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셀레나.
익숙한 음성이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소름 같은 것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몸을 돌리자 시에나가 보였다. 나를 보는 그녀의 얼굴에 오묘한 빛이 번져갔다.
그것은 악의였다. 마음 가장 깊은 곳에 피어난 악의.
“셀레나. 이런 곳에서 뭘 하는 거예요?”
적의가 솟았다. 우리 마지막을 기억한다면 이렇게 천연덕스레 말을 걸 수 없을 텐데.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부스로 넘어가려 하자 시에나가 내 팔을 붙잡았다.
“이러면 안 되지 않아요?”
“놔요.”
내 말에도 시에나는 개의치 않았다.
팔을 비틀어 빼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더 꽉 붙들기까지 했다.
그녀가 여유로운 얼굴로 내게 약을 팔라며 몰려든 사람들을 둘러봤다.
그리곤 제법 높아진 목소리로 들으란 듯 말했다.
“셀레나. 허가받지 않은 약물을 파는 건 불법이에요.”
“하.”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나 또한 목소리를 높여 경고했다.
“행정 처리는 끝난 약물이니 트집 잡지 마요. 약효도 확실하고 성분도 안전해요. 그러니 이상한 소리는 그만해요.”
귀족가에 있으면 박람회에 참석할 일은 없을 텐데 여긴 어떻게 온 걸까.
“하지만…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난 당신이 염려스러울 뿐이라고요.”
“마지막 경고예요. 이 손 놔요.”
시에나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더니 흥하고 작게 코웃음을 쳤다.
살짝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보였다. 데구르르 눈을 굴린 그녀가 큰 소리로 물었다.
“또 이단심문소에 들어가고 싶은 거예요?”
“…네?”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단심문소라는 말에 몸이 떨려 왔다.
이름만 들어도 심장이 덜컹거리는 곳이 그곳이다.
이렇게 나를 협박하고 몰아가려고 함부로 꺼내도 되는 무게가 아니다.
“진통제를 잘못 사용하면 이단으로 간주되기 좋잖아요. 이단심문소에 들어가 봤으니 그곳이 어떤 곳인지 잘 알 텐데… 버틸 만했나 봐요?”
나도 모르게 주변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날 향한 시선이 매서워지는 게 보여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들었어? 이단자였나 봐!”
“이단자라니! 그런 사람이 만든 약물이라면 뻔하지!”
“저걸 사용하면 우리도 이단자로 몰릴 게 뻔해!”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간다.
“에잇, 퉤! 이단이었다니!”
누군가는 내 쪽을 향해 침을 뱉었다.
방금 전까지 진통제를 팔라며 부탁하던 이들이 손가락질을 시작했다.
“저렇게 멀쩡하게 생겨 놓고 이단이었다니. 끔찍도 해라.”
누군가는 혀를 쯧쯧 차며 부정이 탄다는 양 일행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내가 정말 이단이었다면 이곳에 있지도 못 했겠죠. 사제님께서 제가 이단이 아님을 증명해 주었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지만 사람들에게 닿지 않았다.
이미 그들에게 이단자로 인지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사라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속절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시에나의 눈은 즐겁게 빛났다.
그 광경을 보자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나는 그녀의 팔을 붙잡고 박람회장 밖에서 벽으로 몰아넣었다.
“이게 뭣 하는 거예요.”
“난 당신을 걱정한 것밖에 없는데… 혹시 방해가 되었을까요?”
눈을 질끈 감은 뒤 감정을 조절했다.
시에나에게 휘둘리면 안 된다. 그녀가 의도한 대로 굴었다가는 나만 손해다.
“에스타리온 백작가가 당신에게 준 것들로는 만족이 안 되던가요?”
시에나는 내 물음에 답할 생각은 않고 불쑥 질문을 꺼냈다.
“어떻게 지냈어요?”
질문을 하는 의도가 나를 조롱하기 위함이란 게 느껴졌다.
“얼굴이 많이 상했네요. 그래도 마지막에 봤을 때보단 좋아 보이지만.”
“…….”
“난 잘 지냈어요. 아참. 당신 방은 이제 개조되어서 제 드레스룸이 되었어요.”
“…….”
내가 대꾸하지 않자 시에나는 약이 오르는 눈치였다.
“이단심문소를 나온 뒤 뭘 하고 살았어요?”
나를 닮은 얼굴에 호기심이 떠오르는 걸 확인한 순간, 이 여자의 근본에 자리한 저열함을 엿본 것 같았다.
그녀는 내가 바닥을 뒹굴기를 바란다.
손톱이 부서지고 얼굴에 검댕이가 묻었던 과거의 자신처럼.
“내가 당신처럼 되는 일은 없어요.”
“뭐, 뭐라고요?”
처음으로 시에나의 평정이 깨졌다.
고작 이 정도로 수치스러워하는 게 웃겼다.
“당신이 백작가에서의 내 일을 대신할 수 없듯이, 나도 당신이 하던 일을 대신할 수 없어요.”
당신은 백작가에 들어가서도 하녀일 때의 모습 그대로라 완벽한 백작 영애는 될 수 없다.
나 또한 더 이상 귀족 영애가 아닐지라도 그 근본은 변하지 않으니 당신처럼 하녀 일을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속뜻을 알아차린 시에나의 얼굴이 벌겋게 익었다.
분노로 일그러진 표정을 보자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시에나가 나를 노려보며 비꼬았다.
“아. 그래서 선택한 게 고작 사기꾼이 되는 거였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 눈에는 사기로 보일지도 모르겠네요.”
시에나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아무리 손을 써도 부스스하던 머리카락은 윤기가 흘렀다.
지금 와서 보면 얄팍한 술수였다.
“언젠가 후회하게 될 거예요.”
“후회요? 당신이야말로 뼈저리게 뉘우치게 될 텐데. 내가 볼 땐 다시 이단심문소에 끌려가고 싶은 걸로 보이거든요.”
“어디 한 번 넣어 봐요. 그럼 난 당신을 무고죄로 고소할 테니까. 마녀니 이단이니 하는 것들로 모는 건 마녀사냥법에 의해 아주 엄중히 처벌받고 있는 걸 모르진 않을 테죠?”
“…….”
입술을 살짝 깨무는 시에나에게 경고했다.
“당신은 잘난 백작가에 가서 하던 대로 재롱이나 떨어요. 그게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잖아요.”
모멸감에 어쩔 줄 모르는 시에나를 두고 몸을 돌렸다.
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내 일에 집중하는 게 좋기도 하고.
“거기 서!”
뒤에서 시에나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사람이 많은 곳이니 난동을 부리지도 못할 테다.
‘속이 시원해.’
속에 있는 말을 마음껏 하니 답답하던 가슴이 한결 나아졌다.
왜 진작 이러지 못했을까. 아쉬움을 느끼며 부스로 돌아오자 잘 차려입은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는 얼굴이었다. 박람회의 진행 요원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부스 주인 되시는 셀레나 레이온 씨 맞으시죠?”
“네. 무슨 일이신가요?”
“내일 오후까지 부스 정리해 주십시오.”
“네에? 갑자기 왜 그러시나요? 부스를 정리하라뇨?”
진행 요원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단과 관련된 물품을 판매하시면 안 되죠. 여차하면 우리도 피 보는데.”
“이건 이단 물품이 아니에요. 허가받은 약품이라고요. 이 서류를 보시면 행정부에서-.”
“거 서류는 서류고 중요한 건 신고가 들어왔어요. 이단 물품이 올라왔다며 난리라고요.”
“잠시만요! 제 이야기 좀 들어 보세요!”
진행 요원을 쫓아갔지만 그는 내 말을 듣기는커녕 신경질적으로 경고했다.
“내일 오후까지 부스 정리 안 하시면 강제 철거될 예정이니 알아서 하세요.”
“아…….”
그는, 아니, 박람회 주최 측은 내 말을 더 들을 생각이 없었다.
내 부스를 빼는 건 이건 이미 윗선에서부터 정해진 사안인 거였다.
시에나의 악의적인 방해가 쉽게 먹혀들었다.
화가 나서 뱃속이 뜨겁게 요동쳤다.
“…시에나…….”
짓이기듯 그 이름을 머금었다.
조금 더 심한 말을 해 줬어야 하는 건데.
텅 빈 부스를 보자 눈물이 차올랐다. 이단심문소의 일이 이렇게 발목을 잡을 줄이야.
“괜찮아.”
다 괜찮아지도록 만들면 그만이다. 그러니 고작 이깟 일에 울지 말자.
나는 눈가를 비벼 닦곤 짐 정리를 시작했다.
* * *
“선생님?”
“에이든 경?”
짐을 끌고 돌아오자 가장 먼저 에이든 경이 보였다.
그는 휘둥그레진 눈을 하고선 한달음에 내게 다가왔다.
“오늘 저녁 늦게야 온다고 했는데 왜 벌써 와?”
“그렇게 됐어요.”
에이든 경이 마차에서 짐을 내리는 걸 도와주었다.
곧 하인들이 몰려와서 나무 상자를 옮겼다.
“괜찮아?”
아침 일찍 챙겨간 짐이 그대로 돌아온 걸 테니 박람회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치챘을 거다.
괜찮다 말하고 싶었지만 빤한 거짓말이라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짐을 끌고 저택으로 돌아오던 길, 꾹꾹 눌러 막은 설움이 시선이 마주친 순간 툭 터져버렸다.
“아…….”
알고 싶지 않은데 눈물이 삐죽 흐르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뒤돌아 눈물을 슥슥 닦으며 감정을 갈무리했다.
“죄송해요. 이러고 싶지 않은데…….”
이런 생각은 하고 싶지 않은데 왜 하필 나인가 하는 막연한 원망이 들었다.
나쁜 짓을 저지른 적도 없는데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당황한 에이든 경이 허겁지겁 내게 다가왔다. 그가 어설프게 내 등을 두들겼다.
힘 조절이 되지 않아 그가 한 번 토닥일 때마다 몸이 휘청거렸다.
그 서툰 손길에 헛웃음이 나왔다.
“에이든 경. 손이…….”
울며 웃는 이 상황이 조금 웃겼다. 고개를 드니 에이든 경이 보였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한껏 당황한 상태였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원한다면 그 자식을 내가 조져, 아니, 박살 내 줄게. 이름만 대.”
“괜찮아요. 별일 아니에요.”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에이든 경의 얼굴이 나보다 더 심각해서 그런지 내가 분노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 나 대신 분노해 주는 게 나를 위로해 주었다.
꼭 내 편이 생긴 것 같아 든든하기까지 하다.
“그럼 잠시만요. 잠시만, 아주 잠시만요.”
“잠시만? 뭐가 잠시만인…….”
에이든 경을 껴안은 건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두 팔을 들어 허공에 손바닥을 펴 보였다.
그의 몸이 잔뜩 굳은 게 느껴졌다. 나는 그의 온기를 확인했다.
이건…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드넓은 세상에 홀로 버려져 많이 외롭고 고독해서 그런 거다.
내 편이 되어 주는 사람이 있단 걸 확인하고 싶어서… 친구인지 제자인지 모를 이 사람으로부터 따뜻한 위안을 얻고자…….
목소리를 쥐어 짜내자 축축하게 젖은 음성이 나왔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당신이 내게 목적이 있어서 다가와도 괜찮다.
혼자가 된 나를 혼자 있게 내버려 두지 않았으니까.
전해지는 온기가 너무 따스해서, 시에나가 나타난 이후 처음으로 내가 혼자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