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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40화 (41/134)

<40>

“당신은…….”

나를 확인한 원장 사제가 놀란 얼굴을 했다.

나도 모르게 옆에 있던 에이든 경의 팔을 붙잡고 몸을 덜덜 떨었다.

원장이 내게 상해를 끼친 게 아님을 잘 안다. 그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너무도 고통스러웠기에 얼굴만 보아도 숨이 턱턱 막히도록 무서웠다.

“선생님, 괜찮아?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에, 에, 에이든 경… 그게, 그, 그게… 헉.”

가슴이 조여 왔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고 바들바들 떨리는 몸이 통제되지 않았다.

이단심문소에서의 고통이 떠올랐다. 춥고 배고프고, 실바람에도 산산이 부서질 듯 힘겨웠던 그 순간들이.

“이런. 셀레나 씨를 안으로 옮기는 게 좋을 듯합니다.”

원장 사제의 제안에 에이든 경이 나를 안아 들었다. 그는 단박에 나를 안으로 옮겼다.

응접실 소파에 기대어 물을 마시자 떨림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괜찮으십니까?”

사제의 물음에 숨을 들이켰다.

대꾸해야 하는데 목소리를 듣자 또다시 가슴이 내려앉는 바람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간 많이 걱정했습니다.”

“아는 사이야?”

에이든 경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경계 어린 얼굴을 한 그가 나와 사제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이, 이단심문소에서 저를…….”

심문하셨던 분이세요.

말을 마무리하지 못한 건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곳에 들어간 게 치욕스러웠으니까.

목소리가 떨려 왔지만 태연한 척 물었다.

“사제님. 잘 지내셨나요?”

“제가 잘 지내고 말고 할 게 있겠습니까. 셀레나 씨는… 많이 좋아지신 듯해 다행입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곳에서 사제님을 뵙게 될 줄 몰랐는데… 이곳의 원장님이시라고요?”

“네. 2년 전 이곳에 부임해 왔습니다. 헌데 어쩐 일로 들르신 건가요?”

“맡겨야 하는 아이가 있어서 미리 환경조사차 온 거다.”

내가 대꾸할 새도 없이 에이든 경이 나섰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처럼 무게감 있고 무뚝뚝한 말투였다.

‘다른 사람 같아.’

사제와 나 사이를 가로막은 너른 등이 보였다. 겁먹은 나를 배려해 주는 걸 테다.

에이든 경이 친절을 베푸는 투박한 방식임을 아는데 코끝이 찡해졌다.

이단심문소에서 누구도 나를 위해 나서 주는 사람이 없었다.

힘겨워하는 것들로부터 보호해 준 이도 없었고 다정함을 보인 이도 없었다.

‘그곳에 가기 전 에이든 경을 알았다면 무언가 달랐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사제가 물었다.

“아이요? 몇 살이나 됩니까?”

“나이는 열 살이고 사내아이다. 얼마 전 조모가 죽으며 고아가 되었지. 내가 거둬 기르고 싶지만 이 나라 법이 안 된다더군.”

“영양 상태는 어떻습니까? 아픈 곳은 없고요?”

“내가 그 정도도 못 챙겼을까?”

“아… 죄송합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걸 지켜보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서로 제대로 된 통성명을 하지 않았음을.

“셀레나 레이온이에요.”

“레이온?”

“파문되었으니 마땅히 새 이름을 가져야죠.”

“그렇군요. 마누엘 모레노입니다. 편히 마누엘이라 불러 주세요.”

“에이든 칼립소다.”

“칼립소? 설마…….”

마누엘 사제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에이든 경은 자신을 보고 놀라는 반응이 익숙한지 태연하게 요구했다.

“시설을 돌아볼 수 있을까?”

“아, 예. 얼마든지요.”

에이든 경이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마누엘 사제를 데리고 가는게 좋을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에이든 경. 사제님과 따로 대화하고 싶은데…….”

“그럼 혼자 다녀오지.”

“감사해요.”

나가기 전, 에이든 경이 걱정스레 나를 확인했다.

잘 다녀오란 의미로 미소를 지어 보이자, 그는 한숨을 삼키며 방을 나갔다

그러고 나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먼저 말을 꺼내기 힘든 분위기였다.

나는 감정을 갈무리하느라 힘들었고, 마누엘 사제는 마누엘 사제대로 가라앉은 얼굴을 했다.

침묵 속에서 어렵사리 이야기를 꺼낸 건 마누엘 사제 쪽이었다.

“종종 기도했습니다. 셀레나 씨가 잘 지내기를요.”

“…….”

“제가 많이 미우시겠군요.”

“밉지 않아요. 다만 그때의 기억이 그림자처럼 붙어서 저를 두렵게 만드네요.”

“유감입니다.”

잠시 대화가 끊기자 밖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시금치를 먹으면 기사 아저씨처럼 멋져질 수 있어요?”

“시금치만으로 되는 줄 알아? 당근이랑 호박도 잘 먹어야 해.”

“호박도요?”

“그래.”

슬쩍 창밖을 확인하니 에이든 경이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아이들을 몰며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게 보였다.

아이들은 단번에 본질을 꿰뚫는 능력이 있나 보다.

얼굴에 흉터가 있어서 두려워하긴커녕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어떤 아이인지 모르지만 이곳은 다른 보육원과는 다른 곳입니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사랑으로 키우고 있으니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들어올 때 언뜻 보았는데 아이들 표정이 밝아 보였어요.”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무척이나 소중한 존재죠. 염려가 되신다면 매주 아이의 근황을 편지로 보내드릴 수도 있습니다.”

마누엘 사제는 진심을 보여 주고 싶은지, 내게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와중에도 그간 기록한 보육원 아이들의 육아 기록을 보여 주었다.

아이들과 보육원을 쭉 둘러본 에이든 경은 육아기록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여기로 하면 되겠어. 마침 윌 또래 아이들도 많았으니 잘됐네.”

그렇게 보육원 탐방은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물론 결정이 끝났을 뿐, 에이든 경은 한참 동안 아이들에게 시달린 뒤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 *

보육원에 다녀온 뒤로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에이든 경의 수업 강도도 높인데다 개인시간엔 박람회 준비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우편을 통해 수많은 서류가 오가고, 틈틈이 관련 업체에 들러서 확인하고 처리할 것들이 많았다.

이렇게 바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에이든 경은 오전마다 검술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사실 보육원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그가 고백했었다.

“사실 잭슨에게 검술 수업을 듣기로 했어.”

“검술이요? 그는 하인인걸요.”

“기사 출신이래. 설득하느라 애를 먹긴 했는데 어떻게 잘 해결했거든. 그러니 더 이상 검술 스승을 찾아보지 않아도 돼.”

“으음…….”

“왜 그래. 선생님이 볼 때 뭔가 걸리는 게 있어?”

“잭슨이 썩 성실한 사람은 아니에요. 그 점을 유의하셔야 할 거예요.”

“알아. 내가 성실하게 할 테니까 상관없어.”

명쾌하게 정리한 그는 다음 날부터 훈련에 매진했다.

‘아… 이 향기는…….’

마지막으로 가방을 확인하다가 뒤에서 느껴지는 향기에 몸을 돌렸다. 그러자 소리 없이 들어온 에이든 경이 보였다.

에이든 경은 훈련 후 덜 말린 머리로 수업에 들어오곤 했다.

샤워를 한 뒤 축축하게 젖은 머리를 한 그에게서는 특유의 향이 났다. 청량하고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향 말이다.

“언제 오셨어요. 기척을 내시지.”

“기척은 냈어. 선생님이 못 들은 것뿐. 오늘부터 사흘간 박람회에 부스가 올라간다고 했지?”

“네. 조금 떨려요.”

“전혀 떨리는 것처럼 안 보여.”

그가 두 눈을 곱게 접자 사르르 보이는 눈웃음에 시선이 못 박혔다.

에이든 경이 나타난 것만으로 공기가 뒤바뀌고 정체되어 있던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한 것 같았다.

“혼자 이 주 만에 박람회 준비라니, 두 번은 못하겠어요. 헤레이스라도 있으면 좋았을 텐데…….”

“헤레이스?”

에이든 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모르는 이름이라 궁금한 눈치였다.

“저와 함께 진통제를 개발한 연구소 소장님이세요.”

“아하. 근처까지 데려다줄까?”

“짐마차를 따로 예약해 뒀어요. 가져갈 물건이 많다 보니. 앗. 시간이 다 됐네요. 이만 가 볼게요.”

허겁지겁 가방을 챙겨 내려가자 에이든 경이 쫓아 내려오며 내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었다.

“가면서 먹어. 어제 저녁도 안 먹었잖아.”

“아…….”

에이든 경이 준 종이봉투 속에는 햄과 치즈를 끼운 빵이 들어 있었다.

사실 에이든 경은 나를 돕고 싶으니 일손을 거두어도 되겠냐고 제안했었다.

하지만 아이들 소꿉장난도 아니고, 내 미래가 달린 일이라 에이든 경까지 신경 쓰며 진행할 여력이 없을 것 같아 선을 그었다.

“박람회는 오롯이 제가 감당할 부분이에요. 에이든 경이 신경 쓰지 않으셨으면 해요. 그리고 신경 쓰이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할 테고요.”

내 말에 그가 어떤 얼굴을 했더라.

흐릿하게 걸린 미소가 조금 씁쓸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 * *

박람회장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막혔다.

근처에 위치한 호텔에서 아멜리아가 주최한 자선 파티가 있을 예정이라 수도의 귀족들이 그쪽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에이든 경도 참석할 수 있으면 좋은데.’

귀족 사회에 인맥을 만들고 차츰 세력을 구축해 제대로 된 영웅으로 인정받길 바랐다.

하지만 이번 아멜리아의 자선 파티는 인맥으로 알음알음 연결된 이들만 모아 치르는 행사였다.

행사에선 손수 만든 향수와 향기가 나는 비누를 만들어 팔아 기부금을 형성할 예정이다.

본래 공동주최자가 나였기에 잘 안다.

‘그땐 내가 바로 옆에서 박람회에 참석하게 될 줄은 몰랐지.’

본격적으로 박람회가 시작되기 전, 얼른 소분된 진통제와 마취제를 진열했다.

고작 약 두 종류로 부스가 채워지진 않겠지만, 진통제를 액상형과 가루형, 두 종류로 준비한데다 의학지식과 과학적 효과에 대한 설명서와 판넬이 준비되어 아주 휑하지만은 않았다.

‘이곳에 참석한 목적은 딱 하나야. 눈도장을 찍는 것.’

단번에 유통망을 확보하고 사업 활로를 뚫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에스타리온 백작의 말마따나 사기꾼들이나 제국에서 진통제는 만들어 내는 약물이란 인식이 있었다.

강력한 진통 효과를 가진 물질이 많지 않아 보통은 마약 성분을 섞어 정신을 몽롱하게 만든 걸 진통제랍시고 팔았기 때문이다.

행정부 직원이 나를 따로 불러 뇌물을 요구한 것도 원체 신뢰받지 못하는 분야라 가능했던 거다.

그러니 오늘, 진통제의 효능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을 게 뻔하다.

하지만 그 정도는 이미 각오하고 와서 괜찮다.

오늘 내 목표는 명함과 소분된 약물을 뿌리는 것이지, 단박에 가시적인 결과를 내는 게 아니다.

‘아프면 어쩔 수 없이 허황되었다고 생각한 약물이라도 먹어 보게 되어 있어. 그렇게 효과를 체험한 순간부터가 시작이야.’

박람회에 온 이들은 큰돈이 오가는 사업가들이다.

그들 중 한 명에게만 효능을 납득시키면, 그 사람은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한 채굴업자처럼 눈을 번뜩이며 찾아올 테다.

“할 수 있어.”

심장의 두근거림이 기분 좋았다.

내가 성공하는 것. 내게 필요한 것들을 선물해 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기억도, 가족에 대한 사랑과 추억, 우정… 모든 걸 잃은 내가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나는 박람회 입장문이 열린 걸 확인하며 부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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