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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45화 (46/134)

<45>

[…약물의 효능을 확실히 확인한 바, 셀레나 레이온 씨에게 계약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구체적인 조건은…….]

편지 내용에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셀레나 씨?”

“계약 제의가 왔어요!”

내 대답에 에바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가 환히 웃으며 축하해 주었다.

“축하드려요! 그렇게 고생하시더니 금방 계약을 따내셨네요!”

“믿기지가 않아요. 계약이라니… 다른 방법을 찾고 있었거든요!”

들뜬 기분으로 가방을 챙겨 내려가다가 검술 수업을 마치고 들어오던 에이든 경과 마주쳤다.

그는 주말이라 내 수업은 듣지 않아도 검술만큼은 빠짐없이 훈련했다.

“뭐야, 무슨 일인데 선생님이 방방 뛰는 거야?”

“계약 제안이 왔어요.”

“정말? 그것 잘됐네.”

“오늘 상담을 마치고 여기, 회사에 들러 보려고요. 무역 회사라 주말에도 근무를 한다더라고요.”

“조금 늦을지도 모르겠네.”

“네. 저녁에나 도착할 것 같아요.”

“그래. 상담 잘 받고 와. 선생님.”

“고마워요. 에이든 경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손을 흔드는 에이든 경을 뒤로한 채 상담실로 향했다.

번화가 끄트머리에 자리한 상담실은 포근한 분위기의 작은 사무실이었다.

그리고 상담사는 흰 머리가 희끗희끗 난 중년의 여인이었다.

‘후우.’

오늘이 첫 상담일인 터라 조금 긴장되었다.

안내받은 대로 자리에 앉자 그녀가 자신을 소개했다.

“글로리아 험프스예요. 편히 글로리아라 불러 줘요.”

“셀레나 레이온이에요.”

“이름이 예쁘네요.”

“감사합니다.”

“상담받는 결심을 하느라 많이 힘들었을 텐데 혹시 불편하지는 않나요?”

“아뇨. 오히려 좋아요. 항상 상담의 필요성을 느끼기도 했고요.”

“어떤 점에서 필요성을 느꼈나요?”

“어린 시절 기억이 없어요. 그리고 자주 악몽을 꾸고 두통에 시달리는데, 아무래도 제 잃어버린 기억에 답이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노력해도 기억이 나지 않더군요.”

기억을 잃어버린데다 그 기억 때문에 악몽과 두통에 시달린다는 말이 우스워 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글로리아 씨를 힐끔힐끔 살폈는데 의외로 그녀는 무척 진지한 얼굴로 경청 중이었다.

“어린 시절이라면 어느 정도 나이를 말하는 거죠?”

“열 살이요. 그 이전의 기억이 없어요. 열 살 즈음을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이 잘 없긴 하지만 저처럼 도려낸 듯이 기억하지 못하는 건 특히 드물더군요.”

“그럼 셀레나 씨의 최초의 기억은 뭔가요?”

“제 첫 기억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달리던 순간이었다. 그저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구조된 뒤 얼마간은 기억이 흐릿해요. 스스로 소화해 내지 못해 그런 것 같아요. 그 뒤 정신을 차렸을 땐 가족의 품이었죠.”

글로리아 씨에게 내가 에스타리온 백작가에 지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백작가를 입에 담는 게 불편하기도 하거니와 그녀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아직 확신이 들지 않아서다.

그래서 두루뭉술하게 설명했다. 적당히 부유한 집안의 딸인 것처럼.

“기억을 되찾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나요?”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지겠죠. 그리고 문제의 원인을 아는 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렇군요. 그럼 셀레나 씨에겐 기억을 되찾는 게 무척 중요한 일인데, 두통과 악몽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기억하시나요?”

“음…….”

두통과 악몽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악몽은 집에 돌아온 직후부터 쭉 시작되었어요. 그 내용은 항상 기억나지 않지만 경기를 일으키며 깨서 아…지께서 저를 안아 달랬던 게 기억나요.”

차마 아버지라고 말이 나오지 않아 묵음 처리를 해 얼버무렸다.

글로리아 씨는 눈치를 챈 건지 모른 척을 하는 건지 계속 내 말에 집중했다.

“하지만 두통은 모르겠어요. 정말 어느 날부턴가 시작됐어요.”

“어느 날부터요?”

“네. 어느 날부터…….”

기억을 더듬어나가자 또다시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항상 이런 식이다. 무언가를 알아내려고 하면 누군가 방해하듯 두통이 돋는다.

“하지만 두통 때문에 처음으로 진통 포션을 복용했던 날은 기억나요.”

“그때가 언제인가요?”

“…그때는…….”

당시 내 약혼자였던 황태자, 필립소를 만나고 온 날이었다.

* * *

상담실을 나올 무렵엔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목 안이 따끔거렸지만 머리가 복잡해서 아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해가 안 가.’

황태자를 만난 그날, 진통 포션을 복용할 정도로 심한 두통이 생겼다.

그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단 건 그날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황태자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날 법도 한데 무엇 하나 기억나질 않는다.

정신을 차렸을 땐 집이었고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상한 일인데 이상하다는 걸 인지하지도 못 했어.’

에스타리온 백작가의 일이 바쁜데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두통에 정신이 팔려 짚고 넘어가지 못한 걸 테다.

“윽.”

아직 지끈거림이 남아 속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한들 사업을 등한시할 수는 없었다.

곧장 계약 제안이 왔던 회사를 찾아갔다.

“무슨 일로 방문하셨나요?”

안에 있던 직원에게 답했다.

“선약 없이 방문해서 죄송해요. 저는 셀레나 레이온입니다. 귀사에서 사업 제안을 받아서 들렀어요.”

“잠시 앉아계시겠어요? 사장님을 불러올게요.”

“네. 그럴게요.”

직원은 나를 응접실로 안내해 주었다.

그곳에서 체크 리스트를 다시 확인하고 있자 사업 제안을 했던 사장이 들어왔다.

“셀레나 레이온 씨?”

“네. 처음 뵙겠습니다.”

“짐 리튼 입니다. 혹시 오늘 급송으로 보낸 편지를 못 받으셨나요?”

“아… 일찍 나와서 아직 확인을 못 했어요.”

에바는 아침 일찍 출근했으니 이후 온 편지라면 받지 못했을 테다.

리튼 씨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스쳤다.

직감적으로 무언가 안 좋은 소식이 들려올 거란 걸 알 수 있었다.

“제안 철회 의사를 보냈습니다.”

“…네? 이유가 있으신가요?”

“어제저녁 늦게, 황실 행정부에서 공문이 내려왔습니다. 최근 들어 신종마약을 사용한 진통제가 늘고 있으니 주의하라더군요.”

“하지만 제 약은 마약을 사용하지 않았어요.”

“압니다. 하지만 행정부에서 워낙 강경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조금의 의혹이라도 있으면 회사에 허가된 모든 행정 서류가 취소될 수도 있다니…….”

“그건 권력남용이에요!”

“사측에서 짊어지기에는 감당키 힘든 리스크였죠.”

리튼 씨는 지금 핑계를 대는 거였다.

내 약이 마약을 사용하지 않은 걸 100프로 확신하지 못하니, 행정부 공문이 두려워 몸을 사리는 것이다.

그가 내게 제 탓이 아님을 증명해 보이듯 공문을 건네주었다.

거기엔 행정부 장관 에스타리온 백작이 직접 주의를 준다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날 겨냥한 거였어.’

거칠어지는 숨을 삼켰다. 흥분을 잠재우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시에나에 이어 에스타리온 백작까지… 그들을 향한 적의에 혈관이 타오를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방해를 하다니, 치졸함에 치가 떨렸다.

‘흐르는 물을 둑으로 막아 보라지.’

그 물이 영원히 가둬지진 않는다.

그처럼 진통제를 향한 열망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존재하는 병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진통제는 필연적으로 요구될 수밖에 없는 법이다.

이런 식으로 방해한다면 나는 그 열망에 불씨를 틔우면 그만이다.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리튼 씨의 말에 공문을 돌려주며 답했다.

“괜찮아요. 약을 찾는 사람은 많으니까.”

* * *

아멜리아는 시에나에게 그 정도로 말했으면 일이 해결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오늘 그녀에게 날아온 건 선박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소식이 아니었다.

“…경영권을 두고… 소송을 한다고?”

셀레나가 그녀에게 보낸 것은 향수 공방의 운영에 대한 법적 다툼을 예고하는 편지였다.

아멜리아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녀는 셀레나를 잘 알았다.

셀레나는 유순하고 다정한 사람이지만 고집스런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일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 철저했다.

그런 성격이니 에스타리온 백작도 백작가의 안살림을 그녀에게 도맡긴 걸 테다.

“소송이라니…….”

그건 아멜리아 본인에게 추문이 되기도 하겠지만, 향수 제작에 있어서 신뢰성을 떨어트리는 커다란 문제였다.

만약 소송을 당하면 부모님께선 그녀에게 크게 실망할 테다. 사교계에서도 크게 망신당하겠지.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했다.

“시에나는 대체 일을 어떻게 한 거야!”

아멜리아는 손톱을 씹었다.

여태 가만히 있던 셀레나가 제게 이러는 건 모두 시에나 때문이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한 것 같은데 알 길이 없다.

그리고 셀레나는 시에나를 괴롭히기 위해 자신을 이용하는 걸 테고.

‘그렇다고 한들 셀레나에게 이끌려 다닐 수는 없어. 걔한테 약점이 잡히는 건 이번으로 끝이 나야 해.’

그녀는 셀레나와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이단심문소에서 다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했더랬다.

그 일 때문에 제게도 악감정을 가진 거라면 이렇게 한 번으로 끝날 리도 없다.

“셀레나에게 편지를 보내야겠어.”

아멜리아는 당장 편지지를 찾아 깃펜을 들었다.

셀레나는 마음이 여리고 순진하다. 그러니 직접 만나서 설득하면 악감정을 풀지는 못해도 이런 압박은 그만둘 거다.

가서 시에나를 잔뜩 욕하고 적당히 구슬리면 속아 넘어갈 게 뻔하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아멜리아는 셀레나에게 만나서 이야기하자며 긴 글을 썼다.

그리고 그 시간, 에이든에게 편지 한 장이 도착했다.

“프레드. 이게 뭐야?”

“에스타리온 백작가에서 왔습니다. 뜯어 보시지요.”

“에스타리온 백작가에서?”

며칠 뒤 있을 그의 생일 파티에 초대한다는 초대장이었다.

표정이 묘하게 굳은 에이든이 명령했다.

“가겠다고 답장을 보내. 다만 선생님은 내가 백작가에 초대된 것도, 그곳에 가기로 한 것도 모르게 해.”

“셀레나 씨에게요?”

“그래. 이 사실은 너와 나만 아는 거야. 알겠어?”

“예. 주의하겠습니다.”

에이든은 프레드가 전해준 초대장을 서랍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 뒀다.

그리고 편지와 편지 봉투는 당장 태워 없앴다.

셀레나에겐 들켜선 안 되는 비밀이었다. 이제 인생 2막을 시작하는 그녀를 들쑤셔 봐야 좋을 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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