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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46화 (47/134)

<46>

나는 내가 셀레나 에스타리온이던 때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안다.

그때 나는 마음도 약했고 순진해서 친구인 척하는 남을 단짝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아멜리아는 내가 아직도 그 시절 그대로라 믿는 듯했다.

순진하던 셀레나 에스타리온은 이단심문소에서 죽었는데.

“네가 사라지고 나 혼자 수습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를 거야. 시에나는 잘 모르면서 은근히 욕심을 내지….”

진짜 친구였다면 내 변화를 알아차렸을 텐데, 아멜리아는 적당히 나를 구슬릴 생각인 것 같았다.

“그간 혼자 고군분투하느라 고생 많았어. 그간 나와 함께해 준 점에 정말로 고마워.”

“이런 이야기를 하자고 온 건 아닐 것 아냐. 본론부터 말해.”

아멜리아는 예상과 다른 반응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향수 공방. 원래 내 것이었잖아. 내가 만들어서 내가 운영했던 내 것. 그러니 본래 주인에게 돌아와야지. 안 그래?”

“너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내가 내 것에 권리를 주장하는 것뿐인데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네.”

“너, 너… 넌 네가 아직도 셀레나 에스타리온인 줄 알아?”

“애초에 네 것이 아닌 걸로 그만큼 누린 것만으로도 크게 감사해야 하는 거 아냐? 지저분한 소송으로 번지기 전에 조용히 돌려주는 게 좋을 거야.”

나를 노려보는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 눈에 일렁거리는 것은 분명한 적대감이었다.

“…않은 게.”

“뭐?”

“기억도 온전치 않은 게.”

“무슨-.”

“자신이 뭘 잊어버렸는지도 모를 만큼 기억이 엉망진창이면서 어떻게 이건 네 건 줄 알았대?”

“그게 무슨 뜻이야?”

아멜리아가 흥분해서 격양된 어조로 말했다.

“너, 열다섯 살 생일 즈음의 기억이 없을걸?”

“이상한 소리 하지 마. 그럴 리가 없잖아.”

“잘 생각해 봐. 열다섯 살 생일 파티가 어땠는지 기억나?”

“그땐 생일 파티 같은 거 안 했어. 왜냐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말문이 막혔다.

‘생일 파티를 했던가?’

파티를 안 했어도 생일을 보낸 기억이 남아야 하는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게서 당혹스러움을 읽은 아멜리아가 비뚜름하게 웃었다.

“넌 분명 그때 생일 파티를 했어. 황태자 전하께서 네게 선물까지 보냈었지. 하지만 넌 기억 못 해. 아니, 기억을 못 한다는 사실조차 몰라.”

“그게 무슨…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등신 같긴. 정신이 온전치 않은 건지 머리가 이상한 건지. 법원이 제대로 된 기억도 없는 네 손을 들어 줄 리가 없어. 어디 한 번 소송을 하든 어쩌든 네 맘대로 해봐!”

소리를 내지른 아멜리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를 쫓아가 묻는 게 맞는데, 내게 기억이 없단 걸 믿기 힘들어 생일 즈음의 기억을 더듬어나갔다.

열다섯 살 생일 무렵엔 머리에 안개가 낀 것 같았다.

떠올리려 할수록 갑갑함만 더해졌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생일 파티까지 했는데 어째서 기억이 없는 거야.’

두통이 찾아와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팠다.

상비약처럼 들고 다니는 진통제를 마신 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약효가 돌기만을 기다렸다.

아멜리아가 내게 거짓말을 한 것 같지는 않다. 나를 욕하는 그 음성엔 진심이 가득했으니까.

‘내 기억을 온전히 확인해 봐야 해.’

내가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 일기장과 기억을 대조해봐야겠다.

문제는 일기장이 에스타리온 백작가에 있다는 거다.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어. 어떻게든 방법을 만들어 보자.”

마침 약효가 돌기 시작해, 카페를 나서서 마차를 잡아탔다.

아무래도 에스타리온 백작가에 가 봐야 할 듯했다.

* * *

셀레나가 잭슨의 불성실함이 염려된다고 했던 건 아주 정확한 지적이었다.

잭슨은 지난번에 이어 오늘도 수업 시간에 30분이나 늦었다.

혼자 훈련을 진행하던 에이든은 잭슨이 어슬렁어슬렁 나타나자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수업을 요청한 건 그였고, 에이든은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싶었다.

“지난번에 지적했던 자세가 유지되지 않는 문제는 코어 운동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교정해 봤는데 스승님이 생각하기엔 어때?”

지각을 한 것 때문에 화가 났지만 에이든은 감정을 제쳐놓고 수업에 집중했다.

그런 에이든의 태도에 의아해한 건 잭슨이었다.

“혹시 예전에 발목 부상을 당한 적 있으십니까? 몸에 힘이 들어가면 미묘하게 발목이 꺾이는데 그 때문에 몸이 무너지는 걸 수도 있습니다.”

“아. 어려서 발목이 부러진 적이 있긴 해.”

“그래서 그렇군요. 그런 거라면 근육 증진을 통해 중심을 잡는 게 좋을 수도 있겠습니다.”

에이든은 성실하게 수업에 응했다. 어쩌면 셀레나의 수업보다 더.

수업이 마칠 즈음 잭슨이 에둘러 물었다.

“당신 정도 되는 사람이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나 정도 되는 사람이 뭐지?”

에이든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이를 악문 채 이야기했다.

“신분이 높아져도 천한 노예 출신일 뿐인데 나 정도라니. 올해 들은 소리 중 가장 재미난 말이었어.”

에이든은 제 출신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셀레나가 편견을 가지지 않고 대해 주는 것과는 별개로 세상은 그를 노예 출신으로만 봤다.

제아무리 그가 능력만으로 신분 상승에 성공한 인재라도, 귀족 사회는 쉽사리 그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에이든 또한 그들만의 리그에 들어가고 싶은 욕심은 없었다.

노예 신분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꿈을 꾸는 것처럼 행복했다.

그럼에도 그가 글을 배우고, 지식을 알아가는 고, 검을 연마하는 건 모두…….

“가진 게 많은 사람은 인정받지 않아도 괜찮겠지만, 나처럼 밑바닥을 살던 사람은 뭐라도 해서 인정받아야만 해.”

“남들의 인정이 필요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의외로군요.”

잭슨의 말에 에이든이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그것은 조소였다.

“그래야만 그 사람의 영롱함이 더럽혀지지 않거든.”

“예?”

스스로 빛날 줄 모르면 반짝이는 보석을 가져도 어울리지 않을 테다.

오히려 제 손에 보석이 떨어졌을 때 자신이 가진 그늘이 보석의 반짝임을 가릴까 두려웠다.

‘저것을 봐, 제아무리 아름다운 빛을 내뿜어도 저런 이의 손에 들린 이상 볼품없는 돌멩이에 불과해.’

그녀가 그런 말을 들을까 봐 두려웠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저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면 안 된다.

그래서 악착같이 나은 사람이 되려 애쓴다.

조금이라도 덜 무식하고 덜 무능해지기 위해…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봄에 있을 검술 대회에 나갈 거야. 그곳에서 우승하는 게 목표야.”

에이든의 새까만 눈에 뜨거운 열기가 흐르자, 잭슨은 그가 어두운 하늘 속 저 멀리 빛나는 별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밤하늘에 고고히 떠 있는 그 존재를 모두가 알게 될, 그런 별 말이다.

* * *

“아가씨! 왜 이제야 연락 주시는 거예요!”

로지는 에스타리온 백작가에서 지낼 때 내 전담 하녀였다.

“세상에, 얼굴 좀 봐. 그렇잖아도 마르셨는데 살이 쏙 빠지셨네.”

“잘 지냈어? 키가 좀 더 큰 것 같네.”

아직 십 대인 로지는 몇 달 사이 인상이 많이 성숙해졌다.

“그렇게 나오고 나서 네 걱정 많이 했어. 내 측근이라고 괴롭히거나 힘들게 하진 않든?”

“괜찮아요. 염려하실 필요 없어요. 그보다 아가씨는 어떻게 지내세요? 이단심문소에 끌려가셨다면서요. 백작님도 참 너무하시지. 거기가 어떤 곳인데…….”

괜찮다는 의미로 로지의 손등을 쓸어 주었다.

거칠어진 감촉이 그간 백작가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짐작 가능했다.

“로지. 부탁할 게 하나 있어. 들어줄 수 있을까?”

“뭔데 그러세요?”

“내 방 책장 가장 아랫칸에 나무 상자가 있잖아. 그 속에 담긴 일기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

“한 권이면 돼요?”

“아니. 모두 다 가져다줘야 해.”

“한번 해 볼게요.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시에나 아가씨가 온 뒤 저택 경비가 삼엄해졌거든요. 그리고…….”

로지가 머뭇거리며 어렵사리 이야기를 꺼냈다.

“아가씨 방이 드레스룸이 되면서 안에 있던 가구며 짐이 죄 다른 곳으로 이동되었거든요. 창고나 다락 전체를 찾아봐야 할 듯해요.”

“얼마가 걸리든 괜찮아. 부탁할게.”

“문제는 제가 곧 그만둘 예정이란 거예요. 사흘 뒤까지만 일하기로 했어요.”

“시도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

그렇게 로지에게 일을 맡기고 사흘이 지났다.

사흘간 몇 번이고 기억을 되돌아봤지만, 안개가 낀 듯 머리가 멍해지더니 두통이 찾아오곤 했다.

계속 같은 증상이 반복되니 무언가 있다는 확신만 더해졌다.

“로지. 여기야.”

다가온 로지의 시무룩한 표정만으로도 일이 어떻게 됐는지 알 것 같았다.

“많이 기대하셨을 텐데 죄송해요.”

“괜찮아. 다른 방법을 찾으면 돼.”

“2층 창고의 구석 상자 틈에서 발견했는데 가지고 나올 수가 없었어요. 저택을 오가는 하녀들이 혹시 물건을 훔치지 않을까 감시하더라고요.”

“그랬구나. 힘써 줘서 고마워. 고생했어. 그보다 백작가를 관두면 앞으로 무슨 일을 하는 거야?”

“고향으로 내려가기로 했어요.”

그간 함께해 온 만큼 고향에 내려가는 대신 내 아래에서 일하면 좋겠지만 로지는 아직 미성년자였다.

사업업무를 나누기엔 내게도 로지에게도 부담스러울 게 뻔해 차마 권할 수가 없었다.

결국 로지에겐 근처에서 밥을 사 준 뒤 마지막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저녁이 되어 저택으로 돌아온 뒤엔 어떻게 다시 일기장을 구할지 고민했다.

‘에이든 경에게 부탁할 문제는 아냐.’

이건 내 문제였다. 그에게 의지해 부담을 주고 싶진 않았다.

톡. 톡. 톡.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다 계산을 마쳤다.

곧장 아멜리아에게 편지를 썼다.

에스타리온 백작가에 있는 내 물건을 꺼내와 주면 군말 않고 사업체를 넘겨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아멜리아가 제안을 받아들일지는 잘 모르겠다.

사교계에서 입김을 행사하길 바라는 이상 내 제안을 거절하긴 힘들 테지만, 그녀는 체면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부디 수락하길 바라며 봉투에 편지를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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