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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48화 (49/134)

<48>

일주일이 지나자 약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통제 공급량을 늘려 줬으면 좋겠다는 편지가 왔다.

거기다 인근 동네의 다른 약방에서도 진통제를 공급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셀레나 씨. 안 피곤하세요?”

막 복도를 다 치우고 들어온 에바가 손을 녹이다 말고 물었다.

“공작님 수업에 따로 사업도 진행하시잖아요.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고 일이 만만찮은 것 같던데.”

“괜찮아요.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걸요.”

“그래도 몸 아껴가며 하세요. 일손이 필요하시면 절 불러도 돼요.”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에바가 걱정할 만큼 일이 많아진 건 사실이다.

생산 공장에서 이곳까지의 운송 및 유통까지 모든 걸 나 홀로 해결하다 보니 밤낮 할 것 없이 일하는 중이었다.

‘제대로 된 사무실을 차려야 해.’

지금은 수도로 운송된 약물을 보관할 창고만 임대 중이지만, 이젠 사업자 등록을 해서 사람도 고용하고 제대로 된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조만간 시간을 내어서 사무실을 알아보고 고용공고를 내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프레드 씨가 편지 한 장을 전해 주었다.

“알버트 파비안?”

처음 듣는 이름이라 사업 제의라도 들어온 건 아닐까 하는 기대가 들었다.

봉투를 뜯어 내용을 확인했다.

“아…….”

그는 지난번 박람회 때 뼈가 부러져 진통제를 먹고 실려 갔던 남자였다.

[…덕분에 큰 고통 없이 의사를 찾아가 진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날 보여 주신 친절에 깊은 감사를 전하고 싶은데 직접 만나 뵈어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만약 기회가 된다면 레이온 씨의 약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러니 부디 셀레나 레이온 씨에게 맛있는 식사나마 대접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편지였다. 종이를 가져와 얼른 답장을 썼다.

그렇게 알버트 파비안과의 약속일이 잡혔다.

* * *

수도의 마약 조직인 비숍은 근래 들어 고민이 컸다.

시찰을 나왔던 황태자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마약 조직을 대대적으로 소탕하기 시작해서다.

“붙잡히는 족족 사형이니 최대한 몸을 사려야 해.”

마약상에 한해서는 언제나 자비가 없었지만 근래엔 유독 심했다.

마약 공급자는 물론이거니와 예전이라면 징역형을 받았을 운반업자들까지 조금의 망설임 없이 사형처분을 내려서다.

그러다 보니 비숍은 점점 더 지하조직화되어 은밀히 활동하게 되었다.

“제아무리 황태자가 우릴 잡으려 혈안이 되었다 쳐도 매출이 이상하군.”

비숍의 대장이 인상을 찡그린 채 서류를 내려놓았다.

“유독 3구역만 매출이 크게 떨어졌단 말이지.”

한 번 마약에 손을 댄 이들은 계속 약을 찾게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없어서 못 사는 게 약이다.

황태자가 에스타리온 백작가와 손을 잡고 그들을 소탕하기 위해 힘을 써도 완벽히 뿌리 뽑지 못한 이유도 약물의 중독성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중독성은 보통 질병이나 상해로 인한 통증을 경감시키기 위해 약에 손을 댔다가 시작되기 마련이다.

“그게… 그 방면에 이상한 약을 파는 녀석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상한 약?”

부하가 설명했다.

“진통제 말입니다.”

“진통제라고? 그건 마약 성분이 들어간 엉터리 약물이 아닌가.”

“중독성도, 마약 성분도 없는 진짜 약이라고 합니다.”

“진통 포션이 아니라 진짜 진통제라고?”

“예. 그 때문에 3구역에 새롭게 약에 빠지는 사람이 크게 줄어서 매출도 함께 떨어졌습니다.”

“진통제가 유통된 게 언제부터지?”

“한 달쯤 되었다고 합니다.”

“한 달?”

팽팽한 긴장이 내려앉았다.

매출이 떨어진 건 황태자의 소탕 작전이 끝날 때까지 버티면 될 일이다.

하지만 마약의 유입역할을 방해하는 약물의 등장은 치명적인 문제였다.

고작 한 달만에 한 구역의 매출을 떨어트릴 정도인데, 시간이 지나 다른 구역까지 진통제가 판매되면 비숍의 운명이야 뻔했다.

“일찌감치 정리해야겠군.”

“어떻게 말입니까?”

“그 판매자 놈을 찾아서 제거해야지.”

비숍의 대장은 다른 서류를 확인했다.

거기에는 부하들이 미리 찾아온 진통제에 관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셀레나 레이온?”

“약방에 약을 유통하는 사람 이름입니다. 그 이름으로 선박의 스페이스가 있었던 게 확인되었는데 아무래도 차명인 듯합니다.”

“왜지?”

“선박에 실은 물품이 웬 향수 공방의 재료였습니다. 그 공방은 아멜리아 로펜이라는 웬 귀족가 여자의 소유였고요. 아무래도 그녀가 진짜 주인인 듯합니다.”

“귀족이라… 대놓고 제거했다가는 황실에서부터 사람이 내려오겠군.”

밑바닥 인생을 사는 것들이 로펜가가 어떤 귀족 가문인지까지 어떻게 알겠냐마는, 함부로 귀족을 건드려선 안 되는 건 잘 안다.

한참 고민하던 그가 입을 뗐다.

“제아무리 귀족이라 해도 집에만 있진 않을 거다. 외부로 나와 있을 때 건물 전체에 불을 질러서 제거해 버려.”

“하지만 화재가 나면 일이 커질 수도 있는데…….”

“적어도 누굴 죽이려 했는지는 드러나지 않겠지. 잘만 처리하면 증거도 남지 않을 테니 오히려 이편이 위험부담이 없을 거다.”

“예. 알겠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셀레나 레이온을 제거하면 다시 매출이 오를 거라고만 생각했지, 이 결정이 비숍의 몰락을 부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 * *

“알버트 파비안 씨?”

“아. 셀레나 레이온 씨군요! 이렇게 나와 주셔서 감사해요!”

벌떡 일어난 그가 반갑게 나를 맞아 주었다.

알버트 씨는 다리에 두툼한 붕대를 감아 고정시킨 상태였다.

지난번 부상이 꽤 심했던 걸로 기억해 안부 인사가 먼저 나왔다.

“다리는 좀 괜찮으신가요?”

“네. 그때 통증이 심해서 너무 고통스러웠는데 덕분에 무사히 진료받았습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아니에요.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걸요.”

“마약 성분이 든 것도 아닌데 금방 통증이 사라지더군요. 집안이 병원을 해서 잘 알아요.”

“병원이요?”

“네. 아버지도, 형들도 모두 의사거든요. 부상을 입은 날, 조치가 끝난 뒤 가족들에게 진통제를 보여 줬어요.”

“진통제를요? 어디서 구하셨던 건가요?”

“행사장 측에 양해를 구해서 한 병 얻었죠.”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홍보하고 싶은 마음에 부스를 정리하기 전 약을 뿌리다시피 했었다. 그렇게 푼 약이 알버트 씨에게 간 모양이었다.

“마약 성분이 없는 걸 확인한 아버지께서 정말 감탄하시더군요. 신전의 진통 포션보다 더 대단하다고요.”

“과찬이세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진통제를 더 구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께서 수술이 마치고 힘들어하는 환자들에게 주고 싶다 하셨습니다. 물론 값은 치를 겁니다.”

의사에게 인정을 받은 건 처음이라 감동이 밀려왔다.

감정이 북받쳐서 얼른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알버트 씨가 재빨리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수요가 많을 테니 많은 양을 공급하긴 힘드시겠죠! 이해해요. 조금이라도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물량은 제법 있으니 염려하실 필요 없어요. 병원이라면… 혹시 마취제는 필요 없으신가요?”

“마취제요? 그런 것도 있습니까?”

“네. 마찬가지로 마약 성분이 전혀 없어요. 혹시 몰라서 샘플을 가져왔어요.”

챙겨온 가방을 테이블에 올리자 쿵하고 무거운 소리가 났다.

“무게가 꽤 나가는군요.”

“아무래도 유리병에 보관하니까요.”

가방 안에서 진통제와 마취제를 꺼냈다.

약의 용량과 농도 별로, 쓰임 방법에 따라 갖가지 종류로 만들어져서 제법 양이 많았다.

알버트 씨가 조금 놀란 얼굴로 그것들을 살폈다.

“종류가 꽤 많군요.”

“이건 설명서예요. 원하신다면 행정부에서 받은 허가서도 보여드릴 수 있어요.”

알버트 씨가 빠르게 설명서를 읽어나가는 동안 나는 초조히 그를 기다렸다.

입 안이 바싹바싹 말라서 어느새 식어 버린 음료로 목을 축였다.

간간이 그에게 약품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지난번 알버트 씨가 복용한 진통제의 경우 농도가 짙은 약이었어요. 희석 정도에 따라 진통을 경감시키는 정도가 달라요.”

“같은 통증이라도 체질에 따라 필요한 농도가 다르겠군요.”

“네. 농도와 복용 정도에 차이가 날 거예요. 대략적인 가이드라인은 안에 첨부된 서류에 있어요.”

“개개인의 체질에 따른 농도는 실무자들이 더 잘 아는 법이죠. 병원에서 쓰다보면 금방 감을 잡을 듯합니다. 다만 당장 약물 계약에 대해서 이렇다한 확답을 드리긴 어려운 점 이해 부탁드려요.”

“이해해요. 계약은 아이들 장난이 아니니까요. 샘플을 가져가셔서 심사숙고해 보시고 연락 주세요.”

알버트 씨의 표정을 보아하니 돌아가는 길에 사무실 계약을 하고 채용 공고를 내야 한다는 판단이 들었다.

아무래도 이제 정말 바쁜 나날이 이어질 듯하다.

* * *

에이든은 집을 나서기 전 다시금 프레드에게 주의를 주었다.

“오늘 내가 어디에 가는지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 할 거야.”

“예. 공작님. 너무 염려 마십시오. 셀레나 씨에게는 일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전해 두겠습니다.”

“그래. 잘 부탁할게.”

에이든은 매끄럽게 굴러가는 마차 바퀴 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오늘 에이든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에스타리온 백작가였다.

얼마 전 시온 에스타리온에게서 생일 파티 초대장이 왔다.

제대로 된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라 시온은 그가 거절할 줄 알고 보낸 걸 테지만 에이든은 망설임 없이 초대에 응하겠노라 답장했었다.

“드디어 보겠네.”

굳이 에스타리온 백작가에 가려는 건 단 하나였다.

“…시에나…….”

셀레나가 가짜가 되어서 내쫓겼다면 그 자리에 있을 사람은 시에나, 그녀밖에 없다.

실제로 시에나 에스타리온이란 이름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기도 했고.

에이든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비틀렸다. 그것은 조소이자 혐오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 대상은 불분명했다. 그는 시에나가 혐오스러운 만큼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셀레나. 난 당신과 달리 천박하기 그지없어서 당신 불행을 이용했어.’

어떻게 보면 그는 시에나와 공범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더더욱 궁금했다.

시에나는 어떻게 지내는지. 혹 죄책감으로 잠 못 이루진 않은지, 셀레나에게 추호의 미안함은 없는지… 제 두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적어도 그는 셀레나에게 미안해서 매일 밤 불면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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