤 숨이 차오르도록 달렸다. 머릿속에 소년의 음성이 메아리쳤다.
그 애가 말한 대로 얼른 도망치자. 그러한 생각이 몸을 지배했다.
그렇게 맨발로 도망치다가 에스타리온 백작가에 구조되어 셀레나 에스타리온이 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건 그게 전부였다.
“…님?”
그 피는 소년의 것이었다. 어디에 얼마나 다친 걸까.
“표님?”
대체 어쩌다가… 나 때문인 건 아니겠지?
“대표님!”
큰소리에 정신을 차리자 알버트 파비안 씨가 나를 살펴보고 있었다.
“아… 죄송해요.”
그날 일기장을 확인하다가 격렬한 두통에 시달린 이후 단편적으로나마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단서가 될 만한 건 아니지만, 그 모습이 꽤 끔찍해서 그런지 기억을 되새기다 넋이 나가곤 했다.
약 한 달 사이 많은 일이 있었다.
나는 약물을 본격적으로 판매하기에 앞서 사무실을 차리고 직원을 고용했다.
알버트 씨는 제품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언제든 영업을 뛸 수 있는 인물이라 아주 적합한 인재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왜 부르셨나요?”
“명함 배달 왔다고요. 여기, 대표님 거랑 제 거예요.”
진통제가 크게 입소문이 타며 홍보물이나 신문 광고 대신 명함이 필요했는데, 아주 시기적절하게 알버트 씨가 만들어 주었다.
“와. 깔끔하게 잘 나왔어요! 디자인도 아주 좋아요.”
“아는 분이 인쇄소에 일해서 싸게 맞췄어요.”
“고마워요. 알버트 씨.”
“아니에요. 그나저나 오늘 일찍 들어가신다지 않았어요?”
“아. 맞아요. 알버트 씨도 일 다 끝났으면 이만 퇴근해요. 주말까지 나올 필요는 없는데…….”
“운송 마차가 주말에 왔는데 사장님 혼자 일하게 둘 수는 없잖아요. 일은 다 끝마쳤으니까 내일 봬요!”
알버트 씨가 신나게 퇴근한 뒤 나도 사무실 문단속을 하고 퇴근했다.
사무실을 나와 근처 번화가에 나오자 분수대 근처에서 에이든 경이 보였다.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다 보니 군중 속에서도 불쑥 솟아나 있어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데다 팔다리가 길어 비율 때문에라도 시선을 끄는 편이었다.
에이든 경은 발로 바닥을 가볍게 차며 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가슴팍에는 팔짱을 꼈고 이따금 제게 꽂히는 사람들의 시선을 덤덤히 무시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나를 기다리며,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황태자를 기다리는 건…….’
그건 꽤 긴장되는 일이었다.
사랑에 빠지면 상대를 만나는 순간마저 즐거워진다던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황태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를 이해하고 싶어서, 그에게 걸맞은 여자로 보이고 싶어서… 수많은 생각으로 인해 꽤 괴로운 시간이었더랬다.
‘에이든 경은 그러지 않으면 좋겠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마침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에이든 경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 반가움이 번져갔다. 차가운 표정이 허물어지고 입엔 환한 미소가 내걸렸고 매섭던 눈매는 고이 접혔다.
심장이 정신없이 방망이질 쳤다. 가슴이 간지러워지고 손끝이 저릿했다.
내가 걸음을 옮길 필요도 없이 그가 한달음에 뛰어왔다.
“마쳤어?”
울림 좋은 음성이 폐부까지 들어차는 것 같았다.
목소리가 떨릴 것 같아서 쉬이 대답할 수가 없었다.
“…오래 기다렸어요?”
“별로. 얼굴이 붉은데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에이든 경이 염려스런 시선으로 나를 빤히 내려다보자 볼에 열이 올랐다.
“괘, 괜찮아요. 그보다 옷은 찾으셨어요?”
“으응. 혹시나 싶어서 입어보고 왔는데 나쁘지 않은 것 같았어. 의상실에서 곧장 저택으로 배송해 주겠대.”
“으음…….”
에이든 경은 평소 아무거나 걸치고 다니는 편이었다.
품이 큰 셔츠를 대충 껴입고 다녔는데, 에바는 종종 에이든 경이 바다에서 돌아온 해적 같다고 했었다.
어떤 옷을 걸치건 멋지게 소화하는 외모가 아니었다면, 그는 엉망진창으로 입고 다닌단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뭐, 좋아요. 집에서 입어 보고 정 안 되면 다시 수선을 맡기면 되니까요.”
장소를 이동하려고 에바가 적어 둔 쪽지를 꺼내 주소를 확인했다.
그러자 에이든 경이 내 손에서 쪽지를 낚아채 길을 앞장섰다.
“선생님은 겁도 없지. 어떻게 정보 길드에 혼자 갈 생각을 해. 거기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 줄 알고.”
“에바도 혼자 오갔는걸요. 잘만 행동하면 괜찮다고 했어요.”
“에바가 말한 ‘잘’이라는 게 위협적인 인상을 주는 걸 말한다면 선생님은 시작 전부터 낙제야.”
“저도 나름 위협적인 사람이에요.”
“진심이야?”
에이든 경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겨울을 밀어내고 멀리서 봄을 실어 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렸다.
그가 조심스레 손을 들어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꽂아 주었다.
조용히 숨을 삼켰다. 귀가 뜨거워질 것 같았다.
귓가를 스치는 손끝 감촉에 몸이 움찔거리려는 걸 꾹 참았다.
에이든 경은 짧은 웃음과 짧은 한숨을 번갈아 내쉬었다. 그리고 답했다.
“선생님은 강단 있어 보이긴 해도 사나워 보이진 않아.”
“그게 중요한 건가요?”
“밑바닥을 사는 놈들의 세상은 야생이야. 먹고 먹히고 바닥이라, 밟히지 않기 위해 내가 밟아야하거든.”
“…….”
“물론 그런 곳에 살면 선생님처럼 순한 사람도 저절로 그런 인상이 될 거야. 근데 난.”
검은 눈엔 약간의 장난기와 선명한 진지함. 그리고 진솔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잠시 숨을 삼킨 그가 고백하듯 말했다.
“선생님이 그런 야생에 물들지 않으면 좋겠어. 그러니 그런 험한 일하곤 거리를 둬.”
“…왜요?”
“왜긴.”
아, 새까만 그의 눈을 관통하는 것은 장난기도, 진지함도 아닌 다정함이었다.
그는 왜냐는 질문에 답변을 마무리하지 않았다. 그저 부드러이 미소 지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을 뿐이다.
* * *
정보 길드의 입구는 점을 보는 곳이었다.
검은 곱슬머리를 늘어트린 이방인 여자가 우리를 맞이했다.
“어머. 이쪽 손님은 황금빛 눈이군요.”
“노란 눈이 드물긴 해도 없잖아 있긴 하죠.”
“아가씨는 노란색이 아니라 황금빛이에요. 아주 순도 높은 황금빛이요. 내 나라에선 그것을 두고 하늘의 기운을 담고 태어났다고 하죠.”
“그런가요.”
사실 점을 믿지 않아 점술가가 하는 말이 점을 보도록 유도하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생일이 어떻게 되세요?”
“…4월 29일이요. 확실하진 않아요.”
그날은 셀레나 에스타리온의 생일이지, 내 생일은 아닐 테니까.
“4월 29일이라… 연도는요?”
“1595년이요.”
“아하. 알겠어요. 그런데 두 분, 무슨 점을 보고 싶어서 오셨나요?”
에바의 말에 의하면 점술가에게 조커를 뽑고 싶다고 대답해야만 정보 길드로 가는 문을 열어 준다고 한다.
조커를 입에 올리려는데 에이든 경이 슬쩍 선수를 쳤다.
“뭘 볼 수 있지?”
“뭐든 다 가능하죠. 1년 이상의 먼 미래까지는 못 보지만, 가까운 미래에 관해서라면 연애나 사업, 공부 다 가능하답니다.”
“으음.”
에이든 경이 은근슬쩍 나를 끌어당겨 옆에 앉혔다. 습관처럼 가슴팍에 팔짱을 낀 그가 툭 내뱉었다.
“연애. 연애가 궁금해.”
눈이 데구루루 굴러갔다. 에이든 경의 것이 아닌 내 눈이.
고개를 휙 돌려 그를 확인하자 에이든 경이 멋쩍게 웃어 보였다.
“내가 사업을 해, 아니면 학자가 되려고 공부를 해. 볼 게 연애밖에 없잖아.”
무어라 반응하고 싶은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점술가가 카드를 섞었다. 촤르륵. 그녀가 보라색 벨벳 테이블보 위에 카드를 늘어놨다.
“자. 다섯 장을 뽑을게요.”
에이든 경은 거침없이 카드를 선택했고 점술가는 어떤 패턴에 따라 뽑은 카드를 배치했다.
카드를 뒤집자 기하학적인 무늬가 드러났다.
어느 나라의 언어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주 이국적으로 보였다.
에이든 경을 확인하자 그는 조금 긴장한 눈치였다. 가볍게 보는 척하면서 아주 진심인 듯했다.
‘이네트인가…….’
그 이름이 명치에 걸린다.
‘이게 뭐라고 나까지 긴장하는 거야.’
내 속도 모르고 점술가가 해석을 시작했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군요.”
에이든 경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테이블 아래에 숨겨 둔 손에 힘이 들어가며 치맛자락을 꼭 붙들었다.
사랑하는 여자라면 잠결에도 이름을 부르며 찾았던 이네트일 게 분명하다.
점술을 보겠다고 한 에이든 경이 원망스러워졌다.
“시련이 있을 겁니다.”
“시련? 무슨 시련?”
“다가올 미래는 본인이 잘 알겠죠. 그대가 뿌린 씨앗이니까요.”
점사에 몰입하는 에이든 경을 보자 속이 뒤틀렸다. 거기다 단박에 창백해진 낯빛이…….
‘진정하자. 진정해.’
조용히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삭였다.
에이든 경은 점술가의 설명에 빠져들어 작게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저 얼빠진 얼굴이 꼴 보기 싫어서 당장 일어나 나가고 싶었다.
‘실망이야. 이런 점술을 좋아했다니.’
절대로 그가 연애운에 닥칠 위협에 겁을 먹어서가 아니다.
“…선택을 내려야 할 겁니다. 결단력을 가지고 마음을 굳게 먹으세요.”
“결단력? 좋아… 결단력…….”
뭘 저리 중얼거리면서 되뇌기까지 하는 거람.
일 년 같은 십 분이 지나고 점술가의 해석도 끝이 났다.
평소의 무뚝뚝한 분위기는 어디 가고 바보 같은 표정을 하자 여간 화가 나는 게 아니다.
“그… 선생님은 안 봐?”
“전 안 봐요.”
나도 모르게 쌀쌀맞은 목소리가 나왔다.
에이든 경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가 조금 떨리는 음성으로 얼른 내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은 똑똑해서 굳이 점을 볼 필요가 없긴 해.”
하하. 덧붙여진 웃음이 아주 어색했다.
여태 허튼 데에 정신이 나가 있다가 갑자기 나를 신경 쓰는 그를 버려둔 채 점술가에게 이야기했다.
“봐야 하는 게 하나 있긴 해요.”
“뭔가요?”
“조커를 뽑고 싶어요.”
“조커라… 조커를 원하는 분인 줄은 몰랐네요.”
그녀가 일어나 뒤에 있던 커튼을 거두었다. 그러자 작은 쪽문이 드러났다.
쪽문을 열자 좁고 어두운 통로가 드러났다.
복채를 치른 에이든 경이 앞장서서 어둠 속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점술가가 나를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