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칼립소 공작은 시에나조차 익히 들어 봤을 만큼 소문 자자한 이였다.
귀족 사회에서 그를 어떻게 생각하든 일반인에게 그는 영웅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서민들의 생활부터 파괴되기 때문이다.
“칼립소 공작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시에나는 기대에 차서 시온에게 물었다.
시온은 곧장 대답하는 대신 잠시 그를 떠올려 보았다.
서늘한 인상과 다부진 몸매, 차가운 눈빛. 그리고 하늘 아래 무서울 것 하나 없어 보이는 태도까지. 도저히 노예로 살아온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출신을 두고 손가락질하지만 능력만으로 그만큼 올라간 거니 무시할 수 없는 사람임은 분명해. 황태자 전하와 생사를 함께 넘나든 사람인 만큼 입지가 있는 사람이니 실수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게 좋을 거야.”
“제가 실수를 저지르는 일은 없을 거예요. 염려 마세요.”
시에나는 전쟁 영웅을 만나게 된다는 기대감에 차림을 확인했다.
그녀는 처음 에스타리온 백작가에 들어올 때와 완전히 다른 모습을 했다.
말끔히 정돈된 손톱과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 매끄러운 피부를 했다.
옷도 최고급 실크로 만들어진 드레스였고 그간 예법도 많이 익혀서 행동거지도 제법 우아해졌다.
“참. 생일 축하드려요.”
시에나가 뒤늦게 시온에게 선물을 전달했다.
그녀의 선물은 직접 자수를 새겨 만든 손수건이었다.
실력이 좋아서 꼭 유명 공방에서 사 온 것마냥 아름다웠다.
“제가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이런 것밖에 못 드려 죄송해요.”
“아냐. 충분히 예쁘고 기분 좋은걸. 고마워. 잘 쓸게.”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마침 밖에서 손님이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온은 손님을 맞으러 갔고 시에나는 파티장을 다시금 점검하러 자리를 옮겼다.
에이든 칼립소. 신성 제국의 백성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인물이다.
배운 것 없이 타고난 영리함만으로 뛰어난 전략을 짜내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녀였던 그녀 또한 그 이름을 들으며 전쟁 영웅이 어떤 사람일지 상상했었다.
“시온. 초대해 줘서 고마워. 이건 생일 선물이야.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물건을 찾느라 혼났지 뭐야.”
시온이 친구들과 장난을 치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과 인사하며 얼굴을 익히는 때에 집사의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칼립소 공작님이시군요.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소리에 시온의 친구들도 놀라서 시선을 교환했다.
“나도 칼립소 공작이 정말로 올 줄은 몰랐어. 뭐, 그와 알아둔다면 좋은 것 아니겠어?”
그리 말한 시온은 칼립소 공작을 맞으러 갔다.
시에나는 기대 어린 시선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곧 열린 문 사이로 시온과 칼립소 공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헙.”
시에나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방망이질 쳤다.
칼립소 공작, 아니, 에이든은 먼저 온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시에나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손끝이 잘게 떨렸다.
그러다 자신이 에이든과 인사할 차례가 되자 그녀는 곧 죽을 사람처럼 마른침을 삼켰다.
‘맙소사. 그 에이든이었어?’
에이든의 시선이 시에나를 향했다. 그 눈길이 닿는 순간, 시에나는 겁이 나 죽을 것 같았다.
왜 몰랐을까. 노예 출신에 에이든이란 이름만으로도 한 번쯤 의심할 법도 했다.
에이든은 어린 시절 그대로였다. 가무잡잡한 피부나 숯처럼 검은 머리, 속을 알 수 없이 어둠이 내려앉는 눈까지…….
‘날 알아본 걸까? 십 년도 더 지났으니 알아볼 리 없을 거야.’
시에나는 눈치껏 그를 살피다가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리길 반복했다.
“시에나?”
“아, 네? 네.”
“왜 그러니. 안색이 안 좋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쪽은 칼립소 공작님이셔. 칼립소 공작. 이쪽은 제 누이동생입니다.”
“만나 뵈어 영광이에요. 칼립소 공작님. 저, 저는…….”
시에나라는 이름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에이든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떠올릴지 모른다는 불안이 치밀었다.
“시, 시, 시에나예요.”
결국 꼴사납게 말을 더듬어 버렸다. 부끄러움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새까만 눈이 그녀를 뚫어지게 살폈다.
심장이 박동하는 매초마다 끔찍한 미래가 상상되었다가 지워지길 반복했다.
이 순간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셀레나에게 그랬듯 술수를 꾸며 덮어씌울 수도 없었다.
그저 그가 자신을 못 알아보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에이든의 입술이 느릿하게 떨어졌다.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에이든 칼립소입니다.”
못 알아본 걸까? 그런 듯한데… 그래도 혹시라도 알아보면 어쩌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얼른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판단이 섰다.
하지만 에이든이 더 빨랐다.
“어딘가 낯이 익으시군요.”
“예, 예?”
시에나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숨이 턱턱 막혀서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그녀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 짜내 간신히 대꾸했다.
“그럴… 그럴 리가요.”
“…….”
에이든은 대꾸 대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에스타리온 백작가 내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시에나가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고 있단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시에나를 알아보는 척했다가 그녀가 제게 허튼소리라도 한다면 셀레나와의 관계까지 일그러질 수도 있다.
“죄송합니다. 아는 분과 착각한 듯하군요.”
“아… 하하… 그럴 수 있죠. 오라버니, 전 속이 안 좋아서 잠시 올라가 볼게요. 다시 한번 생일 축하드려요. 그럼 다들 즐거이 놀고 가세요.”
시에나는 허둥지둥 방으로 돌아왔다.
탁.
문이 닫히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식은땀을 어찌나 흘렸던지 손바닥이며 등이 축축했다.
딱딱.
그녀는 초조함에 손톱을 물어뜯었다.
어떻게 그 에이든이 전쟁 영웅이 되었단 걸까.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못 알아봤을 거야.’
설사 알아봐서 모든 걸 폭로하더라도…….
“잡아떼면 돼. 제까짓 게 어쩔 거야. 천한 노예 놈 말을 누가 믿어 줘.”
무조건 시치미를 떼야 한다.
하지만 만에 하나 모든 게 들통날 경우를 대비해 조치를 취해 두는 게 좋다.
‘이번 무도회 때 무조건 황태자를 사로잡아야 해.’
그래서 얼른 약혼이라도 치르면 에스타리온 백작이라 해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어질 거다.
황가와의 약혼을 두 번이나 취소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게 시에나는 계산을 정리한 뒤 마음을 진정시켜나갔다.
에이든이 모든 걸 알고 있는 줄도 모른 채.
* * *
아멜리아와 마주친 건 향수 공방에서였다.
볼일을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가던 길,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잠깐 들렀는데 아멜리아가 있었다.
나를 발견한 그녀는 흠칫 놀라 굳더니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야기 좀 해.”
“우리 거래는 끝난 거 아니었어?”
어딘가 모르게 어수선해진 공방을 둘러보며 대꾸했다.
공방을 빼앗길까 두려웠던 건지 그녀가 초조한 얼굴로 대꾸했다.
“넌 이 사안이 얼마나 큰 문제인 줄 모르는 거야?”
주변 손님들의 눈치를 보던 아멜리아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순순히 그녀에게 이끌려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정말로 소송까지 갈 생각이야?”
“그 공방은 내가 만들어서 내가 운영해 온 내 것이었어. 사실을 증명할 서류가 있는 만큼 소송으로 가도 네가 질 게 뻔해.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
“차라리 나한테 공방을 팔아. 내가 살게. 얼마가 됐건 줄 수 있어.”
“내가 바라는 건 단 하나야. 네가 일기장을 찾아오는 것. 에스타리온 백작가와의 관계라든지 시에나와의 친분을 생각하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닐 텐데, 이렇게까지 꺼리는 이유를 모르겠네.”
“근본부터가 미천한 너와 달리 난 뼛속까지 귀족이라서.”
아멜리아의 모욕에도 태연하게 음료를 마실 수 있었다.
출생을 꼬투리 잡는 건 지긋지긋했다. 어떻게든 모멸감을 주려는 태도는 끔찍했고.
에이든 경은 이런 상황을 수백 수천 번은 견뎠겠지.
“그래. 그럼 귀하신 몸 이끌고 재판까지 오도록 해. 그것도 재밌겠네.”
아멜리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가 비틀린 입술로 말을 꺼내려던 찰나였다.
“불이야!”
끔찍한 비명 소리가 울리자 놀란 카페 손님들이 입구를 향해 마구잡이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저녁이면 주류를 판매하는 카페인지라 불은 카운터에서부터 빠르게 번져나갔다.
“아멜리아! 손수건 꺼내!”
음료로 손수건을 적셔서 코를 막았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벌떡 일어나 입구를 향해 뛰었다.
“아멜리아!”
입구엔 사람이 몰려서 나가기 힘들어 보였다.
무엇보다 천장을 타고 옮겨붙는 불이 입구 쪽에 진열된 술병을 향하고 있었다.
“꺅!”
마지막 손님이던 아멜리아가 나가기 전 술병이 터지며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그와 함께 천장의 나무판자가 떨어지며 아멜리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입구로 가는 길은 방금 전 폭발로 불이 거세져 막혀 버렸다.
‘뒷문이 있을 거야.’
재빨리 주변을 살피자 카운터 뒤로 뒷문이 보였다.
그쪽으로 가는 통로 벽에 불이 붙었지만 조심한다면 뒷문을 통해 통과 가능할 듯했다.
얼른 허둥대는 아멜리아에게 달려가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입구로는 못 나가! 이쪽이야!”
“콜록! 콜록! 얼른 나가자! 콜록! 켁!”
아멜리아의 기침이 심상찮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손수건을 쥐여주었다.
손수건을 건네받은 아멜리아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코와 입을 막아!”
그녀에게 손수건을 던져 준 뒤 나는 임시방편으로 소매로 코를 막았다. 점점 불길이 거세어졌다.
통로 벽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 때문에 살이 익을 것 같았다.
너울거리는 불길이 나를 집어삼키려 춤추는 사신 같았다.
와중에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쿵! 카페 조명이 떨어지며 커다란 소리가 났다.
아멜리아의 손을 잡은 채 죽어라 통로를 뛰었다.
불이 붙은 카운터와 문 사이에 불이 붙지 않은 공간은 아주 조그마했다.
“아, 안 돼!”
문이 잠겨 있었다. 아멜리아가 무작정 문을 열려고 손을 갖다 대려 하기에 빠르게 손을 쳐냈다.
손잡이가 쇠로 되어서 자칫 잘못했다간 화상을 입을 수도 있어서다.
무작정 문을 발로 찼다. 손잡이를 제외하고는 나무로 된 문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윽!”
그사이 거세어진 화마에 머리카락 끝이 타들어갔다.
얼른 머리끝에 옮겨붙은 불을 끄고는 온 힘을 다해 문에 부딪쳤다. 아멜리아가 옆에서 함께 발길질을 했다.
그러자 문이 경첩 채로 뜯어져 밖으로 쓰러졌다.
밖으로 뛰쳐나오는 것과 동시에 천장이 무너지며 우리가 있던 자리를 뒤덮었다.
“하아. 하아.”
신선한 공기가 폐부로 밀려들었다. 살았다는 안도감이 전신을 강타했다. 그제야 내가 미친 듯이 떨고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아멜리아. 콜록. 콜록. 괜찮아?”
“난 괜찮아. 넌?”
“난…….”
괜찮아.
그 말을 하려는데 눈앞이 흐려지더니 의식이 멀어졌다.
‘연기를 너무 많이 마셨나 봐.’
사람을 부르는 아멜리아의 비명 소리가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