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47화 (48/134)

<47>

[쥐새끼처럼 남의 집을 뒤지느니 소송을 하는 게 나아.]

아멜리아는 한 줄짜리 답장으로 내 제안을 거절했다.

‘내가 직접 에스타리온 백작가에 찾아갈까.’

그들이라면 문조차 열어 주지 않을 것이다. 도리어 내 일기장을 찾아 불태워 치울 수도 있다.

‘다른 수를 찾아야 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방법을 짜내는 사이, 에이든 경과의 수업 시간이 다 되었다.

얼른 서재로 내려가자 먼저 도착한 에이든 경이 보였다.

“2분 늦었어.”

“죄송해요.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선생님이 늦는 때가 다 있구나.”

에이든 경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오전 검술 훈련이 끝난 뒤 샤워를 해서 덜 마른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요즘 너무 바쁜 거 아냐? 나한테도 관심을 줘.”

농담 삼아 던진 말인 걸 아는데도 얼굴에 열이 올랐다.

애써 덤덤한 태도로 그에게 말했다.

“오늘은 사교댄스를 할 거예요. 서재가 아니라 1층의 빈방에서 수업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사교댄스?”

그는 어울리지 않게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무도회가 한 달하고도 며칠밖에 안 남았잖아요. 에이든 경은 운동 신경이 좋아서 금방 배울 거예요.”

서재를 나와 빈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창문을 투과한 햇빛 덕분에 부유하는 먼지가 보였다.

춤을 춰야 한다니 어색해 어쩔 줄 모르는 에이든 경을 내 쪽으로 끌어와 맞은 편에 세웠다.

“자. 마주 보고 서서.”

에이든 경이 내 앞에 서자 그림자가 졌다.

키가 무척 컸기 때문에 그와 시선을 마주하기 위해선 목을 꺾어 올려다봐야만 했다.

“제 손을 잡아요.”

그의 검은 눈이 잘게 흔들렸다. 머뭇거리는 태도가 뜻밖이었다.

얼른 손을 잡으란 의미로 허공에 올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가 아주 조심스레 내 손을 잡았다.

손바닥에 난 딱딱한 굳은살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리고 다른 손은 제 허리에 감아요.”

“뭐, 뭐어? 허, 허리에?”

“어서요.”

“그건…….”

표정에 당황한 게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가 허리께에서 손을 멈춘 채 쭈뼛대자 보다 못한 내가 그의 손을 붙잡아 허리 위에 툭 올렸다.

허리에 올린 손이 뻣뻣하게 굳어서 허리를 감는 게 아니라 얹어놓았다고 표현해야 할 듯했다.

세차게 흔들리는 눈이 내 눈치를 살폈다. 허리에 올린 손이 슬쩍 떼어졌다.

“무도회에 가서 이러면 욕먹어요.”

허공을 배회하는 손을 잡아 제대로 허리에 감았다.

그러자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움찔거리는 어깨로 그가 얼마나 긴장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은근히 숫기가 없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자아. 제 발을 보고 걸음을 옮기면 돼요.”

느릿하게 스텝을 밟아나갔다.

“하나, 둘, 셋. 턴.”

곧잘 따라 할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에이든 경은 꽤 연습이 필요할 듯했다.

단순히 스텝을 따라 하는 것뿐인데 박자를 틀리고 동작도 어딘가 이상했다.

녹슨 관절 인형을 억지로 움직여서 삐그덕대는 것 같았다.

“에이든 경.”

“어, 으응? 왜 그래?”

당황한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그러자 그가 낮게 숨을 삼켰다.

“긴장 풀어요.”

“긴장 안 했어.”

거짓말. 긴장 안 했다는 목소리가 잘게 떨렸었다.

“진짜야.”

“다시 해 봐요. 자. 하나, 둘, 셋. 턴.”

몸을 휙 돌리는 순간 허리에 올라간 그의 손에 힘이 더해졌다. 그러자 에이든 경의 얼굴이 발갛게 익었다.

이렇게 쑥스러움을 타는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에이든 경. 밖에선 이러면 안 돼요. 사교댄스에 익숙해지셔야 해요.”

“아, 알아. 거기 가선 안 이래.”

“흐음. 정말요?”

눈을 가늘게 뜨자 에이든 경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그가 심호흡을 하더니 말했다.

“조금만 쉬었다 하자.”

“수업 시작한 지 오 분밖에 안 됐어요.”

“잠시만. 오 분만…….”

그리 말한 에이든 경은 맞잡은 손을 떼고 후닥닥 내게서 멀어져, 한쪽에 놓여 있던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손부채질까지 하며 진정하려 애쓰는 모습이 어지간히 긴장한 모양이다.

“괜찮으세요?”

“으응? 아, 아니… 괜찮아. 그… 되게 어렵다. 춤이란 거.”

“나중에 에바나 베키를 불러서 같이 춰 보세요. 그럼 좀 익숙해지실 거예요.”

“아냐, 됐어. 선생님이랑 하는 게 나아.”

“그래요? 무도회장에 가셔서 잘하실지 염려돼요.”

“연습하면 돼.”

“그럼 다행인데…….”

에이든 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깊은숨을 들이마시곤 한결 진정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한번 해 보자.”

다시 손을 붙잡았다. 에이든 경의 손바닥이 점점 축축해졌다.

어느 틈엔가 허리에 올려진 손이 허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차차 괜찮아지리라 믿고 우선은 스텝을 익히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하나, 둘, 발은 뒤꿈치를 드셔야 해요. 네. 그렇게요. 좋아요. 다시 해 볼게요. 하나, 둘, 셋. 턴.”

몸을 휙 돌리는 순간 그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혹여 내가 균형을 잃을까 염려한 듯했다.

기다란 손가락이 내 손을 단단히 그러쥐었다. 손바닥에 난 굳은살 감촉이 전해졌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아까부터 나만 응시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숫기 없는 태도와 달리 검은 빛깔 아래 낮게 침잠한 열기가 엿보이는 눈이었다.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사냥을 시작하기 위해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긴 짐승과 눈이 마주친 기분이 들었다.

이 남자는 삶이란 전쟁에서 살아남아 기어코 이곳까지 올라온 한 마리의 짐승이었다.

그것을 이제야 피부로 느끼게 된 듯했다.

“하나, 둘, 셋…….”

늘 부드러운 태도로 대해 줘서 잊고 지냈다.

이 사람이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건 그만큼 강인한 포식자이기 때문임을.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가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어떻게 낯설게 느껴지냐고 한다면…….

“아.”

딴생각을 했기 때문인지 몸을 돌리는 순간 발목이 휘청거렸다.

에이든 경이 얼른 내 허리를 붙잡아 받쳐 주었다.

단단한 팔 감촉이 여실히 전해졌다. 덜 마른 머리카락에서 청량한 향이 밀려왔다.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얼굴에 피가 쏠렸다.

“선생님. 괜찮아?”

“어, 네. 네. 괜찮아요.”

“얼굴이 붉어.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뇨. 그게…….”

고개를 들자 염려 가득한 얼굴이 보였다. 에이든 경이 세심하게 나를 확인했다.

심장이 크게 박동했다. 가슴이 조여 왔다. 이게 뭐지? 왜 이러는 거지?

에이든 경의 검은 눈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 같았다. 낯선 감정에 숨이 막혔다.

“그…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요.”

“그래. 그게 좋겠어. 발목은 괜찮아?”

“네. 균형을 잃었던 것뿐이라 문제없어요. 저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요.”

허둥지둥 도망치듯 방으로 돌아왔다.

방금 전까지 꼭 붙들고 있던 손에 에이든 경의 감촉이 맴돌았다. 그러자 또다시 얼굴에 열이 올랐다.

에이든 경은 춤이 처음이라지만 나는 경험자인데도 이러는 건…….

“후우. 정신 차려. 이럴 때가 아냐.”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을 무시한 채 가방을 챙겼다.

정신이 산란할 때엔 일이 최고였다.

* * *

진통제를 유통하려는 계획이 자꾸 어그러지자 하는 수 없이 정공법을 택하기로 했다.

시간이 걸리고 발품을 팔아야 할 테지만 입소문을 이용해 소비자들이 먼저 물품을 찾도록 만드는 것이다.

프레드 씨가 거주하는 동네는 이미 진통제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났다.

그래서 어렵지 않게 인근 약방에 진통제를 유통시킬 수 있었다.

“어머, 셀레나 씨. 또 오셨네요! 그렇잖아도 지난번에 주고 간 약이 다 나가서 연락드리려던 참이었는데!”

약방의 메기 씨가 호들갑을 떨며 나를 맞았다.

“입소문이 나서 옆 동네에서도 사러 와요! 그리고.”

메기 씨가 구석으로 데려가 작게 속삭였다.

“의외로 여자분들에게서 인기가 좋아요. 매달 배가 아플 일이 있잖아요.”

한쪽 눈을 찡긋거린 메기 씨를 보자 여성 전용 진통제를 만드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붓는 걸 억제해 주는 성분을 추가하는 것처럼 말이다.

“근처 병원에서 진통제의 존재를 알고 있나요?”

“알지 않을까요? 요 근래에 소문이 파다한데.”

“흐음.”

진통제뿐만 아니라 마취제도 유통하고 싶었다.

사실 진통제에 비해 마취제는 그리 큰 수익을 올릴 것 같지는 않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마취제가 쓰일 일은 많지 않을 테니까.

그럼에도 마취제를 유통하려는 건 수술 중 쇼크로 죽는 수를 줄이기 위함이었다.

‘수술 고통으로 마약에 빠지는 경우도 많고.’

일단 마취제를 개발해 냈으니 어떻게든 빛을 보게 만들고 싶은 욕심도 있다.

그래서 약방 근처의 병원으로 갔다.

겨울이라 환자가 많은 탓에 한참 기다린 다음에야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셀레나 레이온이라고 합니다.”

“네. 레이온 양. 어디가 아파서 오신 건가요?”

“다른 환자분들의 진료 시간을 빼앗는 것 같아서 간단하게 설명드릴게요. 이건 제 명함이고 이건 마취제예요.”

“마취제요?”

“네. 투여용량과 희석여부, 투여부위에 따라서 극소부위 마취부터 신경마취까지 다양하게 이용 가능해요. 제품 설명서니 한 번 읽어봐 주세요.”

준비한 것들을 내밀자 의사는 크게 코웃음을 쳤다.

“이봐요. 지금 여기가 영업이나 하라고 있는 곳인 줄 압니까? 여긴 병원이에요. 병원. 그깟 엉터리 약물은 저기 사이비 소굴에나 가서 팔아요.”

이런 대우를 받을 건 각오했었다. 모멸감이 치밀었지만 마른침과 함께 목구멍 뒤로 꾹꾹 눌러 삼켰다.

“근처 약방에 유통되는 진통제도 제가 만들었어요. 효능은 보장해요. 수술이 있을 때 한 번만 사용해 줘요. 적어도 환자가 쇼크로 죽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어요?”

“가져온 물건 가지고 이만 나가 봐요. 다음 환자!”

의사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나를 내쫓았다.

이렇게 빈손으로 갈 수는 없어서 의사의 책상에 설명서와 마취제 한 박스를 놓고 도망치듯 나왔다.

“이봐요! 이거 가져가라니까!”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뛰었다.

근처 골목에 몸을 숨긴 뒤에야 숨을 고를 수 있었다.

“헉. 헉.”

마취제를 던져주고 왔다고 오늘 할 일이 끝난 것도 아니다.

입소문이 났다는 옆 동네의 약방에 가서 진통제 유통 계약을 했다.

이곳에서 소문이 나면 근처에도 소문이 나 약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질 거다.

그렇게 샘플로 건네줄 약병을 짊어지고 한참을 걸어다닌 뒤 저녁 늦게야 저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늦었네.”

에이든 경이 안뜰의 흔들의자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밝은 달빛과 저택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빛으로 인해 그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그의 머리카락이 밤하늘을 닮았다면 검은 눈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같았다.

분명 어둠을 닮은 빛깔인데 언제 어디서나 시리게 빛났기 때문이다.

“피곤해 보여. 선생님.”

겨울의 끝자락,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우리 둘을 스쳐지났다.

추워서 몸이 움츠러들 법도 한데 온종일 걸어서 그런지 오히려 시원하기만 했다.

지난번 춤 연습 때 얼굴을 붉혔던 게 떠올라서 괜스레 열이 올랐다.

“왜 나와 계세요.”

“달 구경한다고. 오늘 보름달이 떴잖아.”

“그렇군요.”

달이 아름답게 떴나 싶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사이 에이든 경이 내게로 훌쩍 다가왔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입김이 흘러나오는 게 보였다.

“근데 그럴 필요가 없었네.”

“왜요?”

“그거 알아? 선생님 눈은 달을 닮았어. 노랗고 밝게 빛나.”

가슴이 두근거리고 바로 앞의 에이든 경이 지독하게 의식되었다.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는 건 어울리지 않게 발그레하게 익은 두 볼이 재미있어서일까, 아니면 오직 나만을 담은 두 눈이 아름다워서일까.

어떤 답이 되었건 중요한 건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단 걸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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