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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타리온 백작가에서 돌아온 에이든은 셀레나가 쓰러진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했다.
그는 직접 화재 현장으로 가서 상황을 파악했다.
부자연스러운 발화 지점을 확인한 에이든은 공작이란 지위를 이용해 전문가들을 불러 현장을 조사하도록 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인위적으로 불을 낸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 뒤엔 빠르게 상황이 정리되었다.
목격자들을 통해 방화범을 찾아내었고 그 배후에 비숍이라는 마약 조직이 있다는 걸 알아냈다.
화재에 휘말렸던 아멜리아의 가문인 로펜 백작가에서 그 사실을 알고 힘을 행사하려 하자 황태자가 직접 나섰다.
마약 조직을 소탕하던 중인지라 책임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스레 에스타리온 백작가에서 시온이 함께 동원되었다.
셀레나가 황태자와 약혼했을 만큼 긴밀한 관계를 유지 중이기 때문에 황태자를 돕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황태자와 시온, 에이든이 나서서 비숍을 급습하게 되었다.
“칼립소 공작. 오늘따라 많이 흥분하신 것 같습니다.”
시온이 에이든을 힐끔 살폈다.
화재에 지인이 휘말렸다더니 그 때문인지 에이든은 평소보다 몇 곱절은 사나워 보였다.
에이든은 대답 대신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러 달려드는 조직원을 베어 냈다.
그때 시온을 향해 다 쓴 주사기가 날아왔다. 황태자가 검으로 주사기를 쳐 냈다.
“시온. 집중하도록.”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그런데 로펜 백작 영애가 그곳 카페에서 만난 사람이 누군지 아는가?”
“사업 파트너라고 들었는데 아닙니까?”
“단순히 사업 파트너는 아닌 것 같아서.”
황태자는 쓰러진 조직원의 품에서 창고 열쇠를 꺼냈다.
“그럼 누구입니까?”
시온의 질문에 황태자의 시선이 에이든에게 닿았다.
에이든은 이미 병사들을 이끌고 저 앞으로 가서 조직을 궤멸시키다시피 하는 중이었다.
황태자는 열쇠를 가지고 창고 쪽으로 갔다.
마약 조직원을 붙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약을 압수해 잘 처리하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했다.
끼릭.
열쇠를 돌리자 어두운 창고 문이 열렸다.
“맙소사! 전하. 이 정도 양이면…….”
“족히 백 킬로는 되겠군. 조금도 빠짐없이 옮겨라.”
“예!”
병사들이 한가득 쌓인 마약을 나르는 동안 에이든은 지하통로를 통해 도망치던 비숍의 대장을 찾아 질질 끌고 왔다.
비숍의 대장은 곤죽이 된 상태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전하께서 현명하게 처리하리라 믿습니다.”
잔뜩 날이 선 에이든의 목소리엔 분노가 가득했다.
피투성이가 되어 너부러진 마약상만 보아도 그가 이번 일로 얼마나 분노했는지 알 수 있었다.
에이든은 비숍을 몰락시켰으니 저 할 일은 다 끝났다며 떠났다.
황태자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린 채 그런 에이든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헉. 헉.”
에이든이 잡아 온 비숍의 대장은 죽을 듯한 고통 속에서도 살기 위해 몸을 꿈틀거렸다.
병사들이 그를 포박하기 위해 다가왔다.
그 순간, 그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품에 숨겨 둔 검을 휘둘렀다.
“악!”
검에 팔이 찢어진 건 시온이었다.
황태자가 비숍의 대장을 내리쳐 기절시켰지만, 이미 부상을 입은 시온은 피를 쏟기 시작했다.
“시온. 괜찮나?”
“괘, 괜찮습니다.”
“출혈이 크네. 곧장 의원에게 가야겠어.”
황태자는 빠르게 주변 의원을 수소문해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갔다.
병원은 근처에서 가장 크고 좋은 곳이었다.
피를 쏟으며 들어온 환자 때문에 의사는 퇴근을 하려다 말고 문을 열어 시온을 확인했다.
“출혈이 멈추는 대로 부위를 소독한 뒤 꿰매어야 합니다.”
“얼른 해 주게. 시온. 조금만 참도록.”
“으윽!”
고통에 신음하는 시온에게 의사가 컵 가득 무언가를 담아 건네주었다.
“드십시오. 진통제입니다.”
“그건 마약 아닌가?”
“마약이 아닙니다.”
“됐으니 치워!”
시온이 신경질적으로 약을 쳐냈다.
의사는 조금 안쓰러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상처 부위에 무언가를 주사했다.
지켜보던 황태자가 의사에게 물었다.
“그게 뭐지?”
“마취제입니다. 상처 부위에 주입하면 통증을 마취시켜 주죠.”
황태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상처의 통증을 경감시키는 약이라고? 그런 건 들어 보지 못했다.
의사가 상처 부위에 지혈제를 바르며 설명해 주었다.
“얼마 전 개발되어 구체적인 효능은 연구 중입니다만, 수술이라든지 이런 상황에 다양하게 쓸 수 있죠. 환자분. 조금만 참으면 괜찮아질 겁니다.”
“자네-.”
“보드 파비안입니다.”
“그래. 파비안. 만에 하나 내게 이상한 걸 주입한 거라면 가만두지 않겠어.”
시온이 기세 좋게 으르렁댔지만 의사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침 출혈이 멈추고 소독이 끝났다. 의사는 상처 부위를 꿰매기 위해 바늘과 실을 가져왔다.
시온이 이상함을 느낀 건 그즈음이었다.
“저, 전하. 뭔가 이상합니다.”
“뭐지?”
“상처 부위 감각이 희한합니다. 감각이 아주 없는 건 아닌데 통증이…….”
시온은 저도 모르게 의사를 확인했다. 그가 씩 웃으며 상처 부위를 꿰매기 시작했다.
“얼마 전 맹장이 터진 환자를 수술할 때도 썼는데 효과가 좋았죠. 덕분에 수술이 수월하게 끝났답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당황한 시온을 두고 황태자가 물었다.
“진통제와 마취제를 줘 보게. 신전에서 나온 마약 조사 키트에 검사해 볼 테니.”
“키트라면 여기 병원에도 있습니다. 왼쪽 두 번째 선반을 보십쇼.”
시온은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제 살에 바늘이 왔다갔다하는 걸 지켜보았다.
바늘이 살을 꿰는 감각이 안 느껴지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아프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 사이 황태자는 선반에서 조사 키트를 찾아 진통제와 마취제를 확인해 보았다.
시간이 지나 시온의 처치가 끝날 무렵 키트에 반응이 떴다.
조사 키트의 색깔이 푸르게 변하는 건 마약 성분이 없다는 의미였다.
“자네의 이름이 뭐라고?”
“보드 파비안입니다.”
“보드 파비안. 보름 뒤 작은아버지께서 어깨 수술을 받으실 예정이다. 직접 와서 수술해 줄 수 있겠는가? 물론, 수술은 황실 의원과 함께 진행하게 될 것이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그만한 능력이 되지 못 합니다.”
“이만한 약물을 다루는데도?”
“이건 제가 만든 게 아닙니다. 원하신다면 마취제와 진통제를 넉넉히 드릴 수 있습니다. 근방의 약방에 팔지만요.”
“약방에… 판다고?”
약방은 서민들이 가는 곳이다. 그런 곳에 이런 약을 비치해 뒀단 건 가격이 무척 저렴하다는 의미였다.
황태자는 답지 않게 얼떨떨한 기색을 보였다.
“그렇다면 효과는 어느 정도 되지?”
“진통 포션도 써 봤지만 더 좋으면 좋았지 못하진 않은 것 같습니다. 아, 다 됐군요. 환자분. 부위가 감염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매일 소독하시고요. 그리고.”
보드 파비안이 진통제 한 병을 꺼내어 시온에게 내밀었다.
“마취 효과는 일시적입니다. 효과가 사라진 뒤 통증이 몰려오면 적당히 희석해서 드시면 될 겁니다.”
저도 모르게 진통제를 건네받은 시온은 마찬가지로 크게 놀란 황태자와 시선을 교환했다.
해당 약물이 앞으로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 감히 예측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 *
“에이든 경. 정말로 괜찮아요.”
에이든 경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착 가라앉은 분위기로 나를 지켜보기만 했다.
화재 현장에 휘말린 것뿐인데 괜스레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아 그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지난 며칠간 그는 정말로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걱정과 초조함 같은 감정이 얼굴에 훤히 드러나기도 했다.
“…꼭… 약물을 팔아야… 젠장. 못 들은 걸로 해 줘.”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 것 같다. 꼭 진통제를 팔아야겠냐는 물음일 테다.
화재가 일어난 뒤 일이 있다며 훌쩍 사라졌던 에이든 경은 엊그제 돌아와 귀띔해 주었다.
이번 일이 진통제 때문에 위협을 느낀 마약상들이 일으킨 사건이었다고.
“잘못한 건 그 개자식들이지 선생님이 아니니까…….”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비숍, 아니, 마약상은 잘 근절했으니 염려 말고.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마약상들은 죽여도 죽여도 어디선가 새로 나타나니까.”
에이든 경이 괴로운 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며칠 사이 수척해진 뺨이 보였다.
“왜 하필 진통제였어? 다른 약도 많잖아.”
“시작은 두통 때문이었어요.”
“두통?”
“자주 두통에 시달리거든요. 그래서 막연히 제대로 된 진통제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것만으로 약을 개발했단 말이야?”
“음… 에스타리온 백작은 전쟁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었어요. 그 후유증으로 종종 통증을 못 참아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게 됐죠.”
“…….”
“그걸 보고 있는 게 괴로웠어요. 내 가족이, 물론 지금은 가족이 아니지만, 아무튼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받는 걸 지켜만 봐야 한다는 건 아주 끔찍한 일이잖아요.”
“맞아, 정말 힘든 일이지.”
“대귀족 가문이라 부유한 백작가도 이러한데 일반 서민들은 얼마나 힘들까 싶어서 무조건 약물을 만들어 내자고 결심했었어요. 그리고 생각보다 연구가 원활하게 이루어졌고요.”
“선생님은…….”
말을 꺼낸 에이든 경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내가 화들짝 놀라 얼굴을 살피자 그가 손을 들어 괜찮다는 시늉을 했다.
“선생님은 정말 순진해. 아니다. 순진한 게 아니라 너무 착해서…….”
평이한 어조에 덤덤한 말투인데 왜 그의 음성이 괴롭게 느껴지는 걸까.
“선생님에게 큰 잘못을 한 사람도 결국 다 용서해 줄 것 같아.”
“아니에요. 저도 미워할 줄 알아요.”
“그래도… 그래도, 나는 용서해 주지 않을래?”
“네?”
농담인가 싶어 그를 살폈는데 아무리 봐도 진담이었다.
붉어진 눈시울을 확인하자 무척이나 혼란스러워졌다.
화재 사건으로 많이 놀란 건 알겠는데 갑자기 용서해 달라는 건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에이든 경, 제게 잘못한 게 있어요?”
“글쎄. 뭐, 있을 수도 있잖아.”
속이 복잡해진 내게 그가 애원하다시피 부탁했다.
“만약에 선생님을 상처 주는 일이 생기면, 그래도 나만은 용서해 주면 안 될까?”
마디가 툭 불거진 커다란 손이 이불 위에 놓인 내 손 근처를 배회하며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그가 많이 초조해한다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에이든 경의 손을 붙잡았다. 그가 몸을 흠칫거렸다.
“한 번은 용서해 드릴게요. 제 처음이자 마지막 제자니까요.”
“고마워.”
그제야 에이든 경이 억지 미소나마 지었다.
곧 그가 한결 풀어진 분위기로 애써 농담을 던졌다.
“선생님. 이렇게 물러서 어째. 사기는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야.”
“저 그런 쪽으로는 예리하니 염려 안 하셔도 돼요.”
“그렇게 말하니 더 걱정돼. 참. 아침에 물건이 하나 왔어. 이건 편지고.”
에이든 경이 건네준 편지를 확인했다. 아멜리아에게서 온 거였다.
[에스타리온 백작가에 가서 힘들게 찾아왔어. 거래 내용 잊지 말고 지켜.
그리고 그날 화재 현장에서 도와줘서 고마웠어.]
휘갈겨 쓴 짧은 편지였지만 이걸로 충분했다. 이제 내 기억을 확인해 볼 차례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