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41화 (42/134)

<41>

“마취제? 그게 대체 무슨 약물이란 말이오?”

“통증이 발생하기 전 이 약을 쓰면 통증을 느끼지 않게 되어요.”

“통증을 안 느끼게 된다고? 그게 가능하단 건가?”

남자는 회의적인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효능을 믿지 못해서 그런지 진통제와 마취제에 대한 관심이 생각보다 낮았다.

사람들은 부스가 있지도 않은 것처럼 완전히 무시하고 지나쳤다.

“허무맹랑한 소리는 말고 괜찮은 영양제나 있으면 그거나 좀 보여 주시게.”

“영양제는 없어요. 하지만 진통제와 마취제는 영양제보다 더 효과적인 약물이 될 수도 있어요.”

내 말에 지나가던 사람 하나가 남자의 옆에 서서 말을 얹었다.

“난 이 약물들이 효과 있을 거라 믿지 않아. 이런 것들을 취급한 사기꾼들은 역사가 깊다고.”

“약물을 무상으로 드릴게요. 효과를 확인해 보시고-.”

“거기에 마약을 섞었을지 누가 알아! 혹시라도 마약이 섞인 거라면 그 약 때문에 중독자로 빠질 수도 있는데!”

“그럼 제가 먹어서 증명할 수도 있어요.”

“이미 중독자일 텐데 당신이 먹어서 뭐가 증명된단 거지?”

적대적인 말이 쏟아지자 멀찍이 서서 은근한 호기심을 보이던 이들도 다른 곳으로 갔다.

“동부 드로이드 고원지대에 사는 토착민들이 의료 행위 전 피부를 통해 특정 약초의 즙을 흡수시키는 모습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들었어요. 수많은 실험과 연구를 통한 제대로 된 약물이니 한 번만 써 보세요.”

“됐어! 당신의 무얼 믿고!”

남자는 있는 대로 성질을 부리며 떠났다.

화가 나는 와중에 기운이 쏙 빠지는 순간, 박람회장 한쪽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악! 으으으으윽!”

조금 떨어진 곳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화들짝 놀라 그곳으로 가 보니 20대 남자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가벽을 손보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졌어요. 다리가 부러진 것 같은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남자를 부축하려고 했지만 무의미했다.

그럴수록 남자는 더 큰 비명을 지르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를 도우려던 이들이 들것을 찾으러 간 사이, 나는 얼른 부스에서 진통제 한 병을 가져왔다.

남자에게 먹이려고 다가가는 순간, 어떤 여자가 내 팔을 잡아 말렸다.

“뭘 하려는지 몰라도 하지 마요. 그 약, 검증됐어요?”

“이건 진통제예요. 뼈가 부러진 거라면 고통을 온전히 막아 줄 수는 없겠지만 경감시켜 주긴 할 거예요.”

“진통제요? 그건 이단 행위예요.”

잘 모르는 사람들은 신전에서 나온 진통 포션이 아니면 모두 이단이라고 믿었다.

인식부터 바로잡아야 하는 만큼 갈 길이 멀었다.

“이단이 아니라 과학이에요.”

나는 여자를 떨쳐내곤 남자의 입가에 진통제를 가져다 댔다.

“마셔요. 통증이 줄어들 거예요.”

“흐으으윽. 으으아아악.”

남자는 내가 건넨 약을 보며 망설였다.

“마약은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았어요. 효과가 없거나 약에 문제가 있다면 날 고소해도 좋아요.”

남자의 다리를 자세히 보면 부러진 뼈 때문에 살갗이 살짝 불룩해진 게 보였다.

뼈가 제대로 부러지다 못해 자리를 이탈했으니 여간 아픈 게 아닐 테다.

나는 남자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 약을 한 모금 삼켰다.

그러자 남자가 떨리는 손으로 약을 받아 약을 마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주 조금씩 맛만 보는 수준이었지만 곧 쭉 들이켰다.

탁.

빈 병이 바닥에 놓였다. 남자는 여전히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바들바들거렸다.

구경꾼들이 웅성웅성거리며 나를 손가락질했다.

어서 남자에게 약효가 돌기만을 기다렸다.

남자는 비명을 지르다가 끙끙대기를 반복했다.

“저, 저 여자를 붙잡아야 해요!”

“순 사기꾼일 테니 어서 붙잡아다가 치안대에 넘겨요!”

구경꾼들의 손가락질에 숨이 턱 막혔다.

나를 향한 적의가 느껴져 몸이 떨려 왔다.

이단심문소에서 죄수들에게 얻어맞던 때가 떠올라 불안감이 요동쳤다. 그 순간이었다.

“아…….”

약을 먹은 남자가 탄성을 내질렀다.

한결 편해진 안색만 보아도 약효가 돌고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남자가 말했다.

“마, 마약이 아니군요?”

마약이었다면 특유의 나른한 감각이나 눈에 보이는 반응이 일어났겠지만 남자에게선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마약이 아니라 진통제라는 약인걸요.”

주변에서 남자를 보며 수근덕거렸다.

“마약이 아니래요.”

“저 얼굴을 봐요. 아까까지만 해도 죽을 것 같더니 편안해졌어요.”

“마약도, 진통 포션도 아닌데 저만한 효과를 낸다고요?”

때맞춰서 들것을 가져온 이들이 남자를 싣기 시작했다.

남자는 아까까지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한결 진정된 모습으로 들것에 실려 사라졌다.

그러고 나자 좌중이 조용해졌다. 내려앉은 침묵이 꼭 폭풍이 지나간 뒤 고요해진 숲속 같았다.

“그, 그 약을 좀 줘 보시오. 군에 입대하는 내 아들에게 보내 봐야겠어!”

“나도, 나도! 진통제인지 하는 그 약, 한 병만 팔아 봐요!”

한순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런 반응을 원해서 부상자에게 약을 준 거였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니 얼떨떨했다.

“야, 약은…….”

아까부터 나도 모른 사이 붙들고 있던 치맛자락을 확인했다.

어찌나 긴장했던지 축축하게 난 땀으로 인해 조금 젖어 있었다.

‘이제 됐어.’

해냈다는 생각에 기분 좋은 희망이 부풀어 올랐다.

“저기 있는 부스에서 설명해드릴게요.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모두-.”

내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낯익은 목소리가 나를 불러와서다.

“셀레나?”

목소리를 찾아 몸을 휙 돌렸다.

그곳에는 시에나가 있다. 어처구니가 없는 얼굴을 하고서.

* * *

에스타리온 백작가에 온 뒤 시에나의 생활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졌다.

전에는 만져 보지도 못한 값비싼 옷, 먹어 본 적 없는 요리, 따뜻한 집과 귀하게 대접받는 위치까지. 그녀는 이 모든 게 꿈보다 더 환상적이었다.

그래서 무엇이든 악착같이 배웠다. 그것이 글이든, 예법이든, 지식이든 이를 악물고 흡수했다.

조금의 모자람 없이 자신이 속하게 된 이곳에서 쭉 지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멜리아는 정말 좋은 친구예요. 그녀를 알게 된 지 오래되진 않았지만 벌써 아주 절친한 관계가 됐어요.”

시에나는 시온을 통해 아멜리아를 소개받았다.

아멜리아는 로펜가의 이름으로 셀레나와 많은 일을 처리했었는데, 거기엔 에스타리온 백작가의 이름도 함께 쓰였기 때문에 시에나와 잘 지낼 수밖에 없었다.

본래 셀레나가 하던 일을 맡게 되면 그만큼 제 영향력도 늘어날 거라 생각되었지만, 막 걸음마를 뗀 상태라 쉽지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차차 넘겨받게 될 테니까 시간문제지.’

저택의 예산에 관한 일이나 아멜리아와 함께 작게나마 운영하던 사업을 어서 가져오고 싶었지만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어설프게 따라 하다가 우스운 모습을 보이느니 차근차근 알아가는 편이 나으니까.

“그래. 그렇다니 다행이야. 떨리진 않아?”

“이런 자리는 처음이라 너무 떨려요.”

아멜리아가 주최한 자선 파티가 있는 날이었다.

본래는 셀레나와 함께 공동으로 주최해야 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멜리아 혼자 일을 처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에나는 자선 파티를 시작으로 사교계 활동에 포문을 열기로 했다.

“아멜리아뿐만 아니라 아는 사람이 제법 되니 괜찮을 거다. 일부러 크고 작은 자리를 만들어 얼굴을 트도록 했잖아.”

“그래도… 제 차림이 이상하진 않죠?”

“더할 나위 없이 괜찮다.”

“옷에 비해 제가 비루해 보이지도 않고요?”

그녀의 말에 시온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시에나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씰룩거렸다.

“에스타리온이란 이름에 걸맞게 아주 우아해 보인다.”

“그렇다니 다행이에요!”

안으로 입장한 시에나는 탄성을 삼킬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더 대단하고 멋져서 눈이 멀 것 같았다.

반짝이는 샹들리에와 화려한 꽃 장식, 잘 차려입은 귀족들의 모습을 보자, 자신은 절대 셀레나처럼 이 사회에서 내쫓기지 않겠다는 결심이 섰다.

시에나는 시온을 따라다니며 많은 이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시온과 잘 지내는 영식들을 소개받았고, 미리 안면을 텄던 아멜리아의 친구들과는 친분을 쌓아갔다.

“시에나. 셀레나와 쌍둥이라 더 그렇겠지만 정말 닮았어요.”

셀레나의 파문은 귀족 사회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하지만 그녀가 왜 파문당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녀가 이단심문소에 들어갔단 정보도 에스타리온 백작가에 의해 통제되어 아는 이들이 극히 드물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그 이유를 몹시 궁금해했다.

셀레나가 사교성 있는 성격은 아니라 친하게 지낸 사람은 잘 없지만, 그녀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는 잘 알았기 때문이다.

‘다들 파문됐다고 믿는 눈치가 아냐.’

반쯤은 헛소문이라 치부하니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셀레나의 이름을 거론할 수 있는 걸 테다.

“그 아이는 더 이상 우리 형제가 아니니 삼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시온의 정중한 부탁에 사람들은 놀라 시선을 교환했다.

묘한 분위기에 시에나와 제법 친해진 그레이스가 그녀를 잡아 구석으로 이끌었다.

“시에나. 괜찮아요?”

“아… 네. 괜찮아요. 고마워요.”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제게 집중되어야 할 관심이 셀레나에게 쏠린 것 같아 몹시 불쾌했다.

하지만 그런 속내를 들킬 수는 없기에 그녀는 얼굴을 갈무리했다.

“시에나. 그런데 정말로 셀레나는 파문당한 건가요? 셀레나가 근처에 있다던데…….”

“네에? 그게 무슨 말인가요?”

“여기서 오 분쯤 걸어가면 나오는 시민회관에서 상인들의 박람회가 있는데, 알란 자작이 그곳에서 셀레나를 보았대요.”

시에나의 눈꺼풀이 경련했다.

허름한 여관에서 빨래나 하며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박람회에 있다고?

그녀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다. 얼마나 비천해졌을지, 과거의 자신처럼 볼품없어졌을지 말이다.

마침 급하게 그녀를 찾아온 시온이 말했다.

“시에나. 여기 있었구나. 잠시 일이 있어서 가 봐야 할 것 같다. 혼자 있을 수 있겠어?”

“그럼요. 먼저 가 보세요. 전 조금만 더 있다가 돌아갈게요.”

“그래. 그럼 있다가 집에서 보자.”

시온이 떠나고 시에나는 자선 파티장을 나왔다.

어차피 셀레나의 이야기가 나오면 그 때문에 자리를 피한다는 걸 보여 줘 입을 막아야 했다.

그러니 오늘은 이 정도로 얼굴을 비친 것으로 만족해야겠지.

시에나는 셀레나가 있다는 회관으로 향했다.

아직도 그녀가 그곳에 있다면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홀로 비웃을 요량이었다.

그러나 시에나가 보게 된 것은 허름해진 셀레나가 아니었다.

‘저게 뭐야…….’

진통제라는 허무맹랑한 약물을 판답시고 무시당하는 걸 보자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려는 때에 셀레나는 다친 사람을 도왔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셀레나를 찾았다. 약을 달라고, 그 효능을 보고 싶다며.

까득. 이를 악물자 턱에서 소리가 들렸다.

셀레나는 여전했다. 볼품없는 옷을 입어도, 두 뺨이 수척해져도, 더 이상 에스타리온이 아니게 되어도.

그녀는 스스로 빛나는 별이었다.

주변의 도움 따윈 필요 없이 어디에 있건 홀로 반짝일 줄 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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